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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홍광(弘光)조정: 기괴한 정권

by 중은우시 2008. 11. 12.

글: 조언(肇言)

 

한간(漢奸)이라는 말은 적에 투항하여 자기민족을 배신한 한족(漢族)을 가리킨다. 이렇게 말하자면, 전국시대에 진(秦)나라의 박해를 받아 흉노로 망명한 장군들은 한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때는 한족왕조가 아직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흉노로 도망치는 것이나, 조(趙)나라로 도망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한(楚漢)전쟁이 끝난 후, 유방의 시기를 받아, 흉노로 도망간 한신(韓王, 유방의 부하 한신이 아니다), 노관(盧)도 한간이 아니다. 이릉(李陵)은 군사 오천을 데리고 대막 수천리를 깊이 들어가서, 10만의 흉노대군과 싸웠으나 결국 힘에 부쳐 포로가 되었고, 흉노에 투항했지만, 한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는 원래 때가 되면 한나라로 도망쳐서 돌아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한무제는 이릉이 흉노가 한나라를 치는 것을 도와준다고 생각하여 화가나서 그의 모친과 가족을 모두 죽여버려서, 그가 돌아올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영웅은 영웅을 아낀다. 투항후의 이릉은 선우(單于, 흉노왕)와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러했지만, 그는 흉노를 도와 한나라를 치는데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릉이 흉노군대를 이끌고 한나라군대와 싸운 것은 한무제가 죽은 다음의 일이다. 그의 부하는 한나라군대에 크게 패하여 돌아간 적이 있다. 대체로 그 당시에는 흉노선우에게도 일부 사적인 친구가 있었고, 투항한 적장이 반드시 흉노에 충성을 바칠 필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제(金日) 는 한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이릉과 달랐던 점이라면 그는 한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부견(堅)을 도운 왕맹(王猛)은 어찌되었던 현명한 재상이다. 그는 한편으로 부견을 도와 북방의 형세를 안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한족의 이익을 보호해주었으며, 부견이 동진(東晋)을 치는데 반대했다. 이런 모범이 있었으므로, 많은 한족지식인들은 소수민족정권에 몸을 담았다. 나중에 이원호(李元昊)를 도와 서하(西夏)를 건립한 사람들은 비록 송나라의 반도이지만, 그들을 한간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몽골국에서 충성을 다한 유병충(劉秉忠)은 원래부터 송나라의 신하는 아니었다. 거란인인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원래 금나라의 신하였으나,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건립된 것이며, 야율초재는 요나라의 황족이다. 야율초재에 있어서, 금나라는 자기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하니 그가 몽골에 충성을 다한 것이다. 유병충에 있어서, 그가 어렸을 때 금나라는 이미 멸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몽골의 백성이다. 남방한족의 송나라는 그에게는 요원한 나라였다. 그의 집은 북방에 있었다. 그는 원나라의 공신이며 충신이었다.

 

범문정(范文程)은 요동에 살던 한족이다. 여진인들에게 붙잡혀 노예가 된 후에 금방 귀순한다. 그때 후금은 비록 명나라와 싸웠지만, 아직 남하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건주여진은 얼마전까지 명나라의 통치하에 잇던 도지휘사사였다. 누르하치의 부친도 명나라에서 관직을 받았다. 후금은 중국경내의 반란자일 뿐이었다. 지방군벌 혹은 반란을 일으킨 농민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후자들과 다른 점이라면, 후금은 소수민족의 정권이었고, 후금의 영수는 소수민족의 추장, 세습귀족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명나라와 비교하자면, 후금은 더욱 활력이 있었고, 그 우두머리는 훨씬 영명한 정권이었다.

 

홍승주(洪承疇)는 명나라의 중신이고, 일찌기 충신이 되고자 했다. 송산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은 그에게 있지 않다. 다만 그는 포로가 된 후에 처음에는 죽기로 결심했으나, 나중에 투항한다. 그는 청나라통치자의 인격에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만신창이인 명나라를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두 조정을 비교한 후 신왕조를 위하여 천하를 열고,공덕을 세워서 앞길을 열자는 말에 설득당했다. 그는 나중에 확실히 청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는 권력이 미치는 범위내에서, 가능한 한 피정복사회에 파괴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고, 살륙을 줄이고, 주민을 보호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 오삼계(吳三桂)는 명나라가 망하기 전에, 그는 명나라에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쳤다. 그는 청나라군대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장수였다. 그러나, 이자성이 북경을 포위공격할 때, 그는 망설인다. 북경으로 가서 황제를 보호할 것인가? 그의 4만 병력은 백만 농민의 앞에서라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연과 기다림을 선택한다. 이자성에 대하여 그는 원래 귀순할 생각이 있었다. 그는 이미 썩을대로 썩은 정권과 함께 순장될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그의 식구 삽십여명은 모두 북경에 있었고, 이미 인질이 되었다. 그의 카드는 손안에 쥐고 있는 수만정예병사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산해관이 그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청나라병사의 남하를 막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 현재 그에게 있어서, 도대체 산해관을 지키는 것이 명나라를 위하여인지  대순정권을 위하여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중원의 문화를 위하여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자성은 그를 절망시킨다. 어찌되었건 그는 이미 대순정권에서 출로를 찾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살해야만 했을까? 혹은 무협소설에 나오는 협사처럼 홀연히 떠나야 했을까? 그렇다면 산해관은 어쩐단 말인가? 수하의 수만의 병사는 어쩐단 말인가?

 

그에게는 하나의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청나라에 투항하는 것이었다. 오삼계를 위하여 변호해주는 사람들은 그가 진심으로 병력을 빌려 명나라를 구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사실 그것은 그저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청나라군대는 여러해동안 꿈꾸던 것이 바로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불러들인 신을 다시 돌려보낼 수 있을까? 오삼계는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청나라군대를 이끌고, 직접 명나라의 영력정권을 전멸시킬 때까지 계속 남명정권의 잔당을 쫓는다. 청나라군이 산해관을 들어온 후, 오삼계는 바로 견고한 한간이었다. 그가 나중에 반청복명을 부르짖지만 그것은 별개의 일이다.

 

진정한 나쁜 놈은 이성동(李成棟)과 같은 무리이다. 이들은 죽는게 두렵거나 살고싶어서 한간이 된 것이 아니다.

 

명나라에서 남경을 지키던 관리들은 북경이 함락된 후, 처음에는 복왕(福王)을 모실 것인지 노왕(潞王)을 모실 것인지를 가지고 양파로 나뉘었다. 사가법(史可法), 장신언(張愼言), 여대기(呂大器), 강왈광(姜曰廣)은 친척관계를 따지자면 복왕이 가장 가까우나 인품이 좋지 않으므로 노왕을 모시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슨 일곱가지 안되는 사유를 들었다. 장정신(章正宸)은 노왕은 황실과의 관계가 멀기 때문에 복왕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강왈광, 노진비(路振飛)가 복왕을 세우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런 형세하에서, 명나라의 번왕들중 누가 먼저 남경에 오는지에 따라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마사영(馬士英)이 선수를 써서 복왕을 손아귀에 넣고 유공소(劉孔昭), 유양좌(劉良佐)등 병력을 보유한 장수들에게 연락한 후, 앞질러 남경으로 들어가서, 홍광제(弘光帝)가 된다. 사가법등 남경에 남아있던 신하들은 일시에 어쩔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마사영이 조각을 할 때, 사가법이 배제되고, 완대성(阮大)이 복귀하는 등의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다.

 

그 당시 북쪽은 청나라군대가 변경을 위협하고 있고, 서쪽은 이자성, 장헌충의 잔여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처럼 구차하게 연명하는 상황하에서, 마사영과 완대성은 여전히 자기의 심복을 심고 뜻이 다른 자는 배제했다. 번역안, 입순안등의 사건이 벌여서 한편으로 숭정제때 위충현에게 붙어서 타격을 받았던 엄당(黨)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순에 투항하여 관직을 받았다는 이유로 동림당(東林黨)과 복사(復社)의 세력을 탄압했다. 복사측에서, 학문이 깊은 선비들이 대적이 눈앞에 와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대성을 타도하려는 시도를 늦추지 않았으니, 쌍방은 물과 불같이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다.

 

청나라군이 변경에 밀려올 때, 홍광조정은 여전히 태감을 뽑고, 궁녀를 들였다. 더러운 기운만이 넘쳐났다. 보통백성은 전가족이 핍박받아 자결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도 홍광제는 매일 술을 마시고, 잡극을 보고, 유녀와 놀아났다. 남경의 백성들을 홍광제는 "노신선(老神仙)"이라고 불렀다. 권력을 쥔 재상 마사영은 백성의 고혈을 짜냈고, 온갖 나쁜 짓을 다했다. 거의 매일 자신에 반대하는 자를 죽였고, 재물을 긁어모았다. 바로 청나라군대가 회안(淮安)을 점령하고, 남경과 지척의 거리에 다가왔을 때, 홍광제는 여전히 거지들을 불러모아 개구리(蛤)를 잡게 했고, 마사영은 매일 귀뚜라미(蟋蟀)싸움을 즐겼다. 남경에서는 두 사람을 가리켜, "하마천자, 실솔재상"이라고 불렀다.

 

조정이 혼란하였다. 마사영은 관작을 남발하여, 곳곳에 중서(中書)가 있고, 길거리에는 도독(都督)이 넘쳐났다. 감기(監紀)는 양떼처럼 많았고, 직방(職方)은 개처럼 천했다. 관직을 주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명나라 이백년동안의 옛사건을 모두 들춰냈다. 방효유에서 숭정에 이르기까지, 태자, 영왕, 정왕, 살아있는 사람이건 죽은 사라미건, 모두 시호를 내렸다. 바로 이때, 동림당에 속하는 유종주(劉宗周), 강왈광, 여대기, 장신언등이 마사영을 탄핵하였고, 사가법은 아예 남경을 떠나서 양주독사로 갔다.

 

이때 몇 가지 괴이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괴이한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보통의 기이한 사건보다 훨씬 기이하고, 더욱 황당했기 때문이다.

 

먼저, 대비(大悲)라는 중이 나타난다. 그는 남경으로 와서 스스로 숭정제라고 하기도 하고, 스스로 정왕(定王)이라고 하기도 하고, 스스로 종실출신으로 출가해서 활불이 되었으며, 숭정제가 제왕(齊王)에 봉했다고도 했다. 심문을 해보니, 이 자는 제왕의 후손으로 이미 서인으로 폐해진 인물이었고, 노왕과 은원이 있어 남경으로 와서 노왕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이어서, 동(童)씨성을 가진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스스로 복왕이 군왕(郡王)일 때 원비(元妃)라고 한다. 홍광제는 이 두사람에 대하여 간단히 처리한다. 대비는 미친 자라고 죽이게 한다. 동씨성의 여인은 헛소리를 한다고 혹형을 가하게 해서 경위를 알아내는데, 그녀는 스스로 주왕(周王)의 가족인데, 주왕이 황제가 된 줄 알고 와서 덕을 보려고 했다고 하였다. 동씨는 일설에는 감옥에서 죽었다고 하고, 일설에는 청나라군대가 홍광제를 쫓아낸 후 조지룡에 의하여 석방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완대성은 이 두 사건을 이용하여 동림당을 모함하려고 했다고 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당초 이자성이 낙양을 함락시켰을 때, 복왕인 주상순(朱常洵)은 이자성의 부하에 의하여 노루고기와 함께 삶겨져서 농민군이 먹어치운다. 세자는 도망쳐 나와서, 한때 행방불명이었다. 명나라때 번왕은 임의로 왕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실제로 연금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어린 복왕을 아무도 몰라보았다. 당시 안휘일대로 도망쳐온 명나라종실은 대부분 가족을 데리고 왔는데, 복왕만이 혼자였다. 그의 내력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마사영조차도 복왕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찾아와서 황제자리에 앉은 이 복왕이 도대체 진짜인가 가짜인가? 대비화상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와 복왕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데, 감히 남경으로 와서 자신이 황제라고 떠들었는가? 돌연 튀어나온 동비는 도대체 진짜인가 가짜인가? 민간부녀라면 아무리 미쳐도 경성으로 가서 자기가 황제의 처라고 떠들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오매촌(吳梅村)의 <<녹초기문(鹿樵紀聞)>>에 따르면, 당시 학자인 황종희(黃宗羲), 전병등(錢秉)은 이 복왕이 실제로는 이시독(李侍讀)인데, 복왕의 집안 일을 잘 알았고, 복왕의 금인을 훔쳐내어 복왕의 신분을 사칭한 것이라고 보았다. 황제의 신분조차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은 중국역사상 아마도 유일무이할 것이다.

 

더욱 기괴한 것은 왕지명(王之明) 사건이다. 한 젊은이가 돌연 남경으로 와서, 스스로 숭정의 태자라고 말한다. 각종 사료를 보면, 그의 이름은 왕지명이다. 숭정의 태자는 이자성이 북경에 진입할 때 보이지 않았다. 정왕(定王)과 영왕(永王)은 그들의 외삼촌인 주규(周奎)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이 주규등은 이자성이 북경으로 진입하자 이 두 조카를 팔아먹는다. 마침 이자성은 이 두 아이들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했다. 이 두 황자를 계속 곁에 데리고 다녔다. 이자성의 군대가 산해관에서 패배하자, 두 황자는 행방불명이 된다. 청나라군대가 들어온 후, 한 젊은이가 주규를 찾아와서 스스로 태자라고 한다. 그리하여 숭정의 공주와 만나서 확인한다. 두 사람은 만난후 주규와 함께 끌어안고 통곡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적발될까봐, 주규는 태자를 다시 팔아먹는다. 청나라조정은 명나라에서 투항한 관리들에게 진짜인지 여부를 알아보게 한다. 결과는 의견이 서로 달랐다. 북경의 백성들이 태자의 생명을 보전해달라고 요구하여, 청나라조정은 불안해 한다. 태자가 진짜라고 말했던 사람들과 태자를 보호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모두 도르곤에 의하여 피살된다. 태자는 감옥안에서 목졸려 죽는다. 나중에 도르곤은 그가 진짜 태자였다고 믿었다고 한다.

 

북방태자가 목졸려죽는 동시에, 남방에 다시 태자 한 명이 나타난다. 도대체 어느 태자가 진짜일까? 혹은 둘 다 가짜였을까? 어떤 사람은 북방의 그 태자는 원래 황실의 친척인데, 용모가 태자와 아주 닮았고, 일부러 나타나서 주규, 공주와 연기를 했으며, 청나라정부를 혼동에 빠지게 한 것이라고 한다. 왕지명은 거꾸로 읽으면 명지왕(明之王), 즉 명나라의 왕이다. 이것은 홍광제에게 있어서 처리하기 쉬운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사람을 보내어 태자를 영접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확인시킨다. 다음 날 결론이 나온다. 이 태자는 가짜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혹시 진짜 태자가 왔다고 하더라도, 남경에 도착하면 가짜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대로 만일 복왕이 태자를 죽인다면, 가짜태자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를 진짜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방법이 없었다. 홍광제는 그저 이 태자를 감옥에 가두어두고 잘 먹일 수밖에는.

 

오매촌의 주장에 따르면, 왕지명이라는 것은 아마도 양유원이 말한 것이고, 남방태자는 혹형을 당하면서도 스스로 왕지명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태자가 남경으로 도망쳐 왔을 때, 황실친척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고, 이름을 숨기면서 살았는데, 행동거지에서 조심하지 않다가 진짜 신분이 폭로된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감옥에 가두어 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동비와는 다르다. 동비는 겨우 복왕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태자는 선제의 혈육이 아닌가? 무창에 버티고 있으면서 농민군을 막고 있던 좌량옥(左良玉)은 계속 홍광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일찌감치 마사영 일당의 엉터리없는 짓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핑계를 찾은 것이다. 아예 무창성을 약탈한 후, 대군을 이끌고 진지를 떠나서 남경으로 향한다. 명분은 "청군측(淸君側, 황제의 곁에 있는 간신을 제거한다)", 즉 마사영을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자성군대는 아지거(阿濟格)의 추격을 받아서, 수십만의 대순군대가 남하하고 있었다. 좌량옥은 농민군과 싸워서 이긴 적보다 진 적이 많았다. 좌량옥의 부대는 백성들을 괴롭힐 때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다. 그러나 전투는 가급적 회피했다. 마사영, 원대성을 토벌하고 태자를 구한다는 것은 아마도 핑계일 것이고, 이자성의 부대를 피하는 것이 진정한 의도일 것이다. 마사영도 이때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강회연안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전부 철수시켜, 좌량옥을 막게 한 것이다.

 

쌍방이 전투를 개시하려고 할 때, 좌량옥은 구강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좌량옥이 죽자, 그의 아들 좌몽경(左夢庚)이 부대를 계속 지휘하여 동쪽으로 갔다. 좌몽경의 부대는 이동하면서 살륙과 파괴를 일삼으며 태평부로 직접 향했다. 아마도 좌량옥이 죽었을 때 이미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강회일선의 방어부대를 모두 철수시키다보니, 청나라병사는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직접 남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사실도 그러했다. 사진(四鎭)중 하나인 원래 이자성의 부대에 있다가 항복한 장수 고걸(高傑)은 예전에 허정국(許定國)과 숙원이 있었다. 하남을 지키던 허정국은 이때 청나라에 투항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밤에 고걸을 불러서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고걸을 죽여버린다. 황하이남 회하이북의 광대한 지역은 청나라의 수중에 들어간다.

 

좌량옥만이 백성을 해친 것은 아니다. 그때 이자성이 약간 좋았던 것을 제외하고, 모든 군대가 토비보다 나빴다. 명나라의 관군이 가장 나빴다.

 

청나라병사가 남하하여, 서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성동은 황망히 도망친다. 고걸의 패잔병은 강남으로 건너와서 돌아다녔다. 이성동은 원래 고걸의 부하였다. 개봉을 지킬 때, 이자성과 전투를 하면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 당시에는 서주를 지키고 있었다. 강북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강을 건너가는 것은 아마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없이 청나라군대에 투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에 투항한 후 이성동은 물만난 고기였다. 곳곳에서 반청세력을 소탕했다. 청나라군이 강남에서 얻은 뛰어난 장수였던 것이다. 이 자는 바로 가정삼도(嘉定三屠)의 그 청나라장군이다. 악명이 자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이성동은 다시 그의 애첩이 자살의 방식으로 반란을 책동하자, 잠시 양심이 발현했는지, 소속 양광의 군대를 이끌고 계왕(桂王)의 반청진영에 가담한다. 그리하여 영력 소조정의 가장 중요한 장군이 되고, 나중에 장렬히 순국한다.

 

이런 자를 도대체 한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청나라군대가 도강할 대, 남명 홍광정권에서는 사가법이 양주에서 십일을 싸운 것을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그럴 듯한 저항을 조직하지 못했다. 마사영은 병사를 자신을 지키는데 썼고, 앞장서서 도망쳤다. 그러자 군대를 이끌던 장수들도 속속 도망쳤다. 홍광은 황득공의 군대로 도망쳐갔는데, 황득공이 자살한 후, 청나라군대에 생포된다. 사십만대군을 가진 홍광정권이 일시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일찌기 위충현에게 붙었다가 나중에 마사영 완대성의 번안으로 다시 기용된 통정사 양유원은 두 첩을 죽여서 관 속에 넣고, 다시 관 하나를 그 중간에 놓은 후 "양유원지구(楊維垣之柩)"라고 적어두고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강남의 도처에 격문이 뿌려졌지만 누구도 진정으로 명나라를 회복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청나라가 삭발령을 내린다는 소식이 강남에 전해진 후에야 격렬한 반항이 일어난다. 원래 투항했던 군민들이 다시 반청의 기치를 내걸었다. 저항운동의 지도자는 강남의 선비들이었는데, 이때 용감하게 싸우고 기개를 보인 점은 실로 눈물을 흘릴만 하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들, 조정에 있던 강왈광 사가법을 포함하여, 모두 아무런 쓸모없는 서생들이었다. 일을 당하면 그저 한목숨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저 죽으려고 했고,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명사를 읽다보면, 그저 죽음의 냄새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수만의 죽기를 각오한 열사들 중에서 왜 살아서 공을 세우려는 영웅이 없었을까?

 

예외중의 하나가 장황언(張煌言)이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이끈 경험이 별로 없었다. 해적출신인 정성공(鄭成功)은 원대한 목표를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대만을 통치하려고 했고, 대륙을 얻어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스스로 포기했다.

 

계왕의 영력조정은 마지막에 겨우 장헌충의 부하인 이정국(李定國)만 남게 된다. 그는 진정한 비극적 영웅이다. 그는 섬북(섬서북부)의 농민으로, 명나라 선비들의 나쁜 버릇이 없었다. 비록 장헌충의 양자를 지낸 적이 있기는 하나, 장헌충의 군대내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손가망(孫可望)처럼 장헌충의 깡패 더하기 비적의 기질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그 시대에 보기드문 정직한 군인이었다. 그는 영력정권에 충성을 다했고,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복왕이 포로로 잡힌 후, 도도(多鐸)에게 욕을 얻어 먹는다. 숭정의 사후에 충효를 다하지 않았으면서 감히 황제의 자리에 스스로 앉았다고. 그에게 "너의 선제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태자가 왔는데도 왜 황제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진상을 숨기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홍광제는 진땀만 흘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왕지명은 마사영 완대성이 도망친 후, 조지룡이 남경시민들과 함께 들어가서 구해낸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앉힌다. 황제의 자리에 앉은지 10일만에 도도가 남경성으로 쳐들어 온다. 전겸익(錢謙益)도 투항했다. 청나라군대가 각현에 투항을 권했는데, 투항을 권하는 글을 전겸익이 썼다고 한다.

 

나라에 재앙을 끼친 마사영은 난전중에 죽는다. 좌몽경은 아지거에게 투항한다. 완대성은 원래 풍류재자였다. 투항한 후 남명조정때의 간사하고 악독하며 음험했던 기풍을 완전히 바꾸어 선한 사람이 된다. 그는 자신이 늙고 병들었다는 점도 돌보지 않고, 청나라장병(주로는 한족)들을 잘 접대하다가 나중에는 과로로 행군길에서 죽는다.

 

남경이 함락되고, 당왕(唐王)의 소무(紹武)정권과 노왕(魯王) 정권이 들어선다. 명나라세력은 강소에서 절강복건으로 밀려났다. 두 왕이 패배한 후 계왕의 세력은 다시 광동광서, 운남으로 밀려난다. 마지막에는 중국국경에서 쫓겨나 버마로 들어간다.

 

남경이 함락될 때, 용감하게 저항한 명나라병사도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은 자살로 순국했다. 이는 매번 황조가 바뀔 때면 공연되는 프로그램이다. 홍광제때의 소란중에서는 아주 볼만한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말기의 전체적인 역사배경하에서 보자면, 그 빛이 어둡다. 그저 사가법의 빛만이 역사서에서 빛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