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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송경령(宋慶齡)은 왜 중산릉(中山陵)에 합장되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07. 3. 21.

남경의 중산릉(손문의 묘)를 둘러싸고 있는 부장묘중에는 요중개(廖仲慨)와 그의 부인 하향응(何香凝)의 묘가 있다. 면적은 크지 않다. 그러나, 풍격은 특이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 묘도 중산릉을 설계한 건축가인 여언직(呂彦直)의 작품이다.

 

요중개는 1925년 8월 20일 오전에 암살당한다. 이때는 손중산이 서거한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았을 때이며, 그의 나이 48세때이다. 그의 부인 하향응은 46세(송경령보다 14세가 많았음)였다. 47년후인 1972년 9월 1일, 하향응은 북경에서 서거했다. 그녀의 유언인 "살아서 같은 침대를 쓰고, 죽어서도 같은 무덤에 묻히겠다"는 말에 따라, 영구는 남경으로 보내어져 요중개와 합장했다.

 

요중개부부는 모두 초기의 동맹회 회원이었다. 손중산 선생의 가장 가까운 전우이자 조수였다. 기록에 의하면 손중산은 죽기 전에 하향응에게 "내가 죽은 후, 손부인(송경령)을 잘 돌봐주세요.."라고 부탁하였고, 하향응이 그러겠다고 하자, 손중산은 하향응의 손을 붙잡고, "요부인,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두 집안은 관계가 아주 밀접하여 하향응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송경령을 숙파(叔婆, 아주머니) 또는 영어로 '앤트'라고 불렀다.

 

하향응이 죽은 후 9년이 지나 송경령도 북경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서거하기 반달전에 그녀는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의 칭호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중산릉에 합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그녀의 유체는 화장한 다음 날, 유골은 전용기로 상해에 보내어졌고,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송씨묘원(宋氏墓園)에 안장되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생전의 요청과 안배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가 서거하기 3개월전에, 그녀가 계속 "이언니"로 불렀고, 16살때 그녀의 신변에서 요리와 가사업무를 53년간이나 해왔던 이연아(李燕娥)가 사망했다. 송경령은 이의 유골을 그녀의 유골과 함께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이를 위하여, 개인비서에 보낸 서면지시에서 그림을 그려서, 이연아와 그녀 자신의 묘비의 위치를 부모의 합장묘의 좌우로 같은 거리를 두고 묻어달라고 하였다.

 

송경령이 왜 손중산의 중산릉에 합장 내지는 부장을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을까?

 

요승지는 <<나의 조사>>라는 글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 "그녀는 일생동안 지위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번도 자기의 사후에 어떤 특수한 조치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만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녀는 아마도 남경의 자금산 중산릉에 매장될 것이다라고 한 바 있는데, 그녀 자신은 이를 생각해본 적도 없다. 중산릉의 건조나 구상에 그녀는 일언반구 간여한 적이 없고, 그녀는 중산릉이 그녀때문에 더해지거나 그녀때문에 국가와 인민의 돈을 쓰게하려고 하지 않았다"

 

송경령의 전기작가인 Israel Epstein은 보충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녀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손중산의 역사적인 업적은 그의 것이고, 그녀가 나눠가질 수는 없다고. 그외에...해방전에, 국민당에서 어던 사람이 그녀의 손중산의 미망인이라는 지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바 있었다(1922년 중산함사건전에 비록 이미 결혼한지 7,8년이 되었지만, 국민당내에서는 여전히 그녀를 '송소저'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명백히 그녀의 '손부인'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이런 무의미한 논쟁은 없어졌지만, '명분'문제는 항상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러자, 그녀는 화가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나보고 손중산의 부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나보고 부모님의 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지 않겠는가' 이것도 아마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의 묘지는 문화대혁명때 파괴되었는데, 나중에 주은래총리의 지시하에 복구되었다. 이것도 그녀로 하여금 영원히 부모의 곁에 있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일생동안 공인으로 살았는데, 그러나, 죽을 때에는 사인으로서의 정을 생각한 것같다"

 

Epstein은 세 가지를 보충하면서 말투를 아주 조심스럽게 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그녀의 성격이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사상은 폐쇄적이지 않고 얕지 않았는데, 연구자들에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수수께끼를 하나 남기고 세상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