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계신문보
대만 죽련방(竹聯幇)의 두목인 진계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각계의 인사들이 몰려들었다. 진계례의 결의형제인 오돈(吳敦)은 미디어에 진계례가 아주 편안하게 갔으며, 두 아들이 모두 곁을 지켰다고 말했다. 그의 처인 진이범(陳怡帆)과 죽련방의 주요인사들이 이미 홍콩으로 가서 장례관련일들을 처리하고 있으며, 진계례의 유언에 따라, 대만으로 시신을 운구하여 장례를 치를 것이라고 했다. 오돈은 대만당국은 진계례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였다고 말했다. 진계례는 정부당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일했는데, 당국은 진계례를 출국시키고 돌아오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해외에 망명하게 하였으니,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진계례의 조적(祖籍)은 강소(江蘇)이다. 1949년 부모를 따라 대만으로 왔다. 1960년대초에 "외성인"들은 대만 "본성인"들에게 배척을 받았었는데,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던 진계례는 여러번 "본성(本省, 대만성)" 학생들과 싸움을 벌였고, 흑사회(黑社會, 암흑가)에 발을 들여놓았다. 최초에 진계례는 "중화방(中和幇)"이라는 조직에 가입하였다. 나중에 "죽련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죽련방내에 "죽엽청(竹葉靑)"이라고 불리우는 소장파 구성원들의 조직을 이끌었고, 대규모 행동을 전개했으며, 적수인 "사해방(四海幇)"이 원래 장악하고 있던 지역을 빼앗았다. 1968년 4월, 진계례는 총당주(總堂主)의 지위를 승계했다. 그의 지휘하여 "죽련방"은 소위 "천하제일방"으로 성장했으며, 이로써 그는 대만의 암흑가에서 동요되지 않을 지위를 구축했다.
1970년, 진계례는 경찰의 조폭소탕작전때 감옥에 투옥된다. 그리고 풀려난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1972년에 살인혐의로 투옥된다. 출옥후, 그는 "군정국(軍情局, 군대정보당국)"에 발탁되어, 비밀암살임무를 부여받는다. 당시, 미국에 살던 화교작가인 강남(江南, 본명은 劉宜良)이 <<장경국전>>을 써서 많은 비밀을 폭로하여, 대만당국의 신경을 거슬르고 있었다. 1984년 10월 15일, 진계례는 동계삼(董桂森)과 오돈의 두 부하를 데리고 유의량의 차고에서 그를 살해했다. 세 사람은 임무를 완성한 후 흥분되어 대만으로 돌아왔다. 당시 "군정국"의 국장인 왕희령은 2만달러를 진계례에게 수고비로 주었다. 그러나, 진계례는 자기는 직업적인 킬러가 아니라는 이유로 받지 않았다.
다만, 진계례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은 이 "강남사건"이 대만과 미국에서 큰 파문을 일으킨 후, 대만당국은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이어지는 조폭소탕시에 진계례는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고, 1985년 살인죄로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1991년, 진계례등은 석방된다. 그는 이에 대하여 일찌기, "흑방이 정치의 요강이 되었다"고 한탄한 바 있다. 1996년 대만당국은 "치평전안"의 조폭소탕시 진계례는 자신이 체포대상명단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경찰이 행동을 취하기 전에 서둘러 대만을 떠난다. 그리고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가서 11년간의 은거생활을 한다. 1997년, 대만당국은 진계례에 대하여 검거령을 내렸고, 그의 여권을 말소시켰다.
금년 5월 5일, 싱가포르 북두(北斗) 장기팀의 대원들이 간라성 종보레촌에 있는 진계례의 과수원을 찾았고, 캄보디아의 선수들과 기량을 연마했다. 그날, <<세계신문보>> 캄보디아주재기자도 현장에 있었으며, 과수원에서 손님을 맞이하느라 바쁜 진계례와 인터뷰를 했다.
진계례는 따뜻한 색조의 반팔셔츠를 입고, 이미 하얗게 되어버린 머리칼을 하고 서늘한 정자의 한쪽에 앉아 있었다. 여러 차구를 써서 친구들을 위하여 고산운무차(高山雲霧茶)를 따라주고 있었다. 그는 이번 활동의 주관자가 아니고, 그저 친구들의 요청에 따라, 장소를 제공한 것일 뿐이었다. 차를 맛보면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과수원으로 차를 몰고 들어왔고, 진계례를 찾아와 인사를 했다. 손님들이 올 때마다 그는 성의있게 상대방에게 차를 권했다.
진계례는 기자에게 고산운무차의 정황을 설명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높은 산에서 자라는 찻잎은 구름과 안개에 둘러싸여 있게 되므로 맛이 특히 달고 순하다고 한다. 다만, 이런 찻잎은 따기 쉽지 않고, 인공으로 심는 것도 어려워서 아주 귀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과도 같다. 위치가 높으면, 존귀한 것이지만, 높은 곳은 추위를 견디기 힘들다(高處不勝寒)"
진계례는 역사가 되었고, 대만민중들에게는 특수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호기심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한다. 특히 캄보디아에 와서 사업을 하는 대만인들은 프놈펜근처로 오면 처음 하는 일이 그의 장원으로 가서 그가 친히 끓인 고산운무차를 마시는 일이고, 그가 말하는 예전의 은원과 시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대만의 인터넷에는 이런 글이 실린 바 있다: "현재 대만의 관광단이 프놈펜에 가면 가이드는 전체 인원을 데리고 그의 집앞으로 가서 이 곳이 진계례의 집입니다라고 한다. 어떤 때는 대문을 걸어나오는 그와 마주치기도 합니다. 아저씨, 아줌마들은 그를 보면 서로 앞다투어 사진을 찍으려 합니다. 이에 대하여 진계례도 거리낌없이 같이 사진을 찍어줍니다.
오랫동안 캄보디아에 은거해있던 진계례는 나름대로 생활방식을 터득했다. 서예, 수영, 다도와 요리를 즐긴다. 그는 물고기알을 가장 좋아하며, 매번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대만에서 공수하고 있다. 친구들이 오면, 그는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만들어 대접한다. 그가 가장 자랑하는 요리는 곱창과 산채(酸菜)를 볶은 요리이다. 왕왕 모자라서 그가 한 접시를 더 볶기도 한다.
진계례는 대만에도 사업체가 적지 않다. 주로 그의 처가 운영한다. 그 자신의 금고 속에는 현금만 100만달러 이상씩 항상 들어있다고 한다.
진계례는 여러번 결혼했다. 그는 3번 결혼하여 3명의 처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두고 있다. 그중 아들은 현재 홍콩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데, 아주 유명하지는 않지만 스타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대만의 한 TV방송국이 진계례의 집을 방문했다. 그가 수장하고 있던 총들을 보여주었다. 프로그램에서 진계례는 손에 각종 총을 만지면서 기자에게 프놈펜은 안정되어 있지 않아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그러자면 권총만으로는 부족해서, 장총까지 준비하였다고 하였다. 이 방송국의 프로그램은 프놈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바로 캄보디아정부의 주의를 끌었다. 당시 400여명의 군경이 진계례의 주택으로 들이닥쳤다. 진계례와 그 부하들은 아무런 방비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 7월, 프놈펜법원에 의하여 불법무기소지 및 운반죄로 진계례는 13개월간 투옥되었다.
일찌기 1996년, 진계례는 등에 흑색피부암을 알았다. 캄보디아에서 감옥에 들어갈 때, 중풍으로 몸이 예전같지 않았고, 병이 악화되었다. 2007년 6월, 그가 과수원에서 기자의 인터뷰를 마친 후 1개월후에, 병이 다시 재발하였고, 신속히 악화되어 췌장암으로 전이되었다. 진계례는 처와 심복들의 보호하에 캄보디아에서 홍콩으로 가서 치료받았다. 그 중간에 상해에 가서 요양하기도 하였다.
진계례의 상황은 대만의 각계인사의 큰 관심을 받았다. 대만매체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홍콩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이이 병이 깊어 "피골이 상접"했다고 한다. 3일후에는 바로 혼미상태로 들어갔다. 그의 살려는 의지는 매우 강하였다. 상해에 있는 동안, 한번은 그가 병사했다는 뉴스가 떠돌았다. 다만 바로 그의 부하들에 의하여 유언비어임이 밝혀졌다. 비록 여러가지 치료를 하였지만, 진계례의 생명을 구할 수는 없었다. 친구인 풍리발(馮利發)이 회고하는 바에 의하면 진계례는 그와 2008년 북경올림픽을 같이 보러가자고 약속한 바 있었는데, 이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2007년 5월 5일, <<세계신문보>> 캄보디아주재기자가 진계례를 방문했을 때, 진계례는 자기의 주머니에서 책을 한권 꺼내서 기자에게 주었다.
그 책은 <<풍우집(風雨集)>>이라는 것인데, 진계례가 스스로 인쇄하고, 장정하였으며, 표지에는 "비와 바람은 원래 감로인데, 한방울 한방울을 어찌 마음에 두겠는가 - 진계례 선생이 27세에서 32세까지 녹도에 구금되어 있을 때의 심리역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래에는 그의 서명이 있었다. 1970년, 대만당국이 "죽련방"을 소탕할 때, 진계례등 방내의 핵심인사들은 녹도(綠島)의 감옥에 구금되었다. 이것은 진계례가 처음 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풍우집>>은 진계례의 소위 강호심득을 기록한 것이다. 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모두 과거로 된다. 네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만장의 심연에 떨어지게 되고,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되더라도 절대 뜻을 잃어서는 안된다. 용감하게 직면하면 그것은 과거지사로 될 것이다" "충(忠)은 원래 어느 정도 멍청한 것이다. 화사첨족하여 우충(愚忠)으로 다른 사람을 형용하고자 한다면 어찌 더욱 멍청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계례는 스스로 그는 대만당국에 충성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강남사건"을 일으킨 것이며, 이후 감옥에 들어갔다. 대만매체는 일찌기 그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대만당국에 원한을 갖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때 형제들은 대만당국에 "우충"한 것이고 우충에 대하여는 돌봐줄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비록 캄보디아에 있고, 차를 마시고, 손님들을 맞이하지만, 진계례의 마음은 항상 대만을 떠나지 않았다. 2002년 8월, 진계례의 부친이 대만에서 사망했다. 영당에는 아들만 빠졌다. 매체에서는 진계례가 천리밖의 캄보디아에서 영당을 설치해서 제를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고싶다는 마음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사실, 당시 진계례는 원래 대만으로 돌아가서 장례식을 치를려고 하였다. 다만, 모친이 극구 말렸다. 모친은 그가 대만으로 돌아오면 체포될까 걱정되었고, "남편과 아들을 둘 다 잃을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진계례로 하여금 캄보디아에 계속 머물고 대만에 오지 말라고 하였다.
<<캄보디아성주일보>>의 기자인 황평은 진계례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 진계례는 그녀의 아들 혼례에 참석한 바도 있었다. 그녀는 진계례가 어느날 저녁에 전화를 걸어, 반시간을 얘기한 바 있는데, 대만당국에 그에게 부당하게 대한다는 점에 대하여 매우 화가 나있었다는 것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진계례가 바둑두며 얘기를 나눌 때, 자주 대만에 관한 화제를 꺼냈다고 한다. 민진당은 "썩은 사과"이므로 구할 방법이 없다든지, 특히 천쉐이볜은 정치를 하기 전에 변호사였으므로, 그도 천쉐이볜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쉐이볜을 아주 경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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