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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은 쇄국정책(鎖國政策)인가?

by 중은우시 2007. 7. 6.

글: 유앙(劉仰)

 

명나라 역사를 얘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주원장의 해금(海禁)정책을 우매하고 낙후된 쇄국정책이라고 비난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원인을 따져본다면, 이 정책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있었고, 간단하게 전면적인 쇄국정책이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주로 일본해적(나중에 왜구라 부름)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왜구가 출현한 시대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만일 순수하게 이 단어로만 말하자면, 일찌감치 5세기경부터 이 단어는 나타났다. 나중에 왜구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은 변해왔다. 1000여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왜구는 기본적으로 태평양서안지구의 해적을 가리켰고, 이 해적은 일본인위주로 되어 있거나, 일본을 기지로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현재 말하는 왜구는 명나라때 해악을 많이 끼쳤던 바로 그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왜구는 원나라때부터 중국의 연해지역을 괴롭혔고, 16세기에 이르러 소탕되었으며, 진정으로 소멸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중국에 대하여 해악을 가장 심하게 끼친 시기는 전후 약 300년에 걸친 기간이었다.

 

현재 왜구의 창궐은 명나라 해금정책의 결과라는 견해가 있다. 이들은 명나라 해금정책이라는 쇄국정책이 얼마나 위해를 가했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필자는 이런 견해는 너무나 단순화하였다고 본다. 왜구의 창궐은 확실히 해금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단단하게 해금의 결과라고 하기는 힘들고, 해금과 왜구의 창궐을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다. 원나라이전에,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계속 괜찮은 편이었다. 문화교류와 무역교류가 제법 많았다. 그리하여, 원나라이전의 중국역사에서 기본적으로 왜구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송나라때 조선에서는 왜구와 해금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 시기의 조선은 일찌기 명을 내려, 일본과 교역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중 일부 특수교역에 대한 금지령은 아주 엄격했다. 송나라는 중국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했던 시기였다. 화약, 인쇄술이 모두 이 시기에 출현했다. 중국의 화약과 인쇄술은 금방 조선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을 방비하기 위하여, 화약기술의 유출을 엄격히 금지했고, 일본인에게 화약기술을 전수해주면 사형에 처하였다. 이 금지령은 후기의 명나라의 해금령과 비슷하다. 당시 명나라는 금지교역물품명단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는 철화(鐵貨), 우마(牛馬), 군기(軍器)등 물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금지령은 분명히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조선을 포함한 해금의 주요대상은 일본의 해적이었다는 것을.

 

일본은 섬나라이다. 물자가 결핍되어 있고, 오랫동안 문화도 낙후되었다. 오랫동안 중국에 가까웠던 조선은 일본보다 훨씬 더 발달하였다. 조선인들은 그 시기에 일본인들을 야만인으로 보았다. 일본의 섬나라특징은 그들로 하여금 대외무역의 필요성을 크게 하였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비교적 좋았을 때는 조공무역이 대체로 일본 상류계층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무역에서 얻는 이득이 크므로, 일본은 각 시기마다 중국과의 밀수무역이 존재했었다. 일본의 개화가 비교적 늦었으므로, 자질이 비교적 떨어졌고, 밀수무역에 종사하는 자들은 자주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중국연안을 약탈하는 해적으로 변모하곤 했다.

 

당송시기에, 중일관계는 비교적 좋았다. 전환점은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는 전쟁을 일으키면서 발생한다. 쿠빌라이는 조선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두번에 걸쳐 일본을 공격하나, 결국 실패한다. 전쟁으로 인한 적대관계로 적대국간의 관방 및 민간무역은 일체 금지되었다. 원나라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다. 그러나, 방대한 원나라로서야 일본과 같은 낙후한 소국과의 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별 문제는 없었지만, 일본에 있어서는 중국과의 무역을 상실한 것은 전체 경제발전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원나라때부터, 일본의 민간밀수행위는 지방할거세력의 지원을 받는 해적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사서에서도 왜구의 출현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쿠빌라이군대를 이겼다는 전적을 믿었던지, 일본상인들은 심지어 무장선박을 이끌고 중국까지 와서 원나라에 무역을 개방해달라고 요구했다. 원나라정부는 전쟁패배의 교훈을 잊지 않고, 일본인과 다시 전쟁을 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해금(해상무역금지)조치를 취했다. 비록 원나라기간동안 원나라정부는 잠시 일본에 대한 무역을 개방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일본상인의 상업행위는 해적행위와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서에서는 일본인들을 "개간리소민(皆奸利小民, 모두 간악하고 이익을 쫓는 소인배들이다)"라고 적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 원나라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일본과의 무역을 거절한다. 왜구의 해적행위는 바로 이 시기부터 중국의 연해지구를 진정으로 위협하기 시작한다.

 

명나라정부가 성립한 후, 최초의 주요위협은 도망친 몽고귀적이었다. 명나라정부는 일본과 우호관계를 건립하고자 노력한다. 당시의 일본이 내란상태였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가 지방할거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해적행위를 제지하기 쉽지 않았다. 명나라정부는 어쩔 수 없이 해금정책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명나라정부는 바로 일본과 조공무역을 재개한다. 명나라의 조공무역관례에 따라, 명나라는 일본의 조공사절단의 차수, 인원수, 선박수를 규정했다. 그러나, 해적질에 익숙했던 일본상인은 심지어 일본정부를 대표한 조공사절단에 포함되었고, 그들의 중국내에서의 행동은 아주 제멋대로였으며, 사기, 협박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서 여러차례 살인행위까지 저지른다. 명나라정부는 부득이 일본에 징벌을 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명나라의 징벌수단은 아주 재미있다. 일본도는 중국이 수입하는 주요한 상품의 하나였다. 일본도는 당시 일본에서 1자루당 가격이 800-4000문이었는데, 중국정부가 구입하는 가격은 6000-10000문이었다. 그리하여, 조공무역은 일본에 돈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조공사절단이 중국에서 계속하여 간악한 짓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렀고, 조공무역에서 명나라정부의 돈을 버는 동시에, 해적밀수로 대량의 일본도를 수출했다. 그리하여, 명나라정부의 일본에 대한 징벌의 하나는 바로 1차 조공무역에서 300문의 가격으로 조공사절단의 일본도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당시 일본중앙정부는 연약하고 무능했고, 지방군벌들이 할거하여, 조공사절단의 인원들도 대부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소인배들이 많았다. 여기에 일본과의 조공무역은 해적행위를 감소시키는 역할도 하지 못했다. 명나라정부는 결국 할 수 없어 일본과의 조공무역을 중단하고, 해금조치를 강화하는 것으로 최종적인 징벌을 내렸다. 왜구는 이로 인하여 더욱 창궐하게 된다.

 

명나라시기에, 중국정부는 일찌기 여러번 일본에 해적을 관할하고 통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의 중앙정부가 비교적 강할 때에는, 중국정부의 여러가지 외교교섭은 성과를 거두어서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일본중앙정부가 연약하고 무능할 때는 일본이 근본적으로 각지방에서 발생하는 해적을 통제할 수 없었다. 명나라때 왜구가 가장 창궐하였는데, 사실은 바로 일본이 가장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였다. 명나라정부는 왜구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것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명나라정부는 포르투갈인들에게 마카오에 무역기지를 건설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왜구가 일단 깨끗이 소탕되자, 명나라정부는 즉시 해금조치를 취소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해금조치는 간단히 쇄국정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고, 일본해적을 겨냥한 특수한 조치라고 보는 것이 맞다.

 

송나라때 조선의 해금은 조선과 중국의 무역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원나라의 해금도 아랍인과의 무역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주원장이 해금령을 반포하였지만, 주원장의 아들인 영락제는 역사상 최대의 무역선단을 파견하여 정화가 아프리카까지 가서 무역을 하고 동남연해의 대외무역을 보호해준다. 당연히 명나라의 대외무역은 조정의 입장에서 이루어졌고, 조정이 통제하는 조공무역을 원했다. 그러나, 조공무역은 일종의 정치적 수단이고, 이는 민간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대외무역을 저지할 수 없었다. 엄격한 해금의 대상은 사실 모두 일본해적을 겨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