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초(楚)나라의 정략결혼

중은우시 2007. 11. 6. 16:37

글: 풍지명(馮知明)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간의 혼인은 정치적인 요인에 기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일부 제후강국들은 모두 몇단계를 거쳤다. 우선 생존을 도모하고, 생존이 확보되면 발전을 도모하고, 다음에는 확장을 도모하고, 어느 정도 확장이 성과를 거두면 패자(覇子)가 되려는 야심에 목말라했다. 이과정에서 혼인은 그들이 생존과 확장을 추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강국과 강국간의 혼인은 비록 서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대국과 소국의 혼인, 강국과 약국의 혼인에서 소국은 왕왕 뒷배경을 얻고, 의지하고자 하는 심리를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아름다운 희망을 품고 한 정략결혼이지만 알지못하는 사이에 상대방에 의하여 소멸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먼저 초나라를 얘기해보자. 필자가 처음으로 초문왕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세가지 점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식국(息國)을 멸하고 절색의 규부인(?夫人)을 빼앗은 일, 초나라의 수도를 영(?)으로 천도한 일, 다시 자기의 외삼촌나라인 등국(鄧國)을 멸한 일이 그것이다. 등만(鄧曼)은 초무왕의 부인이고, 초문왕의 모친이다. 등만의 동생인 등기후(鄧祁侯)는 바로 초문왕의 외삼촌이 된다. 필자는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으므로, 세분의 외삼촌은 내가 말을 안들을 때면 나에게 "조카가 외삼촌을 인정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나중에 초문왕이 등나라를 멸한 역사를 보았을 때, 비로소 그 민간이야기의 출처를 알게 된 것이다.

 

초문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일을 크게 벌여서 영으로 천도를 했다. 기원전 688년, 바로 초문왕이 즉위한 다음 해에 초문왕은 재빨리 행동을 취했고, 부친의 큰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목표를 신국(申國. 현재의 호남 신양의 서쪽)을 정벌하려 했다. 등국과 신국은 중원의 문호(門戶)에 해당하고, 중원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등, 신 두 나라를 손에 넣어야 했다. 신국은 정국(鄭國)의 외삼촌나라였다. 마치 등국이 초나라의 외삼촌나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원을 차지하려면 또한 수국(隨國)을 먼저 차지해야 했다. 초무왕은 최후의 일전을 통하여 결국 수나라를 굴복시켰다. 초문왕이 중원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먼저 등나라를 차지해야 했고, 신나라를 정벌해야 했다. 그의 등나라에 대한 입장은 부친인 초무왕과 비교한다면 적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초무왕의 부인인 등만이 초무왕의 유력한 협력자였으므로, 초무왕때에 등나라에 대하여는 회유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초문왕은 초(楚), 파(巴)의 병력을 이끌고 신국을 공격했다. 그러려면 반드시 등나라의 땅을 빌려 지나야 했다. 순망치한의 이치는 옛사람들도 너무나 잘 알았다. 마치 강대한 미국이 유엔군을 이끌고 북한으로 진공할 때, 중국이 그냥 좌시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등나라와 신나라는 모두 중원의 문호에 해당하고, 전략적인 위치가 아주 중요했다. 마치 사람의 입에 있는 두 개의 송곳니와 같았다. 만일 초나라가 신나라를 정벌해버린다면, 등나라라는 이 송곳니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지는 꼴이 되고 만다. 등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등나라의 세 사람의 대부(大夫), 즉 추생, 담생, 양생(초문왕의 사촌형제들)은 초문왕을 연회에 초청해서 죽여버리자고 주장한다. <<좌전. 장공6년>>의 기록에 의하면, "등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바로 이 사람이다. 만일 일찌감치 처리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어찌 도모할 수 있으리요. 만일 도모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러나, 등기후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등기후가 선량하고 인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초문왕을 연회에 초청해서 죽여버린다면, 등나라는 더욱 참혹하게 멸망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등기후가 뛰어난 점은 두 가지의 해로운 점을 비교한 후 가벼운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친히 초문왕을 교외까지 호송했다. 초문왕이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되돌아오는 길에, 등나라는 초문왕의 분노를 촉발시켰다(물론, 이는 전쟁을 하기 위한 초문왕의 핑계이다), 이어서 등나라까지 정벌하고 만다. 기원전678년을 전후하여, 태부인 등만과 등기후는 차례로 사망한다. 10년간 은인자중하던 초문왕은 신속히 500년의 역사를 지닌 등나라를 멸망시켜버린다. 이리하여 전국시대에 "가도벌신(假道伐申, 길을 빌려 신나라를 정벌한다)"이라는 유명한 성어가 나오고, 역사에 아주 비참한 의미를 남긴다.

 

필자는 초나라가 일찌기 노(盧), 강(江), 파(巴), 채(蔡), 운(?)등의 나라와 정략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인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약소제후국들이 초나라라는 큰 배를 타려는 것은 걱정거리를 없애려고 한 것인데, 사실은 그들에게 살신지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혼인이 국가간의 관계로 승격되면, 거의 권모술수와 연관되게 된다. 초나라는 수국, 신국, 정국을 정벌한 이후, 다음번 목표를 정국(鄭國)으로 잡았다. 초나라는 패자가 되려는 욕심이 강하였고, 정나라는 큰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군사정치적인 정략결혼은 교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기원전 541년, 초왕 자위는 영친(迎親)을 핑계로 대군을 이끌고 정나라를 기습했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는 정나라에 의하여 발각되었다.

 

초나라나는 자신의 정략결혼국가에 대하여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는데, 다른 강국과의 정략결혼은 어떠했는가? 이는 더욱 악독했다. 예를 들어 현국(弦國)을 보자. 제환공이 패자로 군림할 때, 작은 나라인 현국은 딸을 시집보냈고, 결국 제나라라는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리하여 초나라로부터의 위협을 감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초나라가 감히 제나라와 정략결혼한 나라를 치는 경거망동은 하지 않으리라고 본 것이고, 초나라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초나라라는 거대한 상어의 밥이 되고 말았다. 임금은 포로로 붙잡혀서도 중얼거렸다. 너희는 내가 제나라 환공의 장인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내 딸인 공주가 와서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초나라의 동쪽에는 서국(徐國)이 있었다. 이것도 아주 오래된 나라이다. 선조는 우임금이 치수를 할 때 공을 세워서 안휘 사현일대를 봉토로 받아서 하,상,주 3대에 걸쳐 있었으니, 역사의 활화석이라고 할만한 나라였다. 서국은 전국시대의 거센 파도 속에서 난파선과도 같이 전전긍긍하며 배를 몰아갔다. 초나라가 강할 때에는 초나라에 의탁하고, 오나라가 강할 때에는 오나라에 의탁하였다. 두 나라사이에 조삼모사하면서 살아갔다. 결과적으로 서국은 오국과 정략결혼을 한 후에 초나라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중국역사상 1649년이나 존속했고, 44대의 군왕이 있던 오래된 나라는 결국 초나라의 손에 멸망한다.

 

소국이 대국에 의지하여 생존을 유지하려는 것은 고뇌끝에 나온 선택일 것이나, 사실은 대국에 의하여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을 뿐 최종적인 결과는 역시 멸망이다. 이것은 소국의 숙명이다.

 

일부 제후국들이 공주를 제후국의 군왕에게 시집보내는 경우에 정략결혼수단은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그 목적은 대동소이하다.

 

딸을 사탕포탄으로 삼은 정략결혼은 두 건이 있다. 그 수단은 닮았다. 먼저 정무공(鄭武公). 그는 한 때 패자로 군림할 생각으로 호국(胡國)을 멸망시키고자 했다. 호국은 지금의 하남 언성, 무양현 일대이다. 그는 딸은 먼저 시집보내어 호국의 군주의 부인이 되게 했다. 한번은 군사회의 때 제후가 다투는 시기이자 천하대란의 시기는 바로 영웅이 본색을 드러낼 시기이며 반드시 대외적으로 확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장군인 관기사(關其思)는 정무공의 말에 피가 끓었다. 그는 먼저 발언을 했다. "우리는 중원의 인후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천시지리를 얻은 것이다. 지금 대외적으로 확장하려면, 먼저 전국 만백성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는 패자가 되려면, 반드시 주변의 소국들을 먹어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먼저 소국중 그래도 큰 편인 호국을 공격하려고 했다. 호국을 점령해버리면 나머지 더 작은 나라들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말을 들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정무공은 그 말을 듣고는 대장군을 질책했다. 호국은 형제국이고, 호국의 군주는 나의 사위인데, 이처럼 소인배처럼 계교를 꾸미면 과인이 불의불인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말하다보니 화가 나서 대장군을 끌어내 참수하게 된다. 이 소식은 금방 호국에 퍼졌다. 호국의 군주는 감동했고, 신하들 중에서 정나라에 좋지 않은 입장을 견지하던 신하들을 혼내주었다. 이때부터 정나라가 가장 믿을만한 나라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루는 호국의 군주가 정국의 공주와 밤을 지내고 있는데, 정무공이 병사를 이끌고 몰래 호국을 침입해 들어왔다. 이리하여 호나라는 역사에서 이름이 사라지게 된다.

 

조(趙)나라는 대(代)국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조간자(趙簡子)가 딸을 대나라 군주에게 시집보냈다. 대국은 원래 작은 나라였으므로 반드시 큰 나라에 의탁해야 했다. 조나라에서 공주를 시집보내준 것은 하늘에서 떡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이때부터 대나라는 걱정하지 않았고, 조나라의 말이라면 모두 따랐다. 조간자가 죽고, 그의 아들인 조양자(趙襄子)가 즉위했다. 일찌감치 손이 근질근질했던 조양자는 대나라 주를 연회에 초청했다. <<여씨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먼저 춤꾼들로 하여금 무기를 감추게 하였으니, 수백명이다. 대나라 군주가 도착하고,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바로 공격했고, 즉시 대나라군주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춤꾼들은 무기를 꺼내서 대나라군주를 따라온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는 정무공보다 훨씬 직접적이었다. 대나라군주가 죽었으니, 대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쉬웠다.

 

그리고 약소국중에 기국(紀國)이 있었다. 기국은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다. 강토가 제나라나 노나라와 비슷했다. 기나라는 제나라의 이웃나라였고, 제나라가 확장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제나라는 기국을 멸하지 않으면, 중원을 제패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주 제나라에서는 기국을 모함하고 기국을 미워했다. 제나라에서는 옛날에 기국의 선조가 주나라 천자에게 모함하여 제나라의 선조가 주살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사실 이것도 핑계에 불과했다. 이런 동화와 비슷하다. 즉, 양 한마리가 하류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상류에 있던 이리에게 붙잡혔다. 이리는 양이 물을 오염시켰다는 죄목을 붙여 한 입에 어린 양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제나라가 강대해지면서 제나라는 기국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리하여 기국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이 제나라에 호시탐탐 노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제나라는 수시로 옛조상을 기국이 모욕했다는 이유를 들어 토벌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기후(紀侯)는 자주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깨곤 했으며, 항상 불안하게 살았다. 기후는 그리하여 노(魯)나라를 생각하게 된다. 노나라가 강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보다는 강했다. 기나라의 군주는 노나라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나라가 없어지면 노나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와 기가 연합하는 것은 아주 시급한 일이었다.

 

기나라는 노나라의 군주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한다. 노혜공의 딸인 백희(伯姬)를 부인으로 삼았다. 손안에 이 패가 있으니, 제나라가 기나라를 쳐들어갈 때면 노나라가 간섭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기원전 706년, 제나라는 기국과 노국의 연합을 무시하였다. 아마도 노나라를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일 것이다. 노환공은 매우 화가났다. 개를 때리려면 주인을 봐야 하는 것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친히 기나라를 방문하고, 기나라와 공동군사훈련을 하게 된다. 이는 기나라를 지원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공동군사훈련은 어느 정도 제나라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기는 했고, 제나라도 빠른 시일내에 손을 쓰기는 어려웠다. 반년이 지난 후, 기국의 군주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노나라를 방문했고, 노나라의 군주에게 주의 천자에게 나서서 제나라와의 분쟁을 조정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노환공은 국내 일이 바빠서 기나라까지 신경써줄 틈이 없었다. 기후는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주왕실과 정략결혼을 한다. 그리하여 딸을 주환공에게 시집보낸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가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기나라가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대대로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 중에 "진진지호(秦晋之好)"라는 것이 있다. 후세인들이 칭송해 마지 않는 것인데, 춘추전국시대에 몇 안되는 아름다운 이야기중의 하나이다.

 

<<좌전. 희공23년>>의 기록에 따르면, 진헌공(晋獻公)이 공주를 진목공(秦穆公)에게 시집보내는데, 이 여인이 역사상 목희(穆姬)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헌공이 죽자, 공자인 이오(夷吾)가 즉위한다. 진목공은 병사를 보내어 호송한다. 진(秦)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5개의 성을 떼어내서 진나라에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오는 마음이 좁은 사람이었다. 그가 귀국하여 진혜공(晋惠公)이 되는데, 이전에 진나라와 약속대로 5개 성을 할양해주지 않게 된다.

 

이리하여 진목공이 불쾌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진혜공이 즉위한 후 얼마되지 않아, 국내에 기근이 발생하였고, 진(秦)에서 대량의 식량을 지원해준다. 그런데, 진(秦)나라에 기근이 발생하자 진혜공은 모른척 해버리게 된다. 이는 진목공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친히 대군을 이끌고 진혜공을 정벌하러갔고, 진혜공을 생포해버린다. 목희는 역사상 드물게 보는 총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험을 해보기로 한다. 그녀는 진혜공을 석방한다면 진(秦)나라 사람들의 분노가 풀리지 않을 것이고, 진혜공을 죽여버린다면 두 나라는 영원히 원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두 나라는 실력이 비슷하니, 양패구상의 결과가 초래될 것이고, 초나라가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것이다. 목희는 유명한 고육계(苦肉計)를 쓴다. 그녀는 상복을 입고, 네명의 자녀를 데리고, 마른 장작을 가득 쌓은 누대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진목공에게 발한다. 하늘에서 재난을 내려 두 나라가 서로 싸우게 되었다. 진나라 임금이 포로로 잡혀서 성내로 끌려들어오는 날이 바로 목희와 진목군의 자녀들이 불에타 죽는 날이 될 것이라고. 진목공은 이를 듣고 비교형량한 후, 이렇게 되는 것은 자기에게 손해라고 생각하게 된다. 멍청한 군주 하나를 붙잡아 죽이고서, 자신의 자식이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손해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참을 생각해보고는 진혜공을 용서해주기로 한다. 그리고, 국빈관에 모시고 국빈으로 대우했다.

 

초성왕, 초공왕, 초평왕은 각각 진(秦)나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로써 볼 때, 진나라가 초성왕때부터 강성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공왕 초평왕에 이르러서는 초나라가 진나라에 어느 정도 의탁하는 심리를 드러낸다. 초장왕은 각각 월(越)나라의 여인과, 진(晋)나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고, 초소왕은 제(齊)나라와 월나라의 군주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로써볼 때, 초장왕은 춘추시대의 패자였고, 초월의 혼인관계를 맺었다. 초소왕이 월나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삼은데서 오나라의 세력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晋)나라와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어느 정도 진(秦)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초소왕이 월나라여인과 결혼한 것에서는 군사동맹을 맺어 오나라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초나라는 여러 나라와 정략결혼을 했다. 초성왕은 위(衛), 정(鄭), 진(秦)의 세 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다. 초나라가 여러 나라와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춘추전국시대의 대국인 제, 노, 진, 진이나 소강국인 위, 월, 위(魏), 정, 소국인 채, 등, 파, 노, 강, 운등의 국가와 정략결혼을 맺었다. 이런 국가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어떤 국가는 초나라와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는데, 초나라가 이렇게 한 것은 여러가지 고려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중원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제후들은 초나라의 무력을 두러워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졸부를 보는 심정과 비슷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나라는 그들의 이미지를 바꾸어보려고 노력했다. 둘째는 외교책략인데, 군사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항상 무력을 쓰려면 국력이 너무 낭비되므로, 부인외교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셋째, 초나라는 천하를 쟁패하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그리하여 근교원공의 정책은 정략결혼에서도 잘 나타난다. 넷째, 초나라는 아주 복잡한 모순체였다. 초나라는 한편으로는 중원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를 "만이(蠻夷, 오랑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초나라는 민족적인 편견도 없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흉금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점은 그들이 정략혼인을 맺는 과정에서도 발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