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경원(陳景元)
2004년을 전후한 몇개월동안 중국에서는 섬서성 임동현 서양촌 하화촌 일대에서 출토된 병마용을 둘러싸고 기세가 대단한 대규모의 논쟁이 벌어진바 있다. 이 논쟁의 주제는 아름다움으로 전세계에 유명한 병마용은 도대체 누가 "발견"했느냐는 것이다. 논쟁의 촛점은 도대체 누가 병마용의 "발견자"라고 불릴 자격을 갖추었느냐는 것이다. 이 "발견자"의 자격쟁탈전에는 쌍방에서 주요한 당사자들이 모두 드러났고, 대치국면도 아주 명확했다. 한 측은 일찌기 우물을 파다가 진용을 파낸 서양촌의 양신만(楊新滿)등 9명의 농민이고, 다른 한 측은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이다.
일시에 중국내외, 중앙부터 지방까지, 동남연해에서 서북고원까지 여러 매체들이 진용의 "발견자"를 두고 서로 다른 보도의 글을 내보냈다. 춤추는 눈꽃처럼 온 하늘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혹은 논밭두렁에서 무의식중에 신문 하나를 꺼내들면, 언제든지 진용의 "발견자"에 관한 소식과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이외에 사람들은 TV의 모니터에서도 자주 몇명의 창로한 농민이 활처럼 굽은 허리를 하고, 양식을 매고 성, 시의 유관기관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하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자주 일부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미디어의 인터뷰를 통해서 정중하게 담화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서양촌 농민들이 하는 말은 아주 많지만 핵심적인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용은 어쨌든간에 그들이 우물을 파다가 먼저 "발견"한 것이라는 것이므로, 자기들이 병마용의 "발견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상반되게 일부 고고학자들은 "과학적인 발견"의 "발견"은 "고도의 지적"인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병마용에 대하여 성격을 규정하고 이름을 규정한(定性,定名) 고고학자들만이 병마용의 "발견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갑론을박을 통하여 쌍방은 모두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이리하여 병마용의 "발견자"를 둘러싼 시시비비는 일순간에 당시 여론의 핫이슈가 되어버렸고, 사회뉴스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뉴스가 되었다.
오랫동안 병마용에 관한 사항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고요했다. 이번에 논쟁이 드러난 것은 비록 "발견자"에 관한 시시비비일 뿐이고, 더욱 민감하고 근본적인 문제까지는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말하든간에 조용한 나날, 평온한 상태는 이때 타파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잘 느끼지 못했다. 진보하는 것인지 퇴보하는 것인지도. 그리고 이런 변화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어쨌든 사람들이 미디어의 최근동태를 잘 관찰해보면, 개혁개방이 가져온 가벼운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쌍방이 논쟁하는 내용만을 놓고 보면, 보통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일과 사람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누가 되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견해가 있으면 누구든지 일어나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논쟁의 형식은 "공격측"도 있고 "방어측"도 있다. 쌍방의 진세와 경계는 분명하다. 누구든지 링에 오르고 싶으면 누구든지 올라서 충분히 발언할 권리가 있다. 논쟁의 분위기를 보면 모두 날카롭게 자기의 주장을 펼치고, 전혀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약간은 아는 것은 모두 말하고, 말은 끝이 없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고싶은 말을 다하는 것은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원래, 병마용의 "발견자"와 같은 논쟁은 성격과 내용이 아주 단순하다. 현재의 정치문제에 관련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민감한 국책과도 무관하다. 그래서 이런 논쟁을 펼칠 공간이 충분하고 넓었던 것이다.
누가 병마용의 "발견자"인지의 논쟁에 대하여 만일 더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속 진행되고 깊이있게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현재 존재하는 허다한 의문들을 모두 수면위로 끌어올려, 공평하고 공정한 원칙하에서 결론을 얻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이상한 일은 겨우 몇개월의 시간이 흐른후, 처음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일부 문제에 대하여 일정한 정도 얘기한 후 어떤 당사자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부 관련있는 정부기관과 기구들도 돌연 입을 봉했고,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어떠한 고려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아주 시끄럽던 진용의 "발견자" 논쟁은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는 상황에서 돌연 조용해 지고, 끝이 나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앞에 내놓았던 많은 문제들은 하나하나 냉각되어 갔고, 한편으로 밀어두었으며, 아무도 정리작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시무종(有始無終)의 논쟁은 아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당초에 사람들이 가장 관심가지고 가장 기대를 가졌던 결론에 대하여 예견가능한 장래에는 만족할만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인가? 이를 기준으로 추단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가 다시 들고 일어나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면서 싸운 것이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결과도 없는 입씨름에 지나지않았는가. 그리고 아무런 실질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일찌감치 이럴 줄 알았다면 당초에 왜 쌍방은 그렇게 핏대를 세워가면서 구호를 외쳤으면서도 실질적인 결과가 전혀 나오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단 말인가. 이번의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는" 발견인과 관련한 풍파는 사람들에게 뭔가 결핍되어 있다는 기분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 무슨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퇴각나팔을 분다면, 이것은 그 중의 한 당사자가 이미 예정한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은 아닌가. 혹은 그 중의 일방당사자가 계속 논쟁을 해나가다보면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닌가.
지금 다시 병마용 "발견자"논쟁의 쌍방을 살펴보면, 누가 자기가 예정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는가? 서양촌의 아홉 명의 농민이 그들이 예정한 목표를 달성했는가? 이것은 명백히 No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많은 주관부서와 관련기관은 서양촌 농민의 요청에 대하여 한번도 적극적이고 지지하는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병마용 "발견자"자격에 대한 호소는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일부 고고학자에게는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서양촌의 아홉 명의 농민에게 있어서 이런 아무런 결과도 없는 난감한 국면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할 리는 절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원래 호소한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일부 권위인사들이 제기한 "병마용에 대하여 '성격을 부여하고, 명칭을 부여한' 고고학자들이 비로소 병마용의 발견자이다"라는 관점에 대하여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들고 일어나 정면으로 유력하게 반박했다. 이것은 그들이 외부여론에서는 이미 절대적인 우세를 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더이상 이 권위있는 학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게 되었다면 그들이 원래 설정한 목표는 달성되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시황병마용"이라는 이 성격부여, 명칭부여가 뒤집어지지 않는 한, 사람들이 이러한 성격부여, 명칭부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의 결과이다.
병마용의 "발견자"의 논쟁의 막은 서서히 내려지고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서안에서 천리바깥인 고도 남경에 살고 있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진경원'이라는 백발노인이 분연히 들고 일어나 북경에서 온 기자에게 말했던 것이다. 병마용 "발견자"의 논쟁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더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직 많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아직 다 말하지 못했다. 병마용의 성격부여, 명칭부여문제는 과거 학술상의 맹점이었다.
외부인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기왕의 30여년동안 진경원과 서안의 고고학자들간에는 병마용의 성격부여,명칭부여를 놓고 많은 의견차이가 있었다. <<진용신탐>>이라는 글이 발표된지 얼마되지 않아, 서안의 고고학계는 진경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급히 학술토론회를 마련한 후 회의에서 진경원의 주장을 만장일치로 부정한다고 한 후, 논쟁의 대문을 꽉 걸어잠궈버렸었다. 그리고는 병마용의 성격부여,명칭부여에 대한 문제에서 계속 발언할 기회를 봉쇄했다. 이후 사람들은 진경원이 자기의 주장을 드러내는 글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다만, 현재 서안측에서 적극적으로 병마용의 '성격부여, 명칭부여'문제를 제기하였고, 이것이 대중들에게 전달되었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고 참고 있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형가의 진시황암살이 실패한 이유 (0) | 2008.07.08 |
---|---|
진나라시대 백년간의 사천이민현상 (0) | 2007.11.28 |
진(秦)나라의 기원은 서융(西戎)인가 동이(東夷)인가 (0) | 2007.05.28 |
아방궁(阿房宮)의 이름의 유래 (0) | 2007.02.26 |
진(秦)을 세운 민족은 우즈베키스탄족인가? (0) | 2006.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