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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노신)

노신(魯迅) 형제간의 불화경위

by 중은우시 2007. 3. 11.

1923년 7월 19일오전, 노신은 그가 살던 북경 팔도만후통의 사합원으로 되돌아왔다. 주작인(周作人, 노신의 남동생)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노신선생친계"라고 쓴 편지를 형의 손에 내밀었다.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노신선생, 나는 어제야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지나간 일은 다시 얘기할 필요가 없다.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 견딜 수는 있고, 비난할 생각도 없다...모두 불쌍한 사람이다. 나의 이전의 장미꿈은 원래 모두 허구였다. 현재 보는 것이 아마도 진정한 인생일 것이다. 나는 나의 사상을 고치려고 하고, 새로운 생활을 하려고 한다. 앞으로는 뒷쪽의 집으로 오지 말기 바란다. 다른 말은 없다. 안심하고 자중하기 바란다.

 

7월 18일, 작인"

 

노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 정이 깊었던 형제간에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보다 나이가 4살이 어린 둘째동생 주작인은 자기와 어려서부터 함께 놀면서 자랐고, 먼저 소년시대에 가정이 흥성하다가 쇠망하는 것을 같이 겪었고, 나중에 두 사람은 공부를 위해 남경으로 갔다. 노신이 일본에 유학한 후, 그를 도와 학업을 마치, 처를 취하고 아이를 낳도록 도와주고 그가 세상에 나오도록 해주었으며 함께 신문화운동의 기수가 되어 세상사람들의 존경과 찬탄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형제간에 이미 '의절'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통심질수(痛心疾首)하지 않을 수 없다. 저녁이 되어, 노신은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작인을 불러서 자세히 얘기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밤중이 돌아와서, 그는 몇 자의 일기를 적었다.

 

"오전에 계맹(啓孟, 주작인의 자)이 서신을 들고 왔다. 나중에 불러서 물어보려고 했으나,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노신은 일찌감치 일어나 사방으로 집을 돌아보고, 팔도만후통에서 이사나갈 준비를 했다. 친구의 도움하에 노신은 800위안대양을 빌려서, 전탑후통에 간단한 사합원을 구했고, 8월 2일, 노모 노서와 소흥의 조강지처 주안과 함께 이사나갔다.

 

주작인은 이를 보고, 일기에 간략하게 적었다. "오후, 부부가 전탑후통으로 이주하다"

 

생각도 못하게 개략 10개월후, 형제 둘은 그 유명한 "욕하고 구타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1924년 6월 11일, 노신은 팔도만후통의 옛집으로 돌아온다. 자기의 서적과 일부 물건을 가져가려고 한다. 주작인과 그의 일본인처 우태신자(羽太信子)는 후원에서 나와서 노신을 향하여 욕을 해댔다.

 

여러 사람이 권해서, 형제 둘은 비로소 싸움을 멈추었다. 노신은 급히 서적과 일부가재도구를 들고 나왔고, 이로써 그가 운영해왔던 팔도만의 집과는 고별하게 된다. 이 집은 노신이 자신의 북경에서의 임직하고 원고를 쓴 소득을 전부 쏟아넣은 것이었고, 여기에 소흥의 옛집까지 팔아서 왕씨성의 사람으로부터 사들인 것이었다.

 

이 집은 전형적인 북경사합원이고, 안팍으로 3진이며 매우 넓었다. 노신은 집을 찾다가 팔도만의 집을 사고, 장인을 불러 집과 하수도를 수리하고, 가구를 구매하고, 실내를 장식하는데 9개월이 족히 걸렸었다. 주작인은 이전부터 소요자재를 즐기는 사람이었고, 그는 처와 자식을 데리고 일본으로 친척을 방문하러 갔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 그는 일본에서 다시 돌아왔다.

 

주작인의 상황을 고려하여, 노신은 둘째동생에게 후원에 거주하게 하였다. 그곳의 북쪽방은 방향이 매우 좋고, 집도 넓었으며 아이들이 놀 공간도 있었다. 동시에, 동생처인 우태신자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특별히 후면의 몇칸의 방을 일본식으로 개조해주었다. 전원(前院)은 세째동생 주건인(周建人) 일가에게 주었다. 노신 자신은 중간둘째줄의 북향집 전조방(前房)에 머물렀다. 이 곳은 빛이 어둡고 습기찬 곳이었다.

 

세 형제가 이사들어온 후에 마침내 한 집에서 모여살게 되었다. 이후, 삼형제는 몇 명의 친구와 증인을 불러서 계약을 체결한다. 팔도만의 집은 4개로 나누어, 삼형제가 각각 1/4씩 갖고 노모인 노서가 1/4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모친의 양로비용으로 쓸 것이었다. 집주인은 분명하게 주수인(周樹人, 노신의 본명)이라고 적었다. 삼형제는 동시에 피차간의 경제협력은 영원히 분리하지 않겠다고 적었다. 그러나, 짧은 4년만에 한 가정은 형제간의 불화를 거쳐 결국 갈라서게 된다.

 

자고이래로 청백리도 집안일은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한가지 인정할 점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주작인의 일본처인 우태신자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씨형제와 비교하여 우태신자의 출신은 아주 천(賤)하고 낮은 편이었다. 그녀는 원래, 노신, 주작인형제가 일본유학을 할 때, 그들의 옷을 기워주고, 빨래를 하던 하녀였다. 나중에 그녀는 주작인과 오래 같이 있으면서 결국 주작인에게 시집와서 처가 되었다.

 

비록 출신은 미천했지만, 어려서부터 힘들게 일하였다. 우태신자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됨이 이기적이고, 각박하고, 성격이 낭비가 심하고, 옳고그른 것을 따지기를 좋아했으며, 히스테리증을 앓고 있었으며, 정서가 아주 불안정했다.

 

노신의 삼형제가 이사간후, 가정대권은 바로 이 일본부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노신의 당시 월수입은 400대양가량이었는데, 그는 담뱃돈과 일상용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급여를 우태신자에게 주어 관리하게 하였다.

 

생활에서, 우태신자는 통이크고, 일을 벌이기 좋아했으며, 돈을 물쓰듯 썼다. 용도에서 계획이나 절제는 몰랐다. 집안에는 6,7명의 일꾼을 썼는데, 매번 식사때마다 조금만 입맛에 맞지 않으면 모두 물리고 새로 하게 하였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 전용 황포차부를 고용했다. 집안 사람중에 감기라도 앓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비용이 싸지 않은 일본의사를 불렀다.

 

당시 노신형제의 수입상황으로 보면, 600대양은 현재의 인민폐로 환산하면 약3만위안이 된다. 어떻게 보더라도 화이트칼라계층에서는 충분히 지낼만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일가의 생활은 아주 안정되었다. 그러나, 우태신자는 돈을 마음대로 쓰는 외에, 집안을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했다. 주작인은 이런 속된 일에 대하여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그의 "고우재(苦雨齋)"에 들어가 머리를 박고 공부만 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의 모친인 노서노인은 아주 상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렇게 좋은 형제들이 갑자기 불화하게 되고, 한 집에서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하여, 나는 아주 의외로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그저 기억나는 것은 큰아들이 둘째의처가 집안일을 하는데 이견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씀씀이가 컸고, 돈쓰는데 계획이 없었으며, 종종 집안에 나가는 것이 들어오는 것보다 많아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야 해서 아주 좋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노신은 나중에 허광평(노신의 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자기를 따지지 않았었다. 가정이 화목하면 그만인 것이다. 팔도만에 있을 때, 나의 급여는 모두 둘째처에게 주었다. 주작인까지 합치면 매월 적어도 600대양이었다. 그러나, 크고작은 병에 모두 일본의사를 부르고, 생활하는데 절약을 몰랐다. 그래서 항상 돈이 부족했고, 사방에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어떤 때에는 돈을 막 빌려서 집에 도착하면, 의사의 자동차가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마차를 타고 날라봐야, 어찌 자동차로 운송하는 것을 당할 수 있겠는가" 노신과 주작인의 공동친구인 허수상(許壽裳)도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들 형제의 불화는 주작인의 그 일본부인때문이었다. 듣기로 그녀는 이 큰시아주버니를 싫어해서 같이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작인도 그렇게 말한 바 있다. 형제간의 불화원인은 그의 부인이 노신과 함께 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왜 그랬는지에 대하여는 평생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현대문학사상 남겨진 유명한 수수께끼이다.

 

우태신자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노신이 일찌기 그들의 침실아래에서 몰래 엿들었었다"

 

노신의 문인성격으로 볼 때, 그가 이런 짓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주작인부부의 침실의 창앞에는 각종 꽃들을 심어놓았는데, 외부인이 근접할 수가 없었었다. 또 다른 주장은 노신이 동생처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욕하는 것을 훔쳐본 것으로 인하여 형제간의 반목이 나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하여 아주 유력한 반론을 내놓았다. 노신의 명예와 관련이 되므로 누구도 이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는 못한다. 우태신자가 주작인의 침대머리에서 이런저런 말을 했을 수는 있다. 그녀의 불건전한 인격이나 정신심리상의 장애를 볼 때 완전히 날조해서 말했을 수도 있다. 노신이 골치아파 했던 것은 그가 주작인 부부에게 왜그런지 물어보고 이유를 알아보고자 했으나, 두 사람은 계속 그와 말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는 입이 백개라도 변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형제의 반목이 집안일때문인지, 아니면 목욕을 훔쳐본 때문인지는 외부에서도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대문학사상의 하나의 수수께끼로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노신은 둘째동생 주작인과 결렬된 후, 갈수록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던 것같다. 그는 시종 고통스런 기억을 묵묵히 자기의 마음속에 담아두고, 세상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발도만집에서 이사나온 후 큰 병을 한번 앓았다. 이 병은 앞뒤로 1달반을 갔다. 다행히 이 기간동안 그는 단편소설집 <<눌함(喊)>>을 완성했고, 또 다른 거작 <<축복(祝福)>>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