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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중국의 재미있는 기록을 가진 장원급제자

by 중은우시 2007. 2. 8.

과거시험은 중국 고대에 관리로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일이었다. 수나라때 과거제도를 창시한 이래로 역대 장원중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당고조 무덕5년의 손복가(孫伏伽)로부터 청나라 광서30년의 유춘림(劉春霖)까지 모두 592명이다. 이 592명중에서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10명의 장원을 아래에 소개한다.

 

1. 부마장원(駙馬狀元) : 정호(鄭顥)

 

자고이래로 민간의 전설이나 소설에 장원급제후에 부마가 된 이야기는 매우 많다. 마치 장원을 하면 부마가 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장원들중에서 부마인 사람으로 기록상 확인되는 사람은 정호가 유일하다. 정호는 당나라 회창3년에 장원을 했다. 원래 그는 혼약이 되어 있었고, 장원급제후에 노(盧)씨집안의 딸고 혼인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젊고 잘생긴 장원은 황제의 눈에 들었고, 자기가 아끼는 딸인 만수공주를 그와 결혼시키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정호는 공주는 싫어했고, 자기의 어릴때부터 친구인 노씨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당선종은 재상인 백민중을 보내어 그를 설득했다. 백민중은 온갖 말로 꼬시고 유혹하고 협박하여 결국 그가 만수공주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혼후에도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나중에 정호는 여러번 백민중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당선종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어 정호의 상소문을 모두 무시하고 백민중을 보호해준다.

 

2. 얼굴이 가장 두꺼운 장원 : 배사겸(裴思謙)

 

당문종때, 환관 구사량이 권력을 장악하였고, 조정신하의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배사겸은 당시 권력자들에게 아부를 잘했다. 그래서 금방 구사량과 가까워졌다. 이 해에, 배사겸은 진사가 되고싶어 구사량의 추천서를 받아 그 해의 주시험관인 고해를 찾는다. 고해는 청렴한 사람이어서 배사겸을 혼내고 쫓아버린다. 배사겸은 화가 나서 내년에 반드시 장원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 배사겸은 다시 구사량의 추천서를 가지고 주ㅅ험관 고해를 찾는다. 그리고, "구사량 대인께서 말이 있었다. 배사겸을 장원으로 하라고 하였다" 고해는 "장원에는 이미 사람이 있다. 장원 이외의 사람이라면 구대인의 말을 따를 수 있다" 그러나, 배사겸은 얼굴두껍게도 "배사겸은 장원이 아니면 안된다"고 고집했다. 고해는 이번에도 구사량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곤란할 것같아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배사겸을 한번 만나봐야겠소." 그러자 배사겸은 "내가 바로 배사겸이오"라고 답한다. 어쩔 수 없이 고해는 배사겸을 장원으로 정한다.

 

3.  씨름으로 장원이 된 사람: 왕사종(王嗣宗)

 

송태조 조광윤이 천하를 얻은 지 16년째 되는 해에, 송태조 조광윤은 친히 전시를 관장했다. 시험생 왕사종, 진식이 가장 먼저 답안지를 제출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답안은 모두 뛰어나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송태조는 아주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에게 씨름을 해서 이기는 사람을 장원으로 하겠다고 했다. 왕사종과 진식은 대전에서 씨름을 하였고, 결국 왕사종이 진식을 땅바닥에 매쳐서 그 해의 장원이 되었다.

 

4.  가장 자신있었던 장원 : 호단(胡旦)

 

송태종원년에 한 서생이 산동의 어느 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다. 지현이 이 서생의 글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는 연회를 베풀고 환대했다. 지현의 아들은 이 서생을 멸시했다. 그리고 무슨 재주가 있는지 물어본다. 서생은 시를 잘짓는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시를 한 수 짓고, 서생이 한수를 대답하곤 하였다. 마지막 싯구를 짓자 공자는 그를 '잠꾸러기'이라고 놀린다. 그런데, 다음해 열린 과거에서 바로 이 서생이 장원을 차지한다. 그의 이름은 여몽정(呂蒙正)이다. 그리고나서 여몽정은 그 공자에게 서신을 보낸다. '당신이 말한 잠꾸러기가 이번에 장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공자는 잠꾸러기도 장원을 하면 다음번 장원은 내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번 과거에 과연 그가 장원을 차지한다. 그의 이름이 바로 호단이다.

 

5. 신분이 가장 높은 장원 : 조해(趙楷)

 

송휘종의 셋째 아들은 이름이 조해이다. 그는 몰래 중화 원년의 과거시험에 참가한다. 그는 글재주가 뛰어났으므로 전시에 들어가고 전시에서도 뛰어난 글재주로 장원을 차지한다. 과거발표가 난 후에야 조해는 비로소 부친인 휘종에게 사실을 얘기한다. 송휘종은 매우 기뻤다. 그러나, 천하의 선비들이 뒷말을 할 것을 우려하여 그 해의 2등(방안)인 왕앙을 장원으로 올린다. 전설에 의하면 청나라때 강희제도 몰래 과거에 참가했고, 3등(탐화)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원은 아니었다. 장원을 한 사람중에는 조해가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다.

 

6. 가장 비참한 장원 : 진안(陳安)

 

명태조 주원장때 복건성 민현사람인 진안은 홍무30년의 과거에서 장원을 하고, 명나라때 여섯번째 장원을 한 인물이 된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진사에 뽑힌 사람이 모두 남방사람이었다. 더욱 공교로운 것은 3명의 주시험관 역시 모두 남방 사람이었다. 그래서 과거결과가 발표되자 북쪽의 선비들이 이에 반발했고, 주시험관들이 고향사람을 편애하고, 북방선비들을 물리쳤다고 난리를 쳤다. 주원장도 대노하여, 장신, 진안등 12명을 조사하도록 시켰다. 주원장은 진안의 장원을 취소하고 차열(車裂)형을 내렸다. 진안은 겨우 20일동안 장원으로 지내다가 비명횡사하였다.

 

7. 가장 인정받은 장원 : 강해(康海)

 

명효종때, 28세의 강해가 북경으로 가서 과거에 참가하였다. 그는 반드시 장원이 되겠다고 맹서한다. 아쉬운 것은 장원을 노탁(魯鐸)에게 빼앗기고 그는 겨우 4등에 머물렀다. 강해는 이에 불복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회시(2차시험)에서는 노탁에게 양보하였지만, 전시(최종시험)에서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전시에서는 과연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강해가 장원이 된다. 그의 문장을 본 시험관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황제가 검사할 때도, 효종이 칭찬의 말을 끊이지 않았다. "대명150년이래로 이처럼 뛰어난 답안지는 없었다"고 하고 강해를 장원으로 뽑는다.

 

당초 회시때는 노탁이 1등을 한 점에 대하여 강해가 불복했는데, 이번에도 2등(방원)을 한 손청이 강해가 1등을 한데 대하여 인정하지 못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자기의 글이 강해의 글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도 강해가 장원한 문장을 읽어보고서는 스스로 인정했다. 그래서 강해의 집으로 뛰어가서 그에게 오래 절을 하고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황상, 수보(재상)와 같은 해 급제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음으로 인하여 강해는 당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조야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강해와 관련되는 모든 사람들까지 함께 이름을 얻었다. 가해의 조부가 일찌기 남경에서 관리를 지낸 적이 있다는 이유로 남경 사람들은 '강해는 바로 남경의 풍수가 배출한 인물이다'라고까지 하였다. 아쉬운 것은 강해의 이 문장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8. 가장 전설적인 장원 : 사대성(史大成)

 

사대성은 청나라때 절강성이 배출한 첫번째 장원이다. 그가 장원급제하기 전에 절강성의 민간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떠돌았다. 절강의 장원은 청나라때, "사(史)씨에서 시작해서, 종(鍾)씨로 끝난다"는 말이었다. 전시를 볼 때, 그의 답안지는 주시험관에 의하여 3등으로 평가되었다. 황제가 어람할 때 그의 서법이 뛰어난 것을 보고는 "이 자는 해서가 아주 바르니 반드시 정인군자일 것이다"라고 하며 그를 장원으로 뽑았다. 교묘한 것은 절강에서 배출한 마지막 장원도 종준성(鍾俊聲)이라는 점이다. 이로써 민간의 이야기는 입증된 셈이다.

 

9. 가장 잘먹는 장원 : 이반(李蟠)

 

이반은 청나라 강희제때 정축과의 장원이다. 그는 키가 컸고, 아주 잘먹었다. 여기에 생각이나 글쓰는 것도 모두 느렸다. 그래서 전시때 36개의 만두를 들고 들어갔다. 그것은 어쨌든 글을 다 쓸 생각이었고, 혹시 글을 다 못썼는데 배가고프면 안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응시자들이 답안지를 모두 제출하였는데, 이반은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감독관이 그에게 시험지제출을 재촉하자, 그는 온 몸에 땀을 흘리면서 주시험관에게 요청하였다. "저에게는 필생의 일입니다. 제발 재촉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천천히 다 쓰도록 해주십시오" 시험관도 그를 가련하게 여겨서 그에게 몇 개의 초를 더 주었다. 이 때 그가 가져온 36개의 만두는 이미 다 먹었다. 그는 만두를 좀 더 가져다 달라고 하면서 밤늦게까지 글을 썼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답안지를 제출했다. 강희제는 이 소식을 듣고는 그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은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 파격적으로 그를 장원으로 뽑았다. 같은 해에 3등(탐화)를 한 사람은 그를 놀리는 시를 지어서 "만두장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0. 가장 요행스러운 장원 : 필원(畢沅)

 

필원이 장원급제하기전에는 군기처의 작은 관리였다. 그해 4월 25일밤. 그는 동료 저중광, 동봉등 3인과 군기처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순조롭게 회시(2차시험)을 통과하였고, 4월 26일의 전시(최종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 동의 두 사람은 집에 돌아가서 다음 날의 전시를 준비하고자 하여, 솔직하게 필원에게 말했다. "우리 둘은 서예가 뛰어나니 장원할 희망이 있지만, 너는 서예가 엉망이어서 장원을 꿈꿀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 둘을 대신해서 당직을 서달라"고 하였다. 청나라의 전시는 서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필원의 서법은 확실히 별로였다. 그래서 응락했다. 그날 밤, 섬감총독이 신강둔전에 관한 상소문을 군기처로 보냈고, 필원은 그 상소문을 자세히 읽었다. 그런데, 다음날 전시에 나온 문제가 바로 신강둔전에 관한 건이었다. 필원은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내용을 썼다. 결과는 필원이 장원이었고, 저중광이 방원(2등), 동봉은 2갑6등이었다. 저, 동의 두 사람은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전해듣고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