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오패에 들어가던 진(晋)이 분열되어, 전국칠웅중 한(韓), 위(魏), 조(趙)의 세 나라로 나뉘어지는데, 역사상 이를 "삼가분진"이라고 한다. 지금도 산서성을 "진(晋)"으로 약칭하고, "삼진(三晋)"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가분진"은 춘추시대 후기 공실과 사가간에 전개된 격렬한 투쟁의 결과이다. 서주(西周)의 종법제도(宗法制度)하에서 주나라의 천자는 제후들에게 각 지역을 나누어 봉(封)해주고, 제후들은 자기의 통치범위내에서 다시 경(卿), 대부(大夫)에게 나누어 봉해준다. 경, 대부는 각각 자기의 봉읍(封邑)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본적으로 독립한 정치, 경제, 군사역량을 갖추게 된다. 그들은 귀족종족조직을 통하여 자기의 봉읍을 통치한다. 이렇게 제후국의 내부에는 "공실"과 "사가"의 구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공실은 제후인 국군(國君)을 가리키고, 사가는 경, 대부의 집안을 가리킨다. 서주시기와 춘추시기에 경, 대부의 봉읍은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춘추시기에, 서주이래의 사회경제질서가 파괴되기 시작한다. 제후국들이 세력을 확장하는 동시에 제후국내부의 경, 대부의 세력도 같이 발전한다. 그들이 통치하던 봉읍은 제후국내에서 하나의 독립된 할거왕국을 구성하고, 서로 합병하기도 한다. 어떤 세력이 큰 경, 대부의 경우에는 오히려 제후국의 정치를 조종하기도 했고, 제후국의 정권이 공실에서 사가로 이전되기도 했다. 이런 경, 대부들이 사회경제의 변화발전에 순응하던 진보세력이라면, 국군을 대표로 하는 공실은 구제도의 유지를 주장하는 완고한 보수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일찌기 춘추시대 초기에 진(晋)의 공실내부에서는 적계와 방계간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다. 진헌공(晋獻公)은 일족내의 여러 공자를 도살한다. 진헌공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사이에 다시 국군의 지위를 놓고 투쟁이 벌이지는데, 진문공(晋文公)이 즉위하면서 끝이 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진나라의 공실세력은 약화된다. 춘추시대 중엽, 옛 공족(公族)에는 겨우 란씨(欒氏), 양설씨(羊舌氏) 및 기씨(祁氏)등 몇개 집안만이 살아남는다. 이때 진나라의 경,대부의 집안 즉 "사가"의 역량은 점차 강화되었고, 계속하여 진나라의 공족들과 투쟁하였다.
진여공(晋勵公)때, "사가"를 아주 큰 위협으로 여긴다. 기원전574년, 진여공은 군사를 일으켜 극지(郤支), 극접(郤摺), 극기(郤錡)의 삼부를 몰살시키게 되는데, 이로써 인심을 크게 잃는다. 다음 해에 진여공은 피살된다. 진나라 중기이후, 진나라의 경(卿)의 지위는 19개의 경, 대부 집안에서 차지하게 되는데, 경의 직위를 가지는 통시에 군대를 통솔하는 장수가 되는 것이다. 이 십여개의 경,대부가족은 진나라의 정치, 경제 및 군사적인 측면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하루하루 힘이 커져갔다. 춘추시대 후기가 되면서 그들은 서로간에 합병을 거쳐, 한씨(韓氏), 조씨(趙氏), 범씨(范氏), 위씨(魏氏), 중행씨(中行氏), 지씨(智氏)의 여섯 개의 경대부가족이 남게 된다. 이들이 소위 육경(六卿)이라고 불리우는 집안이다.
육경은 진나라의 구귀족들과 계속 투쟁을 벌였다. 기원전550년, 범씨를 우두머리로 한 신흥세력은 연합하여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란영(欒盈)을 공격하고, 란영은 초나라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제나라로 망명한다. 제나라는 다시 그를 몰래 진나라의 사읍인 곡옥(曲沃)으로 돌려보낸다. 란영은 곡옥을 거점으로 하여, 진나라의 강도(絳都)를 공격한다. 신흥세력은 신속히 고궁(固宮, 진양공묘)을 점령하는데, 전투과정에서 노예인 배표(裴豹)는 자신의 노예해방을 조건으로 충성을 하하겠다고 맹서한다. 신흥세력은 그자리에서 배표의 관노비문서를 불태운다. 배표는 란씨의 역사(力士) 독융(督戎)을 죽인다.
범씨는 란씨에 대응하기 위하여 명령을 내리는데, "진문공이래로 국가에 공로가 있으면서도 자손이 관직을 얻지 못한 자는 관직을 얻을 수 있고 상을 받을 수 있다"고 공포한다. 이렇게 하여 사기를 올리고, 군대의 전투력을 끌어올렸다. 결과적으로 란씨를 대파한다. 란영과 그의 일당은 모두 주살당한다. 이후, 신흥세력은 계속하여 구귀족과 투쟁하게 되는데, 란씨, 극씨(郤氏), 서씨(胥氏), 원씨(原氏), 고씨(孤氏), 속씨(續氏), 경씨(慶氏), 백씨(伯氏)등의 구귀족들은 계속 타격을 입고, 노예 또는 평민으로 강등된다. 진나라의 공족이 소멸되면서 진나라의 정치는 완전히 경대부의 집안들이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신흥세력은 다시 기씨, 양설씨를 소멸시킨다. 기씨의 영지는 7개 현으로 나누고, 양설씨의 영지는 3개현으로 나누어 한, 조, 위씨의 자제와 재능있는 자를 보내어 현대부(縣大夫)로 임명했다. 공실과 사가의 전투는 곧 구귀족과 신흥세력의 투쟁이었다. 구귀족의 소멸은 진나라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구귀족과 투쟁하는 동시에, 신흥세력은 내부적으로 격렬하게 투쟁했다. 당시 신흥세력은 모두 경제발전에 유리한 혁신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었는데, 실행하는 정도는 각 집안마다 차이가 컸다. 무제(畝制, 토지단위제도)에 있어서, 육경은 모두 "백보(百步)를 1무로 하는 제도"는 벗어났다. 그러나, 범씨, 중행씨의 무제는 한, 조, 위의 무제처럼 크지는 않았다. 범씨, 중행씨의 무제는 1무가 160보였고, 지씨는 180보였다. 그러나, 한, 조, 위씨는 200보였다.
당시 농민들이 경작하는 토지면적에는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 무제가 크면 실제경작면적이 큰 것이다. 무제가 작으면 실제경작면적이 작은 것이다. 무제를 확대하는 것은 생산을 늘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범씨, 중행씨는 무제에 대한 개혁이 철저하지 못했고, 노예제의 흔적을 많이 남겨두었으며, 농민에 대한 착취가 심했고, 정치적으로도 전횡했다. 그리하여 조씨등과의 투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조간자(趙簡子)는 민중들의 마음을 얻는데 노력했다. 그는 윤탁을 진양(晋陽,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 서남쪽)에 지방관으로 보냈는데, 윤탁은 부임한 후, 조간자의 지시에 따라 농민부담을 조정하고 감소시켜주었다. 나중에 진양은 조씨의 확실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조간자는 또한 전공을 세운 자를 장려하고 공을 세우면 노예에서 해방시켜주는 노력도 기울였다. 기원전493년, 범씨, 중행씨는 정국(鄭國)과 연합하여, 한, 위, 조씨와 전투를 벌였다. 조간자는 병사들 앞에서 맹서했다. 만일 전투중에 전공을 세우는 자가 있으면 상대부에게는 현을 상으로 내리고, 하대부에게는 군을 상으로 내리며, 사에게는 전10만무를 내리고, 서인과 공상업자에게는 사(士)로 지위를 올려주며, 노예는 석방시켜준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군대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조간자는 인재선발에도 신경을 썼다. 그리고 신하들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주도록 요청했다. 조간자는 인심을 얻었으나, 범씨, 중행씨는 인심을 잃었다. 이것은 조씨가 성공할 수 있었던 큰 요인이다. 조씨는 한씨, 위씨와 연합하여 범씨, 중행씨와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490년, 범씨, 중행씨는 실패후, 진나라를 도망쳐 빠져나간다. 조간자는 한단(邯鄲)을 차지하고, 나머지 지방은 진나라 공실의 소유로 한다. 기원전 485년, 지, 한, 조, 위의 4가족은 연합하여 원래 범씨, 중행씨가 가지고 있던 토지를 나누어 가지려 한다. 진출공(晋出公)이 이에 응하지 않자, 4집안은 바로 진출공은 내쫓아 버린다. 지씨(智氏)는 진애공(晋哀公)을 옹립하고, 스스로 범씨, 중행씨의 토지를 차지해버린다. 지, 한, 조, 위의 4집안은 진나라의 가장 강대한 세력이 되었다.
당시 4집안의 권력자는 각각 지백요(智伯瑤), 조양자(趙襄子), 한강자호(韓康子虎), 위환자구(魏桓子駒)였다. 지백의 세력이 가장 강하였다. 진나라의 정치는 모두 지백이 한마디 하면 그대로 결정되었다. 그는 진나라를 먹어치우려고 했으나,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 다른 몇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썼다. 그는 진군의 명을 받아, 월국을 공격한다는 것을 명목으로, 매 집안으로 하여금 100리의 토지와 호구를 진공실에 내놓으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사실 자기가 가지겠다는 것이었다. 한강자와 위환자는 모두 내놓으라는대로 토지와 호구를 내놓았다. 그러나, 조양자는 지백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래서 지백은 한, 위의 두 집안과 연합하여 조씨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다른 두 집안에는 조씨를 멸망시킨 후 조씨의 땅을 셋이 공평하게 나눠갖기로 합의한다.
기원전455년, 지백요는 중군을 이끌고, 한씨는 우군을, 위씨는 좌군을 이끌고 조씨를 쳐들어간다. 조양자는 중과부적을 깨닫고 진양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진양을 근거지로 하여 세 집안에 대항한다. 진양은 조씨의 원래 영지였고, 윤탁등이 잘 다스려 민심이 조씨에 쏠려 있었다. 그리하여 조양자에게 매우 유리했다.
지, 위, 한의 세 집안의 병마는 진양을 포위했다. 그러나, 조씨의 군대는 사기가 왕성했고, 굳건히 성을 지켰다. 세 집안이 합쳤지만 일거에 점령하기는 어려워졌고 쌍방은 2년을 대치했다. 셋째 해, 즉 기원전453년이 되었다. 지백은 진수(晋水)를 끌어들여 진양성을 물에 잠기게 하려 했고, 며칠 후 진양성은 몇 자만 물이 더 불면 온 성이 물에 잠길 찰나가 되었다. 성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어린아이를 바꿔 먹기도 하였다. 신하들도 이반현상이 나타나고, 예의도 태만해졌으며, 형세가 아주 위급했다.
조양자는 바로 상국(相國) 장맹(張孟)으로 하여금 밤에 성을 빠져나가게 하여 3집안의 연맹을 와해시키고자 하였다. 장맹은 한강자와 위환자에게 "순망치한을 아느냐. 조나라가 망한 후에 다음 차례는 너희들이다. 한, 위가 참전한 것은 원래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고, 지금 지백이 전횡하고 발호하는데, 지백이 조나라를 멸한 후 창끝을 너희들에게 겨눌 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리하여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한, 위는 지백을 배반하고 조양자와 연합한다. 어느 날 밤, 한, 조, 위의 세 집안은 물로서 지백을 역공하여, 지백의 군영을 수몰시켜 버린다. 지백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쳤으나, 조양자에게 붙잡혀 살해된다.
그리하여, 조양자는 지씨 일족을 멸한 후, 한, 조, 위의 세 집안이 원래의 지씨의 토지와 호구를 균분하여 나눠갖는다. 그리고는 각자의 정권을 건립한다.
기원전 438년, 진애공이 죽고, 진유공(晋幽公)이 즉위한다. 이때 진나라는 완전히 쇠약하여, 권신을 두려워하고, 오히려 신하인 한, 조, 위에 찾아가서 예방하는 형국이었다. 한, 조, 위는 진나라의 토지를 나눠갖는다. 강성(絳城)과 곡옥(曲沃)의 두 곳만 진유공에게 남겨준다. 이후 한, 위, 조는 삼진(三晋)이라고 불리웠다.
기원전403년, 주열왕(周列王)은 정식으로 한, 조, 위를 제후로 봉한다. 기원전 376년, 한애후(韓哀侯), 조경후(趙敬侯), 위무후(魏武侯)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나머지 토지까지 나누어 갖는다. 진정공(晋靜公)은 폐위되어 평민이 되니, 진나라는 완전히 한, 위, 조의 세 집안으로 대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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