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중국인의 4차에 걸친 일본이민

by 중은우시 2007. 12. 25.

작자: 미상

 

선진(先秦, 진나라이전)시대부터 대륙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이민은 끊이지 않았다. 최초의 문자로 기재된 일본의 역사서적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외래이민을 "한인(漢人)", "신한인(新漢人)", "오인(吳人)", "당인(唐人)", "귀화인(歸化人)"등으로 불렀다. 대륙에서 일본으로 이민을 간 시기는 대략 4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진한시기로서 개시기, 위진남북조시기로 고조기, 수당시대로 지속기, 송명시대로 종결기가 그것이다. 그중에는 일본조정이 선진문화를 흡수하고, 기술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여러차례 사신을 중국대륙과 조선에 보내어 한인등을 일본에 건너오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대륙에서 일본으로 이민을 많이 건너가게 된다.

 

제1차 이민기: 진한시대(기원전3세기 - 3세기)

 

이 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진시황때 일어난 서복(徐福)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전설이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시황제28년에 "제나라 사람 서복등이 상소를 올려, 바다에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 방장, 영주라 하고 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재계하고 동남동녀를 데리고 그곳에 가서 불사약을 구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서복에게 동남동녀 수천명을 데리고 바다로 가서 신선에게 불사약을 구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서복이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어디로 갔는게? <<사기. 회남형산열전>>에 의하면 서복이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평원광택(平原廣澤)"의 땅이었다고 한다. 이 "평원광택"은 오늘날 일본의 규슈지방이라고 한다. 일본학술계에서는 서복의 사적을 연구하는 학술단체, 학자와 전문가가 아주 많다. 그리고 서복의 사적을 연구한 글, 저작 전문서적이 있다. 모두 서복이 일본에 도착해서 일본의 개발을 도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서복이 아주 존경받고 있다.

 

서복의 전설이 어떠했든간에, 한가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진한시대에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대량 이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먼저, 진시황의 철기가 육국을 멸망시킬 때,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민중들은 난을 피해 도망갔다. 이 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서 일본으로 도망갔다. 북로는 연라나사람들이 동북에서 한반도를 거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고, 남로는 산동반도의 제나라사람들이 직접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것이다. 다음은 서한의 한무제때이다. 원봉3년(기원전108년),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반도의 북부에 낙랑등 4군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대량의 한족이 사군으로 이주했고, 그중 일부분은 반도를 계속 내려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 그 다음은 동한시기이다. 이때 중일간에는 정식으로 외교관계가 성립된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57년, 왜노국(倭奴國)이 사신을 보내왔고, 한나라의 광무제는 왜노국의 추장을 국왕으로 봉하고, "한왜노국왕(漢倭奴國王)"이라는 금으로된 도장을 하나 보낸다. 1784년, 왜노국내에서 "한왜노국왕"이라는 다섯 글자의 금인이 발견되어 이 기재가 사실임이 증명된다. 또 다른 일본역사서적에도 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부터 한나라황실의 인물(유씨)가 사신으로 가거나, 피난가는 등의 이유로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갔다고 되어 있다. 서문수씨(西文首氏, 王氏)도 일본으로 갔다.

 

제2차 이민기: 위진남북조시대 (3세기 -  6세기)

 

4세기말 5세기초 및 5세기말, 중원의 인민들은 난을 피해서 대규모로 일본의 각 섬으로 이주했다. 두차례에 걸쳐 일본역사서에서 "귀화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일본이민붐이 있었다. 주요한 이유는 서진말년 팔왕지난으로 인한 100년내전(소위 오호난화)이었다. 장기간 잔혹한 민족간의 보복으로 대륙한족 특히 중원의 명문집안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방으로 대규모 이주를 시작한다. 주로는 남으로 옮겨가서 강남으로 갔고, 그 다음으로는 북으로 도망쳐서 한반도로 건너갔다. 남북 양로의 난민은 모두 상당한 수가 마지막으로 일본까지 건너갔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등 일본초기의 사서에는 이 기간동안 대량의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귀화인들이 일본에 도착한데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일본의 문서에서 자주 나오는 귀화한 한족의 대표는 궁월군(弓月君, 秦氏), 동한직(東漢直, 劉氏), 서문수(西文首, 王氏)등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온 한족 "귀화인"들이다.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바로 이들이 스스로 진시황 혹은 한무제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궁월군 및 그가 이끌고 온 진인들은 스스로 진시황의 후예라고 했다. 아지사주(阿知使主) 및 그 아들 도가사주(都加使主)가 이끈 한인들은 스스로 한영제의 후손이라고 했다. 신협촌주청(身狹村主靑)은 스스로 오나라 손권의 후손이라고 했다. 조금 늦어서 사마달지(司馬達止)등의 인물은 스스로 남조 사마씨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응신기의 기록에 따르면, 개략 4세기초에 궁월군은 그의 부민 120현(혹은 127현)을 이끌고 일본에 귀화했다. 이는 나중에 진씨일족이라고 부르는 기원이다. 웅략기때(즉, 왜왕무시대, 개략 5세기후반), 진씨유족을 끌어모아 모두 92부 1만8천6백명을 모았으며 그 수령은 주공(酒公)이라고 하였다. 진씨일족은 장기간 양잠제사업, 농경수리와 토목공사등의 생산활동을 했고, 점차 재산을 모아서 실력있는 지방호족으로 성장했고, 왜왕의 신임을 받는 관리가 되었으며 지역그룹의 수령이 되어, 왜왕의 고위통치집단에 들어가게 된다. 왜왕에 의하여 직(直)이라는 성을 받아 중국고대의 중요한 거족중 하나가 된다.

 

유(劉)씨성은 양한의 황족인데, 이때 일본에 귀화한 사람들의 주력이었다. 역사적으로 일본을 개척한 가장 유명한 유씨는 오늘날 일본의 원전(原田), 고교(高橋), 대장(大藏)등 가족의 공동선조인 아지왕(阿知王)이다. 아지(阿知 혹은 阿智)왕은 아지사주(阿知使主)라고도 하는데, 동한의 최후황제인 한헌제의 현손(玄孫)이다. 일본 원전가족의 족보 <,대장조신원전가력전>>에 따르면 아지왕은 한헌제의 현손이다. 조씨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립하자, 한헌제 유협은 조비에 의하여 산양공으로 봉해지며, 산양군에 있는 탁록성(일명 청양성, 지금의 하남성 수무현 동북)에 거주한다. 아지왕은 이때 동한황실의 유민고 함께 낙양에서 탁록으로 온다. 나중에 사마씨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세우자, 유씨황족의 지위는 표면적으로는 변화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아주 악화되게 된다. 태강10년(289년), 유아지는 당시의 혼란한 상황을 보고, 5월초하룻날 옛신하들을 모아서 대책을 논의한다. 유아지는 "나는 오래 이 곳ㅇ 살았으나, 복멸지화가 우려된다. 동쪽에 일본이 있고, 성군인 천자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가족을 모아서 동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난을 피하고자 한다. 일하여 유아지는 그의 아들인 유도하(劉都賀), 외숙부인 조여덕(趙輿德)과 친족인 유국정(劉國鼎), 유도자(劉濤子), 유학명(劉鶴明), 유신자(劉信子) 등 합계 2040명을 데리고, 중국본토를 떠나 바다를 건너 고생끝에 일본응신천황29년 9월 5일에 일본에 도착한다. 아지왕은 일본에 도착한 후, 일본천황으로부터 동한사주라는 칭호를 하사받고 대화국 고시군 회전촌에 정착한다.기재에 따르면, 당시 아지왕을 따라 일본으로 온 사람에는 단(段), 곽(郭), 이(李), 다(多), 조(), 주(朱), 고(高)등 7성이 있었다고 한다. 아지가 일본에 온 후, 다시 일본천황에 청하여, 고려, 백제, 신라등의 국가에 흩어져 있던 동향의 친족들을 일본으로 불러오도록 하였다. 사람은 많고 땅은 좁아서, 일본천황정부는 그들을 각지로 나누어 보냈다. 일본 대화 <<신찬성씨록>>의 기록에 의하면 아지사주의 아들인 유도하는 나중에 일본웅략천황에게 직(直)성을 받고, 자손들은 모두 직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세 아들은 산목직(山木直), 지노직(志努直, 일명 成努直), 이파기직(爾波伎直)이다. 그중 산목직은 일본의 다른 25개 성씨의 공동조상이다. 이파기직도 8개 일본성씨의 공동조상이다. 지노직의 후에는 10개의 일본성씨로 번성했다. 아지사주의 일족은 수공업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고, 일부 사람은 왜왕정권에서 중하급관리를 지낸다. 이리하여 관료호족집안으로 성장한다. 일본고대의 무시할 수 없는 한 일파를 이루고, 동한직씨가 된다.

 

서문수씨는 또다른 귀화한 한족집단이다. 그중 일부 사람들은 일본군도에 온 시간이 아마도 진씨나 동한직씨보다 약간 빠를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응신기의 기재에 의하면, 백제왕은 아지길사(혹은 阿直岐)에게 명하여, 왜왕에게 암말과 화마 각 1필과 칼, 거울등의 예물을 보냈다. 아직기가 중국의 경전을 잘 알았으므로, 왜왕은 태자의 교육을 맡겼다. 하루는 왜왕이 그에게 물었다. 그보다 더 중국경전을 잘 아는 자가 있는지를. 그러자 아직기는 왕인(王仁)이 중국전적을 더 잘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왜왕은 사자를 백제로 보내어 왕인을 모셔온다. 왕인은 부름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논어>.10권, <<천자문>>1권을 가져간다. 이것은 왕인에 관한 전설이다. 왕인은 중일양국의 문화교류에 큰 공헌을 한다. 나중에 전설에 따라 점차 서문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왕인은 낙랑군의 왕씨일족과 약간의 연원이 있다. 낙랑군의 왕씨일족은 원래 산동반도의 거족이었는데, 전란을 피하여 낙랑군에 와 있었고, 그곳에서 군수를 지냈다. 그의 후예중에는 지식인이 많았고, 역대 낙랑군의 여러 관직을 지냈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한 후, 그중 일부분은 백제로 이주해서 거주했다. 왕씨의 후예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가 거주했던 곳이 강물이 흐르는 곳이라, 선박운송, 물자의 보관, 관리, 운송등과 관련이 되었다. 장기간의 발전을 거쳐, 이 일족은 씨성을 가진 지방호족이 된다. 동한직의 귀화한인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고 대화의 서부에 살았기 때문에 이들은 서문수씨로 불린다.

 

이렇게 진씨, 동한직시, 서문수씨등 귀화한인들은 대량의 경제활동을 통하여 점차 지방의 대족으로 성장했고, 왜왕정부에 들어갔으며, 일본통치계급의 구성부분이 된다.

 

이때 일본군도에 건너간 한족은 상술한 세 족속만 있는 것은 아니다. 9세기초 일본천황정부가 편찬한 <<신찬성씨록>>의 기록에 의하면, 천황정부에서 일정한 정치적인 지위를 가진 성씨중에 경성, 산성, 대화, 섭진, 하내, 화천등지역에서 수집한 귀화인계통의 성씨가 324개인데그중 일부분이 한족), 일본의 모든 성씨으 약30%를 차지한다. 30%의 귀화인이 모두 한족은 아니다. 다만 한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진의 "오호난화"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민은 모두 한가지 재주를 가지고 있어, 일본조정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 대화국가의 통치기구의 완비, 경제의 발전, 국력의 증강은 이들 이민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3차 이민기: 수당시대(6세기말-10세기초)

 

이때 수나라는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고, 3세기에 걸친 남북분열상태를 마감한다. 중국봉건사회는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특히 대당왕조의 전기(정관지치에서 개원지치) 국가는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누린다. 백성의 생활은 부유하였다. 이와 비교하면 일본은 노예사회에서 봉건사회로 전환하는 진통기였다. 국세가 날로 쇠하고, 내부갈등이 겹쳐 내부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대륙에서 일본으로 이민가는 경우가 점차 줄었다. 비록 일부 지식인, 수공업자와 학문승들은 일본사신의 권유하에 일본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인원수에 있어서 양진시기와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이와 반대로 강성한 대당은 강렬한 흡인력을 가지고 일본인들을 끌어들였다. 대규모로 사절이 파견오고(견당사), 당나라에 와서 배우고 갔다. 이백의 시에 나오는 조형(晁衡)은 바로 가장 유명한 일본에서온 견당유학생이었다(일본이름은 阿倍仲麻呂). 견당사들이 일본에 돌아가면, 당나라에서 때때로 사신을 함께 보내곤 했다. 항행이 위험하였으므로 그들은 일본에 남아서 귀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유악, 원진경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모두 일본조정에서 일했다. 당나라의 승려들도 견당사를 따라 일본으로 가기도 하였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감진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량의 인원교류에 따라, 당나라와 일본간의 국제결혼도 늘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견당대사인 등원청하(藤原淸河)는 중국신부를 맞이하였다. 이로볼 때 국제결혼은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찌기 1천여년전에 당나라에서도 이미 보편화되었던 일이다. 안사의 난이후에 당나라는 쇠약하고, 번진이 할거하여 혼란이 일어난다. 백성들이 살기힘들어지자, 이때부터 당나라말기까디 계속하여 적지 않은 백성들이 배를 타고 동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규모는 양진시대와 비교되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전설에 의하면 양귀비가 마외파에서 죽지 않고 사신을 따라 일본으로 갔다는 것도 있다. 어떤 일본인들은 지금도 자신이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제4차 이민기: 송명시대(13세기말 - 17세기말)

 

견당사는 895년에 폐지된다. 원나라때까지도 계속된다. 중일양국간의 관계는 이때 냉담했다. 관방교류는 기본적으로 중단된다. 대규모의 조직적인 대륙귀화이민도 없었다. 조사가능한 것으로는 홍무25년(1392년)에 주원장이 "민인36성"을 유구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이번 중국이민은 주로 유구에 중국의 선진기술과 문화를 전수해주는 것이었다. 유구왕국은 적극적으로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다. 예를 들면, 1606년, 상녕왕이 책봉을 받을 때, 명나라사람을 귀화시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중국에서 건너간 채씨(蔡氏)는 채양(蔡襄)의 후손이다. 임씨(林氏)는 임화정(林和靖)의 후손이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후, 그리고 청나라가 입관후 잔혹한 민족말살을 진행하게 되자 다시 남송과 명나라의 유민들이(주로 강남의 한족) 일본으로 이주했다(저명한 남송 온주 안산 능인사 주지인 고승 조원, 명나라 종실의 유민인 주순수등). 그러나 숫자에 있어서는 이미 매우 적어서 언급할 가치도 없을 정도이다. 하나의 주요한 원인은 당송이래로, 중국의 조선기술의 진보와 나침반의 사용은 중국인의 항해기술을 크게 향상키켰고, 대량의 가난한 농민과 전쟁난민이 자연조건이 더욱 좋은 동남아로 이민가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많고 땅은 좁은 일본은 더 이상 대륙인민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없었다. 더 이상 중국해외이민의 첫번째 선택지가 아니게 된 것이다. 17세기말, 청나라통치가 안정되자, 민족압박정책도 어느 정도 완화된다. 경제도 회복되고 발전한다. 이로써 봉건사회 최후의 지속기간이 가장 긴 성세가 지속된다(강건성세). 일본은 도쿠가와막부통치시기로 접어들고, 중일양국은 쇄국정책을 쓴다. 관방교류는 다시 중단된다. 이때, 이민의 원동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2000여년간 지속되었던 대륙의 일본이민의 역사도 마감된다.

 

일본의 사학가가 얘기한 바와 같이 "우리가 조상의 숫자를 통계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 현대의 일본인들은 1천수백년전에 생활했던 모든 일본인들의 혈액을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인정해야 할 것은 누구의 혈액에서건 100분의 10 내지 20의 귀화인의 혈액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조상들이 귀화인들을 동화시켰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귀화인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