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불패전신(不敗戰神) 백기(白起) :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

중은우시 2006. 5. 3. 00:26

백기(白起) ? - 기원전257년

 

진(秦)나라 미현사람. 16세에 입대.

 

주요전적:

이궐지전(伊闕之戰)에서 한,위 연합군 24만을 참살.

초(楚)나라를 세번 공격하고, 합쳐서 35만의 초나라 군사를 섬멸.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장평지전(長平之戰)을 포함하여 60만의 조나라군사 섬멸

한나라, 위나라를 공격하여 30만을 섬멸

일생동안 6국의 군인 165만명을 섬멸함.

 

봉호 : 무안군

관직 : 국위(국방부장관에 해당)

별호 : 전신(戰神), 살인마(殺人魔), 전국사대명장의 우두머리.

 

백기는 여러차례 진나라의 천하통일과정에서 중요한 전투를 수행했다.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초나라 수도를 점령하여, 초나라로 하여금 천도하도록 하였고, 이후 초나라는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궐지전에서 한나라 위나라 연합군 24만을 섬멸하였으며, 이로써 진나라군대가 동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장평일전에서는 일거에 조나라군대 45만명을 섬멸하였고, 중국역사상 최초이자 최대규모의 포위섬멸전의 기록을 세웠다. 크고 작은 70여회의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 최저급의 무관에서 무안군에 봉해질 때까지 6국에서는 백기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기원전294년 : 진나라 소왕이 백기를 좌서장(左庶長)에 임명한다. 한나라 신성을 공략하여 무너뜨리다. 북진하여, 한, 위 연합군 34만이 이궐(하남성 낙양 용문)에서 견고히 지키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는 한, 위 연합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인원으로 쌍방이 대치하였다. 다음 해에 백기는 한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의심하고 협력하지 아니하는 것을 이용하여 각개격파하였다. 먼저 일부의 병사로 한나라 군대를 견제하면서, 주력부대를 집중하여 위나라 군대를 맹렬히 공격했다. 위나라 군대를 섬멸한 후, 다시 한나라 군대를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한, 위 연합군 24만이 섬멸되었다. 한나라의 주장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고, 국위로 승진한다.

 

기원전289년 : 대량조(최고군사장관)에 승진한다. 위나라를 공격하여 61개성을 함락시키다.

 

기원전279년 :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치다. 백기의 병력은 초나라 군대의 1/10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초나라를 습격하였고, 진나라 군대는 순조롭게 한수를 따라 남하하였고, 등(호북 양양의 북쪽)을 점령하고 초나라의 별도 언(호북 의성의 동남쪽)으로 공격해갔다. 초나라는 급히 대군 수십만을 북상시켜 언을 수비하였다. 백기는 언을 그냥 함락시키기 어려운 것을 알고는, 서쪽 백리 뙤는 곳에서 두 강의 물을 모아서 초나라군인과 백성 수십만명을 수몰시켜 죽였다. 기세를 타고 서릉(호북 의창)을 취하였다. 다음 해에 초나라의 수도 정(호북 강릉 서북)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진나라는 정을 남군으로 하고 백기를 무안군에 봉하였다.

 

기원전277년 : 백기는 강을 따라 북상하여 무(사천성 무산 북쪽)을 함락시켰다. 기세를 타고 남하하여 검중(현재의 호남 서쪽)을 평정하였다.

 

기원전273년 : 조나라, 위나라 연합군이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백기는 명을 받아 구원하러 가서, 연합군을 대파하였다. 위나라 병사 13만을 참하고, 조나라 군사 2만을 황하에 익사시켰다.

 

기원전264년 : 백기는 병사를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했다. 기원전262년에 야왕(하남성 심양)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상당군과 한나라 수도의 연결을 끊었다. 한나라는 상당을 떼어주고 화평을 원했는데, 상당군의 군수인 풍정이 이를 듣고는 상당군의 17개성을 조나라에 바쳤다.

 

기원전261년 : 진나라가 병사를 보내어 조나라를 공격하고, 상당군을 함락시켰다. 장평(산서성 고평 서북쪽)에 이르렀다. 조나라의 장군 염포는 장평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진나라가 오래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반간계를 행하였다. 조나라 왕은 계책에 속아 염포를 조괄로 대체하였다. 다음해 8월, 조괄은 진나라 군대와 결전을 벌였다. 동시에 진나라는 백기를 상장군으로 하여 장평의 군대를 접수하게 하였다. 백기는 일부러 패한 것처럼 후퇴하였다. 조괄은 병사를 이끌고 진나라 군영에까지 쫓아왔다. 백기는 일부의 군사로 굳건히 지키면서 2-5만(기록에 따라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의 병사을 우회시켜 조나라 군사를 포위하였고,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외에 별도로 5000의 기마병으로 조나라 군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꾸며, 조나라에서 지원병을 보낼 수 없도록 하였다. 백기는 조나라 군대를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9월하순이 되어 조나라 군대는 양식이 끊어진지 1달여가 되었다. 조괄은 여러 차례 포위를 뚫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화살을 맞아 죽었다. 백기는 승기를 잡아 공격했다. 조나라군사 45만이 항복했다. 백기는 "조나라 병사들은 계속 반란을 일으키니, 모두 죽이지 않으면 다시 어지러워질 것이다"라고 하고는 모두 묻게 하였다.

 

백기는 손자이래로 중국전쟁사상 위대한 군사지휘관이었다. 진나라 역사상 전공이 가장 탁월한 장군이었다. 백기의 일생은 병사를 잘 지휘하였고, 전쟁터에서 37년간 있었다. 70여개의 성을 취하고 백육십여만을 죽였고, 패전한 바 없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견고한 기초를 쌓았다.

 

백기의 지휘술은 전국시대 전쟁발전의 수준을 보여준다. 백기는 군사를 씀에 적과 아군의 형세를 분석해서 정확한 전략, 전술방침을 세워 적을 공격했다. 이궐지전에서는 병력을 집중하여 각개격파를 하였고, 언도지전에서는 수공을 취했다. 화양지전에서는 먼길을 우회하여 습격하는 전략을 세웠고, 장평지전에서는 고의로 패하는 척 유인하는 전술을 쓴 후에 포위하는 전술을 써서 45만을 섬멸했다.

 

백기의 작전지휘에는 세가지 특색이 있다. 하나는 공성하고 땅을 빼앗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하지 않았고, 상대방의 역량을 섬멸하는 섬멸전을 주요목표를 세웠다. 전투에서는 반드시 상대방을 섬멸하여야 한다. 이것이 백기의 전쟁목표였다. 그는 전쟁사상에서 포위섬멸전을 가장 뛰어나게 다룬 지휘관이고, 중국역사상 섬멸전을 가장 잘 이끈 세 명의 장수중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다른 두 명은 징기스칸과 인민해방군의 속유장군이다). 특히 백기가 2천년전에 이미 섬멸전의 개념을 도입한 것은 남다른 점이 있다. 둘째는 섬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추격전을 강조했다. 적이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서 섬멸하는 것이다. 이것은 손자의 "궁박한 적은 쫓지를 마라"는 사상이나 상앙의 "대전에서 승리한 후 추격하는 것은 10리를 넘어가면 안된다"는 내용을 좀 더 개선한 것이었다. 셋째는 야전축성공사를 중시하였다. 먼저 적군을 유인하여 진지를 벗어나게 한 다음 다시 섬멸할 지역에 축성을 하여 상대방을 가두어서 상대방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축성공사를 공격의 보조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전인미답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