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진격]
삼국시대 오(吳)나라 손권이 시도함. 손권은 바다를 향하여 세력확장을 기도했다. 227년 손권은 동치(東治, 지금의 하문)에 바다에서 전투할 수 있는 수군을 훈련시키고, 대형전함 수백척을 건조함. 230년, 손권은 위온(衛溫), 제갈직(諸葛直)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수군 1만여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당시의 이주(夷州, 대만성)에 도착하였다. 당시 토착민들의 저항이 약간 있었다. 풍토가 맞지 않고, 수천의 장병이 병사하여 두 장군은 할 수 없이 대륙으로 되돌아갔다.
[제2차진격]
수양제에 의하여 진행됨. 수나라말기 대신인 하만(何蠻)은 수양제에게 극력 유구(流球, 대만성)를 개척하도록 설득한다. 607년, 수양제는 하만과 우기위 주관(朱寬)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수군 만여명을 이끌고 전함 수백척에 나눠타고 유구원정에 나선다. 토왕환사(土王歡斯)의 저항에 부닥치고, 전과도 적었다. 609년, 수양제는 다시 호분랑장 진릉 대장군으로 하여금 만여명을 이끌고 대만으로 진격한다. 수나라군대는 고풍(高豊, 지금의 광동성 조주)을 출발하여 먼저 곤신(鯤身, 팽호)에 도착하고 다시 대만서안의 중부에 상륙한다. 다시 토왕환사의 저지를 받았으나, 수개월의 격전 끝에 수나라군이 대승을 거둔다. 토왕환사는 참수당한다.
[제3차진격]
남송때인 1171년, 남송황제는 천주(泉州, 복건)지부인 왕대유로 하여금 팽호에 200여칸의 건물을 짓게 하고 수천의 장병을 보내어 주둔시킨다. 다음 해 수군 만여명을 보내여 대만본도를 정벌한다. 토착민의 저항을 격퇴한후 대만도에 주둔한다. 주둔군의 식량조달을 위해 둔간(屯墾)제도를 시행한다. 그리고 조정관리를 파견하여 관아를 연다. 이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대만지역에 대한 정식주둔이다.
[제4차진격]
원나라때인 1292년, 원세조 쿠빌라이는 해전에 능숙한 한족군대 6천여명과 전함300여척으로 팽호(대만성)으로 보내어 토착고산족을 초무(招撫)한다. 원나라군이 도착한 후 현지 토착민들의 저항을 받는데, 원나라군대는 수가 적은데다, 풍토가 익숙치 않아, 사기가 낮았다. 결국 패배하고 잔여한족군대는 대륙으로 도망친다. 1297년, 쿠빌라이는 다시 복건평장사 고흥(高興)을 동정대장군으로 봉하고, 한군수군1만5천을 수백척의 배에 태워 다시 대만으로 진공한다. 수개월의 격전 끝에 대만을 차지한다.
[제5차진격]
명나라때, 왜구가 중국동남해안을 교란시킨지 이미 100년이 되었다. 1602년(만력30년) 명나라군에 궤멸된 왜구가 유구(대만성)으로 도망친다. 명나라의 명장 심유용 대장군은 대만근해에서 잔여 왜구를 전멸시킨다. 대만의 백성들을 상륙한 명나라군대를 열렬히 환영한다. 1622년, 네덜란드인이 두번째로 마카오를 공격했으니 성공하지 못하자, 다시 팽호로 되돌아간다. 1624년, 명나라는 수군 만여명을 파견하고, 전함 수백척을 몰고 네덜란드군을 공격한다.네덜란드인은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어 투항한다. 그러나, 참패한 네덜란드군은 다시 대만본섬으로 도망친다. 당시 명나라는 한창 만주족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대만의 네덜란드인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1626년, 스페인도 대만에 상륙하여 북부지방을 점거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인들을 공격하고, 결국 1642년 스페인인들이 물러난다. 이로써 네덜란드인들이 전체대만의 지배권을 차지한다.
[제6차진격]
명말청초인 1657년, 남명의 장군인 정성공은 당시 대만에서 도망쳐온 하정빈(何廷斌)을 접견한다. 하정빈은 정성공의 부친인 정지룡의 부하였고, 대만에서 네덜란드통역을 맡아왔다. 그가 온 것은 정성공으로 하여금 대만을 점령하도록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대만은 이미 한화된지 여러세기가 되었다. 1622년부터 네덜란드는 전함을 보내어 대만에 대한 정찰을 하다가, 1642년 대만에 진공하고, 네덜란드대군은 금방 계롱(鷄籠, 지금의 기륭), 담수등을 점령하고, 스페인인들을 몰아낸다. 네덜란드인들은 대만에서 군사통제를 실시하고, 현지주민의 반항을 피로 진압했다. 그리고 대만을 기지로 연안해안에서 중국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고 무역에 종사했다.
정성공과 여러 장수들은 반청복명의 근거지를 필요로 했다. 정성공은 하정빈으로부터 대만의 상황을 전해듣고, 바다를 건너 네덜란드로부터 대만을 수복하기로 결정한다. 1658년, 정성공은 대만을 수복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정성공은 배를 수리하고, 항도를 파악한다. 1661년 3월 23일, 정성공은 네덜란드군의 병력이 얼마되지 않고(천여명), 지원군이 계절풍의 영향으로 대만까지 오기 힘든 시기를 잡아, 장병2.5만명을 이끌고 전선 주백척과 함께 하정빈과 해로에 익숙한 어민의 인도하에 금문에 요라만을 출발한다. 정성공의 군대는 팽호를 떠나 4월초이틀에 네덜란드군이 방어에 소홀한 녹이문항(지금의 타이난시 안평항북쪽)의 바깥에 도착하여 상륙한다. 사월초사흘, 정성공은 1.2만명을 이끌고 적감성을 포위하고, 성내의 물길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성의 주위에 화포를 설치하여 네덜란드군을 위협한다.
초나흘에 네덜란드군이 항복한다. 정성공은 그들을 후히 대해준다. 네덜란드의 휘하에 있던 흑인용병들은 정성공에게 의탁한다. 정성공의 군대가 계롱, 담수등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현지의 네덜란드군인들은 현지주민들에게 축출당한다.
정성공의 제2진이 상륙하고, 대만성은 8개월간 포위된다. 12월 초6일, 정성공은 대만성을 공격하고, 그날 밤에 성은 함락된다. 대만성에 숨어있던 네덜란드군의 잔여세력 600여명은 부상과 기근으로 거의 전투력을 상실했다. 긴급회의를 연 후에 우대조건을 보장받기로 하고 성을 넘겨준다. 12월 13일(1662년 2월 1일, 양력), 네덜란드대표는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이리하여 38년간의 네덜란드통치를 끝내고 대만은 중국으로 되돌아온다.
[제7차진격]
청나라의 전성기에 강희제는 대만에 대한 전략을 초무(招撫)로 바꾸고, 10여년간 담판을 하나, 결말을 내지 못한다. 1681년(강희20년) 청나라조정은 정성공의 아들인 정경(鄭經)이 죽고, 어린 아들이 왕이 되면서, 내부암투가 발생하자, 대만을 무력통일하기로 결정한다. 강희21년 여름, 강희제는 조정내의 각종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랑(施琅)을 복건수사총제독으로 명하고, 복건총독 요계성과 함께 대만을 회복하도록 한다. 두 사람은 명을 받은 후, 군무를 정돈하고 전함을 제조하며, 병사를 훈련시키고 장수를 뽑는다. 동시에 대만의 상황을 탐색하고, 해로를 확보한다.
1683년 6월 14일, 시랑은 청나라수군 2만여명을 이끌고, 각종 전함 200여청을 이끌고 팽호로 간다. 대만측도 200여척의 전함과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있어, 수량의 면에서는 비슷하였다. 6월 22일, 청나라군은 팽호도를 강공하고, 시랑은 수군을 셋으로 나누어, 총병 진망과 동의를 좌우익으로 하고 각군에게 50척씩을 이끌게 한다. 그리고는 각각 계롱과 우심만을 공격하게 한다. 시랑은 스스로 전함 백여척을 이끌고직접 낭마궁(팽호본도 서북쪽)으로 진격한다. 청나라군은 용감하게 싸웠고, 대만측의 전함190여척을 격파하고, 주력 12000여명을 섬멸시킨다. 그리고 4200여명이 투항한다. 대만방어군의 사령관인 유국헌은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낭패하여 남은 전함 20-30척을 이끌고 잔여군 수백명을 데리고 대만본섬으로 물러간다. 대만내부는 깜짝 놀랐고, 유국헌은 투항할 것을 주장한다. 7월 15일, 대만측은 지도명책과 투항서를 바친다. 8월13일, 시랑은 청나라군을 이끌고 대만에 상륙한다.
나중에 청나라조정은 시랑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만에 현, 부, 순도를 설치하고, 군대를 보내 주둔시킨다. 이로써 정씨가족 3대 20여년에 걸친 통치기간도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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