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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청나라말기의 최대사건: 무오과장안(戊午科場案)

by 중은우시 2007. 3. 26.

글: 후양방(侯楊方)

     2007년 3월 19일 <<21세기경제보도>>에 발표

 

청나라 함풍8년(1858년)은 간지로 따지면 무오년(戊午年)이다. 이 해에는 마침 수도 순천부(順天府, 북경)의 향시(鄕試, 청나라때 과거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의 3단계로 진행되었고, 향시는 각 성에서 3년에 1회 진행하였으며, 향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秀才이고 합격하면 擧人이라 부른다. 거인들은 합격한 다음 해 봄에 예부에서 진행하는 會試에 참가하고 여기에도 합격하면 貢人이라 부른다. 공인들은 다시 殿試에 참가하는데 황제가 주재하는 시험이다. 여기를 통과하면 進士라고 부른다)가 거행되었다. 향시의 주고관(主考官, 주시험관)은 몽고 정남기 사람인 백준(柏)이었고, 부주고관(副主考官)은 호부상서인 주봉표(朱鳳標)와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인 정정계(程庭桂)였다.

 

8월 초8일 향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향시를 치는 장소인 공원대당(貢院大堂)에 대두귀(大頭鬼)가 나타났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공원대당에 대두귀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한번 나타나면 큰 사건이 발생하곤 했다는 것이다. 9월 16일 방(榜)이 발표되었는데, 10등내에 기인(旗人, 기인은 팔기에 속한 사람으로 만주팔기, 몽고팔기, 한인팔기가 있음. 청나라의 핵심계층)인 평령(平齡)의 이름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경극(京劇) 애호가였고, 자주 등단하여 경극을 연출하곤 했었다. 그리하여 여론이 급격히 일어났고, 이런 경극배우까지 향시에서 10등내를 차지한다는 것에 의문을 나타냈다.

 

10월 초7일, 어사(御史)인 맹전금(孟傳金)은 함풍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번 향시에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탄핵하였으며, 특히 평령은 "주묵불부(朱墨不符, 붉은 글씨와 검은 글씨가 서로 맞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원래 과거에서는 시험관들이 참가자들의 필적을 알아보고 부정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청나라때의 과거시험에는 시험생이 직접 쓴 답안지는 묵필(墨筆, 먹으로 쓴 글, 즉 검은 글씨)로 작성하고, 그 후에 지정한 인원으로 하여금 주필(朱筆, 붉은 글씨)로 옮겨쓰게 한 후에 시험관들이 채점하였던 것이다. "주묵불부"라는 것은 바로 평령이 쓴 답안지는 원래 자신이 쓴 답안지와 시험관에게 올린 답안지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함풍황제는 바로 이친왕 재원(載垣), 정친왕 단화(端華), 호부상서 전경(全慶), 병부상서 진부은(陳孚恩)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심리하도록 하였다. 무오과장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평령은 끌려와서 조사를 받았는데, 오래지 않아 옥중에서 사망했다. 평령의 답안지를 다시 조사해보니, 그가 쓴 묵필답안지에는 초고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고, 주필답안지에도 7개의 잘못된 글자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고친 흔적이 있었다. 10월 24일, 이번 향시의 모든 답안지를 원명원의 구경조방(九卿朝房)으로 가져오게 하여, 다시 조사했다. 그러자, "이번 향시의 주시험과 , 부시험관들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잘못된 답안지가 50여본에 달하였고, 심지어 한 사람의 답안지에는 잘못쓴 글자자 300여자에 이르는 경우까지 있었는데도 합격했다. 함풍황제는 이를 듣고 대노했다. 즉시 주시험관 백준을 삭탈관직했고, 주봉표와 정정계도 해임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 향시가 끝난 후 얼마되지 않은 9월에 백준은 이미 정1품인 문연각대학사 겸 군기대신으로 승진해 있었다. 청나라때는 '대학사 겸 군기대신'을 진짜 '재상'이라고 불렀으므로, 진정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사건내용을 깊게 파고들어갈 수록, 백준이 직접 부정행위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수면위로 드러났다. 시험생 나홍강(羅鴻絳)은 같은 고향인 병부시랑 이학령(李鶴齡)과의 관계를 통하여, 동고관(同考官) 포안(浦安)을 알게 되고, 다시 포안은 백준의 심복인 근상(祥)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백준에게 나홍강의 시험지를 바꿔치기해서 합격시켜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후 나홍강은 다시 백준, 포안에게 뇌물을 바쳤다.

 

함풍9년 2월 13일, 재원등은 함풍제에게 사건상황과 처리방안을 보고한다. 백준은 "교통촉탁, 뇌매관절의 사례에 따라, 참입결(斬立決)"을 하도록 건의한다. 백준은 함풍제가 아끼는 신하이므로, 함풍제는 그를 살려줄 수 있는 방안으로 처리할 것을 얘기한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은 침묵을 지키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반대의사를 나타낸다. 게다가 호부상서인 숙순(肅順)은 그 자리에게 극력 반대하며 말한다. 과거는 국가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중요한 제도이므로 엄격하게 지행하여야 한다. 그래야 과거에 예로부터 내려온 악습을 타파할 수 있다면서 백준을 법규에 따라 참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함풍제도 "사정은 이해할 점이 있으나, 법으로는 관용을 베풀기 힘들구나"라고 하면서, "참입결"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함풍제는 매우 가슴이 아팠던 것같다. "말을 여기까지 하자,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의 공범들인 포안, 이학령, 나홍강과 백준등 4명은 채시구(菜市口)로 끌려가 참수(斬首) 당한다. 이 일은 조야를 뒤흔들어 놓았다. 청나라때, 정1품의 신하가 공개적으로 처단당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극악한 죄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던 화신도 자진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백준 본인조차도 황제가 영을 내려 신강에 유배보내는 정도로 처리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심지어 그는 신강으로 가기 위하여 보따리까지 준비해놓았었다. 그러나, 생각도 못하게 황제로부터 내려온 명령은 참수를 집행하라는 것이었다.

 

무오과장안은 이 4명이 죽은 것으로 종료되지 않았다. 사건은 좀 더 진행되었다. 이전에 심문하는 과정에서 포안은 그가 듣기로 부주고관인 정정계가 일찌기 청탁자들이 보내온 쪽지를 태워버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정정계는 이로 인하여 체포되었고, 그의 아들인 정병채(程炳采)가 몇 장의 쪽지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는데, 모두 고관자제와의 관계를 통하여 받은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사건조사에 참여했던 병부상서 진부은의 아들인 진경언(陳景彦)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청탁자들과 쪽지를 보낸 고관자제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함풍9년 7월에 사건을 모두 종결하였고, 재원등은 정정계, 정병채 부자를 함께 참수하도록 주장하였는데, 함풍제는 정정계가 두 황조의 노신이고 부자를 함께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여,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부친 정정계는 군대를 따라가도록 유배보내고, 아들 정병채는 여전히 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청탁자 7명은 가볍게 처리하여 죽음은 면하고 신강으로 유배를 갔다. 무오과장안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순치, 강희연간에도 두 번의 과장안이 발생한 바 있다. 모든 시험관들은 부정행위로 인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평용하고 쇠퇴하던 도광제연간에 들어서면서 관료사회에서는 "고개는 많이 숙이고, 말은 적게 하는" 원칙이 횡행하면서, 아무도 나서서 시정을 비판하려 하지 않았고, 관리들은 아무 일도 않고 세월을 보내고, 동시에 부패가 성행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과거는 부패를 벗어날 수 없었고, 쪽지를 보내어 뒷문으로 합격하는 것이 이미 성행하게 된 것이다. 시험관들은 쪽지를 받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쪽지를 많이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이미 이러한 행위가 엄중한 범죄라는 것도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다. 함풍제가 즉위한 후, 관리들의 기풍을 바로잡으려 하고, 도광제때의 부패한 기풍을 일신하고자 했으며, 과장안을 법에 따라 엄격하게 처리했다. 일로서 당대의 진짜 재상까지 공개적으로 참형에 처했다. 이것은 청천벽력이었다. 이후 과거장의 분위기는 싹 달라졌다. 누구도 자기의 목을 걸고 법을 시험하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무오과장안은 난세에 중형으로 기풍을 바로잡고자 한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것은 당시의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고, 법의 규정은 거의 아무도 지키지 않는 헛규정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엄중한 범죄에 대하여도 이미 마비되어 인심과 기풍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일을 신중하게 하고, 성의있게 하며, 아주 주도면밀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유명하여 황제의 인정을 받고, 중용을 받던 정1품 관리인 백준은 사후에 포안으로부터 16냥의 은자를 감사인사로 받았을 뿐이다. 이로써 볼 때, 백준은 그 자잘한 16냥의 은자를 받기 위하여 과거부정행위를 해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인정과 분위기에 끌려, 시험지를 바꿔줌으로써 아는 사람을 합격하게 해준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런 행위는 통상적으로 있는 것이므로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백준의 행위는 처벌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도 당시의 부패분위기의 희생물이라고 볼 여지가 많다. 사회에서 위법행위를 목도하고도 마비되어 아무런 위법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이를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긴다면, 이런 위법행위는 점차 사회의 잠규칙(潛規則, 숨은 규칙)이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더 나아가서 현규칙(顯規則, 드러난 규칙)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법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같고, 흑백이 구분되지 아니하며, 공정과 공평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