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때 일어난 환관의 데모

중은우시 2007. 10. 31. 18:01

글: 이개주(李開周)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북경성에서는 데모사건이 벌어졌다.

 

황제시대에 중국에서 데모가 일어난다는 것은 아주 드문일인데, 이 때는 예외였다. 데모에 참가한 사람이 4천여명이었을 뿐아니라, 데모행렬은 자금성에 가까이 다가갔고, 더욱 놀라운 일은 데모대의 구성원들이 모조리 환관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아주 특이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4천명의 환관이 내성(內城)을 한바퀴 돌고, 자금성바깥에 모여서 날카로운 찢어지는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그들의 구호는 단 하나였다: 황제에게 일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오늘 날이라면, 그들의 이런 요구는 상대적으로 만족스럽게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직인원에 대한 재취업과 마찬가지로, 졸업후 직장을 구하지 못한 대학생들을 위한 취업소개와 마찬가지로 여러 정부부서에서 나서서 여러번 취업설명회도 하고, 취업희망자들도 기대수준을 낮추어서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환관의 임무를 수행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일거리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태국으로 가서 트랜스젠더쇼를 해도 될 것이다. 아니면 태사공 사마천의 선례를 따라, 몸은 완전치 못하지만, 뜻은 온전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역사서를 쓴다든지 해서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러한 재취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래도 정부가 관심을 가져준다고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는 명나라였다. 최고지도자인 명헌종은 그렇게 따뜻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해결방식은 무력진압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자금성밖에는 방망이가 난무했고, 데모대에 참가했던 자들의 곡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들은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물러났다.

 

지금 되돌아보자. 왜 그렇게 많은 환관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것일까? 명나라의 역사를 뒤적여 보면, 북경성에 이런 기구가 하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場子)" 장자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설립된 민영기구이다. 주요 업무는 황궁에 환관을 공급하는 것이다. 사실상 황제황후 및 후궁들을 위하여 서비스하는 특수업무에 종사하는 환관들에게도 직급이 있었고, 급여가 있었고, 이들은 철밥통을 들고, 국가의 녹을 먹고 살았으며, 승진의 기회도 있었다. 생�거으로 약간 특수한 것을 빼고는 다른 측면에서는 공무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장자의 사업은 아주 번성했다.

 

장자의 업무과정은 이렇다: 환관이 되고 싶은 사람은 장자에 신청서를 낸다. 그리고 수속비와 교육훈련비를 납부한다. 장자는 그와 계약을 체결하고, 그 사람을 위하여 수술을 해준다. 수술후에는 다시 궁중예절을 교육시킨다. 마지막으로 황궁에 보내서 환관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 과정은 교육과 분배라는 두 가지 단계로 나뉘어진다. 장자는 지금의 국립대학과 유사한 기능을 했다. 환관을 1명 교육시켜서 길러낼 때마다 일정한 돈을 받았다. 장자의 이윤은 상당히 괜찮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경영하고자 했다. 금방 장자의 수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매 장자마다 황궁에 공급할 수 있는 환관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장자들은 서로 시장을 빼앗으려고 싸우게 된다. 많은 장자들이 게임규칙을 어기고, 매번 모집하는 환관T/O보다 많은 인력을 길러냈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양성된 환관의 수량은 황궁에서 필요로 하는 수량을 훨씬 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찾아갔지만, 황궁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막 졸업한 많은 환관들이 대량으로 실업자가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취업난의 원인은 인재과잉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성화연간의 중국에서 인재는 전혀 과잉이 아니었다. 과잉인 것은 환관이었다. 이상한 것은 당시 장자들이 왜 인재를 양성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환관만을 양성하려고 하였느냐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