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계진(丁啓陣)
"문천상"이라는 세 글자를 말하면, 대부분의 중국인들의 머리속에는 개략 이렇게 정의될 것이다: 남송말년에 원나라에 항거한 민족영웅. 조금만 고서적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지었다는 몇 가지 싯구도 기억할 것이다.
신심일편자침석(臣心一片磁針石)
부지남방불긍휴(不指南方不肯休)
신의 마음은 하나의 나침반과 같아서
남쪽을 가리키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다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유취단심조한청(留取丹心照汗靑)
사람이 살면서 죽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는가
일편단심을 남겨 역사에 비추게 하리라.
당연히, 중국의 중학교 교과서에도 그의 시가 실려 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정기가(正氣假)>>를 읽어봤거나 심지어 외우고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문천상은 민중들의 마음 속에 대체로 정기가 늠름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영웅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이런 이미지를 연장시켜 합리적으로 상상하자면, 바른 자세로 앉아서 우스개소리따위는 하지 않는 옛 사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서의 기재와 그 자신의 시문에서 나타난 바를 종합하면, 문천상은 당연히 권세가를 두려워히지 않고, 정기늠름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일찌기 영해군절도판관을 지낼 때, 동송신(董宋臣)이라는 환관이 원나라군대가 국경으로 밀려올 때, 황제에게 천도를 주청드렸다. 문천상은 바로 상소를 올려 이 환관을 죽여버려 민심을 안정시키라고 한 바 있다. 형부랑관을 맡고 있을 때는, 또 한번 상소를 올려 이 환관의 죄상을 줄줄이 열거한 바 있다. 간신 가사도(賈似道)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는 문천상이 조서를 초안하였는데, 그 글에서 가사도를 자주 풍자하곤 하였으며, 관례에 따라 가사도에게 글을 올리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사도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1275년 정월, 원나라군대가 남하하여 송나라의 조정이 위급하게 된다. 문천상은 지방의 호족과 남방의 소수민족을 모아서 만명의 원나라에 항거하는 의군을 조직하고, 황제를 보호하려 한다. 조정이 이 상황을 들은 후, 그에게 강서제형안무사의 관직을 내렸고, 그로 하여금 황제를 호위하게 하였다. 문천상의 친구들은 그를 말렸다. 오합지졸을 모아서 어떻게 원나라군대에 항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양을 몰고 맹호무리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얘기하였다. 문천상은 이때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도 상황이 그렇다는 것은 안다. 단지 국가가 신하와 백성을 삼백년간이나 길러와쓴데, 일단 위급한 때를 닥치면 천하의 병마가 모여야 하는데, 한 사람 한마리의 말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내가 가장 가슴아픈 것이 이 점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역량은 안되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천하의 충신의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일어나서, 모두가 정의를 위하여 싸우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많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직이 보전될 수 있다" 조정에서 우승상에 임명된 후, 문천상은 갖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원나라군대에 항거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록 된 후에 단식등 각종 투쟁을 벌였고, 원나라로부터의 핍박과 유혹을 모두 견뎌냈다. 5년여의 감옥생활을 지낸 후에 마침내 원나라 사람들에게 피살된다.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는 글을 써서 옷과 띠에 묶어두었다. 그 글에서 "공자께서는 인(仁)을 완성하라고 하셨고, 맹자께서는 의(義)를 취하라고 하셨다. 의를 다함으로써만 인을 이룰 수 있다. 성현의 책을 읽었는데, 배운 것이 무엇인가. 오늘 이후, 부끄러움이 없겠다. 송나라 승상 문천상 절필"
그러나, 문천상도 피가 흐르고 살이 있는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자들과 싸우고, 침략자들과 싸우고, 절개를 드높이려는 전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도 감성에 따른 욕구와 행위를 하는 사람이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문천상은 일찌기 플레이보이유형의 사람이었다. <<송사>> 본전의 기록에 따르면, 문천상은 인물이 잘 생겼을 뿐아니라(체격이 컸고, 아름답기가 옥과 같았으며, 빼어난 눈썹과 긴 눈을 지니고 있었다), 문재도 뛰어났다. 집영전에서 황제의 앞에서 대책을 논할 때 문천상은 "말을 만마디를 하면서도 원고가 필요없었고, 한번에 줄줄이 얘기했다" 그리하여 시험관인 왕응린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아서 황제에 의하여 장원으로 뽑혔었다. 재주와 용모를 모두 갖춘 문천상은 생활에서도 흐리멍텅하지 않았다. "문천상은 성격이 호화롭고 평생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성기만전(聲伎滿前)했다" 여기서 성기만전은 무슨 뜻인가? 바로 집안에 연극하는 사람, 노래부르고 춤추는 사람을 두고 처첩을 많이 거느리고 화천주지(花天酒地)하는 생활을 보냈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듣기 좋은 말만 쓰는 정사에 이렇게 적었으니, 그의 실제생활은 아마도 매우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일부 야사잡서에도 문천상의 생활이 호화스럽고 방탕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청나라때 전조망의 <<힐기정집>>에서는 문천상이 젊었을 때 방탕하여, 여색에 빠졌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때 심가철, 오탁등의 <<남송잡사시주>>, 명나라때 주국정의 <<용동소품>>등의 문헌기록을 보더라도 문천상은 장기를 아주 좋아했다고 나온다. 그는 한편으로는 계곡에서 목욕하면서, 한편으로 다른 사람과 장기를 두는 것을 좋아했다. 수면을 장기판으로 치고 장기싸움을 벌이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재미를 느껴서 하늘이 어두워져도 느끼질 못했다고 한다.
친구들과의 생활에 있어서도 문천상은 우스개를 즐기면서 살았다. 원나라군대가 남하하여 임안이 위기에 처하자, 문천상은 그의 막료에게 물었다. "형세가 위급한데, 어떡하지?" 그러자 막료중의 어떤 사람이 "일단혈(一團血)"이라고 얘기했다. 문천상이 "왜?"냐고 묻자 그 사람은 "당신이 죽으면 우리도 모두 따라죽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문천상은 웃으면서, "옛날 유옥천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유옥천은 한 기녀와 좋아했고, 정도 깊었다. 두 사람은 바다와 산에 백년해로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기녀는 다시는 다른 손님을 받지 않았다. 한 마음으로 유옥천에게 잘해주었다. 유옥천이 진사에 합격하고, 관직을 얻자, 기녀는 그를 따라 부임지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옥천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속였다 '조정의 규정에 따르면 가족을 데려갈 수 없다. 차라리 너와 함께 죽어버리지, 나 혼자서는 떠나지 않겠다' 그래서 독주를 준비했고, 기녀에게 먼저 마시게 하였다. 기녀는 남은 절반을 유옥천에게 건냈다. 유옥천은 그러나 마시지 않았다. 기녀가 죽자, 유옥천은 혼자서 부임지로 떠났다. 오늘 너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혹시 유옥천을 본받겠다는 뜻인가?" 이런 위급한 시기에도 이렇게 농담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면, 문천상은 장난꾸러기같았음에 틀림없다.
역사의 경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진정한 거인일수록, 평소에는 정이 넘치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 진실로 자연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평소에 아주 늠름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하면서, 입만 열면 인의도덕과 도리를 얘기하는 사람이 왕왕 중요한 순간에 바지에 오줌이나 싸는 경우가 많다.
문천상에게서 존경할만하고 칭찬할만한 부분은 당연히 그가 풍류적이었던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늠름한 기개에 있다. 나라가 어려움에 닥쳐 위급한 시기에, 그는 집안 재물을 바꿔서 군비를 마련했다. 자기의 모든 생활상의 즐거움을 포기하였고, 집안을 망치고 자신도 죽는 길을 택했다. 그렇지만 아무런 원망이나 후회도 없었고, 영웅스럽게 의를 위하여 죽어갔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태조계와 송태종계: 송나라 황위계승 (0) | 2008.06.24 |
---|---|
북송(北宋)의 비참한 최후 (0) | 2008.01.02 |
송원(宋元) 교체기의 초원민족 (0) | 2007.04.16 |
북송(北宋)때의 철거이주보상에 관하여 (0) | 2007.03.23 |
송나라의 가짜공주사건 (0) | 2007.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