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원(宋元) 교체기의 초원민족

by 중은우시 2007. 4. 16.

글 : 소삼(蘇三)

 

송나라가 자그마한 소고기 완자(丸子)라면, 당시 북방의 여러 초원민족은 하나의 큰 고기만두(肉包子)였다,  속은 양고기로 되어 있는. 서쪽의 토번(吐番)은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이, 아주 안정적으로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곳의 기후는 아주 특색이 있어, 아무나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대"시기에 중원은 크게 어지러웠고, 토번인들은 기회를 잡아, 일찌기 감숙의 하서주랑을 차지하고, 서로는 알타이산 동으로는 대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금방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고 몸을 웅크렸다. 동아시아대륙은 오랫동안 세개의 지역이 분리되었다가 합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장강이남지구, 장국이북의 중원지구, 황하이북의 초원지구.

 

야율(耶律)가족이 건립한 거란족의 요(遼, 916-1121)는 북송시기에 주요한 북방의 적수였고, 나중에 금나라에 멸망당한다.

 

금(金, 1115-1224)은 여진족인 완안 아구타가 건립한 정권이다. 이들은 남송의 주요한 적수였다.

 

서하(西夏, 1032-1227)는 서강(西羌)족에서 나온 당항족(黨項族)이 건립한 나라였다. 서북지역에 건립하여 은천(銀川)에 도읍을 정했다. 이상한 것은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 왕조의 황제는 두 개의 성씨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李)와 조(趙). 예를 들어, 건국자의 이름은 이원호(李元昊)라고 적기도 하고, 조원호(趙元昊)라고 적기도 한다. 고대의 정사에는 성씨를 이씨로 적고 있다. 그러나, 중국격역사연대간표와 같은 당대의 일부책에서는 조씨로 적고 있다. 이씨의 당나라, 조씨의 송나라를 생각하면,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명나라말기의 농민반란을 이끈 이자성도 당항족이다. 서하의 왕족후예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시기에 서역일대에는 회흘(回紇)이 있었는데, 이들은 돌궐족의 일부이다.

 

여기에 하나를 보충하자면, 중국의 서남지역 운남지구는 시종 분열된 상태였다. 당나라때는 운남왕이 당에 반발하여 독립했고, "남조(南詔)"는 면적이 지금의 운남성보다 조금 더 컸고, 수도를 대리에 두었다. "오대십국"의 기간동안에는 "대리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253년까지 존속했다. 나중에 몽고의 원에 의해 점령되었다. 몽고족은 송나라와 합쳐서 "금"을 무너뜨리고, 순망치한으로 금을 무너뜨린 후에는 남송도 멸망하고 서하도 멸망했으며, 원나라가 독패하게 된다.

 

원나라는 중국역사상 판도가 가장 컸던 국가이다. 실제로 우리는 자주 "당나라"와 "원나라"를 비교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오랑캐가 건립한 정권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점은 몽고인은 당인에 비하여 더욱 순수한 오랑캐였다. 그들은 말을 타고 천리를 달렸으며 그래서 더욱 큰 제국을 건설했다. 당인은 호한결합(胡漢結合)의 정권이었고, 상대적으로 중원에 안주했다. 끝까지 동아시아의 벽을 넘지 않았다. 두 왕조의 사이에는 혈연비율의 차이는 군사문화상의 차이를 반영해준다. 나중에 청나라 사람들도 멀리 나가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들이 처음부터 동북지역에 할거하는데 만족하고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몽고인들은 광활한 막북초원에서 자랐고, 그들의 시야와 기원은 아마도 제국의 서로 다른 선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원나라를 대하는 중국인들의 심리는 복잡하다. 중원인들은 자주 "국가"와 "역사"에 대하여 곤혹감을 느낀다. 원나라도 중국인가? 아니면 몽고국인가? 만일 우리가 전통의 역사관으로 구분한다면, 원나라를 사랑해야 하는가, 미워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하나의 민감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국가"가 어디에 있는가? "국가"는 고정된 것인가? "국가"는 토지인가 아니면 백성인가? 한나라, 당나라는 나라이다. 그렇다면 송나라도 나라인가? "오대"는 나라인가? 자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 이것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이슈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이 문제는 더 많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아주 괜찮고 이성적인 해결책이라면, '현상'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재의 '국가'와 연결시켜 사랑할지 미워할지를 정하는 것이고, 역사의 묵은 빚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나라의 "국가"가 컸다는 것도 우리와는 관계가 없고, 원나라의 죄행도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더욱 가까운 시기의 전쟁이나 왕조간의 분쟁도 마찬가지의 논리로 처리하면 된다.

 

민족구성상, 나는 진인각의 주장에 동의한다. 민족은 혈연과 무관하고 문화와 관계된다고. 당연히 우리는 혈연이 민족에서 일정한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왕의 천년간의 발전사는 아주 명확하다. 소위 "한인(漢人)"은 장강이북에서 이미 하나둘 오랑캐화되었다. "한인"은 혼합된 민족집단이다. 혈연적으로 "한인"은 순수한 내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문화적으로 "한인"은 서로 다른 민족의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한문화"는 "한인의 문화"만은 아니다. 중원문화 더욱 정확하게는 아마도 "중화문명"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송나라때, 장강이북은 또 한번 오랑캐화가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거란족과 여진족이 남하하여, 중원지구를 점령하였다. 원래 이미 "오호난화(五胡亂華)"로 겪은 북방한인은 점차 강남으로 물러났고, 동남일대로 들어왔다. 그러나, 북방에 남은 한인은 다시 이때의 거란족과 여진족에 동화되었다. (오늘날 표면적인 생리현상으로 보면, 중국북방에는 단꺼풀이 많고, 남방에는 쌍꺼풀이 많다. 아주 거칠게 단정하자면, 이것은 아마도 거란등 민족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송나라때, 대량(개봉)은 이미 거란족의 "남경"이 되었다. 오늘날의 북경은 오랑캐족의 "중도"였다. 산서일대는 더욱 일찌기 흉노와 돌궐이 오랫동안 자리잡으면서 철저하게 오랑캐화되었다. 거란족들은 마찬가지로 산서의 "한인"을 동화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장강이북은 오랭캐족에 완전히 점령되었고, 오랑캐족은 적극적으로 중원문화를 받아들여 한화되었다. 예를 들어, 요나라, 금나라는 모두 "중국"의 제도에 따라 자기의 국가정권을 수립했고, 심지어 중국의 과거제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관료기구에서도 많은 한족들이 근무했다. 어떤 경우는 재상도 한족이었다. 한기선(韓企先)은 그들중에 유명한 재상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요, 금의 오랑캐는 한어를 잘 알았고, 아주 높은 유학의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료(西遼, 키타 치타이)를 세운 야율대석은 진사출신이다. 이는 일종의 문명전파이다. 남으로부터 북으로의 전파이다. 이는 또한 동화이다. 고급문명이 몽매한 지구로 전파되어 동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문명의 전파규율에 부합한다. 동시에 이 기간의 정복과 피정복에 대하여도 설명이 가능하다.

 

문명정도가 높고 낮은 것은 주권의 강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원문명은 상대적으로 선진적이지만 중원의 송나라는 요. 금에 당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는 "원"에 의하며 멸망한다. 심지어 중원의 "문명인"들은 원나라에 의하여 "하등민"으로 결정된다. 이 점에 기하여, 장래의 중국이 세계에서 패자가 될 수 있을 지는 얘기하기 어렵다. 야만적인 오랑캐는 "문명"의 중원을 점령했는데, 서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거친 경향이 있는 중국이 세계를 호령하지 못할 이유가 뭐이겠는가? 아마도 이러한 야만적인 것으로 인하여 중국은 아마도 더욱 빨리 세계의 패권국이 될 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다보니, 서방인들의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할 것같기도 하다. 그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야만은 아마도 역량의 원천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보면, 한인이 통치해서는 동아시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원나라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민족차별의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4등급으로 구분했다. "한인"은 하등인이다. 그러나, "북방한인"은 3등인이고, 장강이남의 "남방한인"은 가장 낮은 4등인으로 분류되었다. 이것은 음미할만한 일이다. 아마도 이것은 원나라 사람들이 "북방한인"을 높게 본 것이라고 할 것인데, 북방중국인에게는 오랑캐혈통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고, 몽고족 자체가 오랑캐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의 1등인은 몽고인이고, 2등인은 "색목인(色目人)"이다. 이 점에 대하여 과거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오늘 날에는 "동원설(同源說, 동일한 기원을 가졌다는 설)"의 배경하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일반인들은, 몽고족과 한족은 인류학상의 "몽고인종"에 모두 속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구분은 있다. 최초에, 몽고인의 혈통에는 구라파혈통이 상당히 강했다. "색목인"이 우대받은 이유는 바로 그들이 몽고인과 유사한 혈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 혹은 푸른색의 눈은 일찌기 최초 몽고인의 하나의 특색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징기스칸 본인은 "푸른 눈"을 가졌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고증을 통하여 징기스칸이 붉은(노란)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오늘 날에도 동몽고와 서몽고인은 인종상 명백히 구분된다. 동쪽은 키가 작고, 서쪽은 키가 크다. 이는 서쪽은 유럽에 접해 있어 대량의 서방 구라파인종의 혈통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의 징기스칸에게는 아마도 자기의 민족의 기원이 어디인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서방을 휘저은 것은 "침략"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는 낭만적인 귀향의 여행이었을 것이다.

 

몽고인에게 실제로 지배된 강역은 북으로는 북극에 이르고, 서로는 모스크바, 키에프(최소한)에 이르며, 기본적으로 러시아의 전 국토를 포함한다. 이 시기에 중국과 러시아가 한 집안이었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에서 자고이래로 이처럼 큰 제국은 없었다. 그러나, 원나라는 해낸 것이다. 만일 넓은 영토를 점령한 것이 영광이라면, 그렇다면 "중국인"은 이를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지 ,치욕으로 생각해야할지 정말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정한 정도에서는 세계통일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나라때부터 중국한족의 민족의식이 점차 각성되기 시작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원나라에서 고나리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예를 들면, 원나라때의 유명한 서예가 조맹불(1254-1322)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아직은 불완전한 민족의식이었다. 왜냐하면 조맹불은 자신이 송나라의 종실이었으므로 조상을 배반하는 것이 효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당시에 다른 사람들의 항거도 반드시 민족감정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것은 옛주인에 대한 충성때문이었다. 충효의 두가지 덕목은 중국사회의 기둥이었다.

 

원나라가 신속하게 팽창한 것은 야만적인 기병의 군사적인 특색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동서방간의 횡적교류를 아주 활발하게 해주었다. 양측은 완전히 실력 대 실력으로 맞붙었다. 별다른 제한 없이 자유롭게 왔다갔다 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1, 2대를 겨우 거치면서 막북초원에서 구대륙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유럽, 서아시아, 심지어 이집트와도 격전을 벌이고, 이라크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의 운동방향을 되집어 보면 목적은 점령이 아니라, 통상이었다. 이는 바로 "서래설(西來說)"의 거꾸로인 것이다. 만일 "서래설"이 빠르게 전파되었다면 그것은 유목민족간의 일이었다.

 

송, 금과 항전하던 요나라는 멸망한 후, 남송보다 강역이 더 컸던 "서요"를 중국의 서북지방에 건설한다. 이런 빠른 속도의 "이동"은 유목민족의 장기이다. 초원민족은 자신의 문화와 정치특색이 있다. 느려빠진 농업민족은 이런 재빠른 몸놀림을 보여줄 수 없다. 그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돼지처럼 느리다. 왜냐하면 그들의 집안에는 확실히 진귀한 돼지씨가 있으므로 돼지의 속도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몽고인은 중원한족과 마찬가지로, 혈통이 순수한 민족은 아니다. 모두 여러 민족이 융합한 결과이며, 심지어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다는 형국이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신강에 가서 위구르족등 소수민족을 보면, 그들 중간에 많은 사람들은 한족과 완전히 같은 모양이다. 이는 아마도 역사상 융합된 결과일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돌궐인들이 남하하면서 중원인과 융합도었고, 많은 중원인들이 북상하면서 돌궐과 융합하였기 때문이다. 현재의 민족구분은 실제로 문화를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다. 어느 문화체계에 속해있느냐를 기준으로 민족을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또 달리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바로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 날 어떤 민족으로 묘사된다든지, 내가 특별히 이 민족을 좋아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다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왜냐하면, 혈통상으로 가까우면 더욱 인연이 있다고 느끼겠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사한 문제를 대하면서 왜 더 시원스럽지 못하고, 객관적이지 못하고, 이성적이지 못한가?

 

네가 네 몸 속에 흐르는 피와 액체가 어느 강에서 나오고 어느 우물에서 나왔는지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너는 한 민족의 기원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날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다. 역사기록전에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