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앙(劉仰)
이전에 사람들은 중국의 하(夏)왕조, 상(商, 殷이라고도 함)왕조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한 적이 있다. 나중에 은허(殷墟)가 발굴되면서, 상왕조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어졌다. 그러나, 하왕조가 존재하였느냐에 대하여는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 이런 의심을 품는 이유는 하나의 간단한 서방이론에서 비롯된다: "고고학적 증거가 없으므로 확실히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방의 이 이론은 예로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서방의 근현대고고학이 성립된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근대 유럽에서의 일련의 고고학적 발견은 이런 이론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서방에서 그리스문명에 대하여 얘기할 때, 문자의 기재외에 고고학적인 발견이 이를 보완해주고 있다. 가장 뚜렷한 것은 트로이이다. 오랫동안 역사시기에서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에 나오는 트로이가 진실로 존재했었는가에 대하여는 계속 의문이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자주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에 나오는 트로이전쟁은 문학작품으로 인식했고, 진실한 역사로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슐레이만이라는 독일인은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가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진실한 역사라고 믿었고,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 트로이유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찾아냈고, 현재는 터키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트로이 이외에 그리스에는 아테네유적도 있고, 크레테유적도 있고, 미케네유적도 있다. 이런 유적들은 각각 "크레네문명", "미케네문명"등으로 불리운다. 서방의 근대고고학의 일련의 성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대문명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고고학적인 증거는 기본적으로 모두 금기(金器), 청동기등 귀금속제품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서방의 이런 고고학과 문명관계에 대한 논단은 유럽의 지중해지역에서는 적용가능하다고 본다. 중국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본다. 지중해지구는 소규모도시가 대량의 금은재보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하나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특수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크레테건, 미케네건, 아테네건 아니면 트로이이건 그들은 모두 하나의 도시이고, 면적범위가 넓지 않았다. 현대고고학에서는 트로이유적에서 당시 거주하던 사람은 2000명가량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의 학자인 Coulange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도시에서 시민권을 보유한 사람은 200-350명사이였다고 본다. 즉, 고그리스도시는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인구총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수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수만이라고 한다. 호머의 서사시에서 트로이를 묘사한 것을 보면 당시 트로이를 통치하는 것은 하나의 씨족으로 보이고, 국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의 자그마한 도시에서 그렇게 많은 금은재보가 발견되는 것은 무었때문인가? 왜냐하면 고대그리스가 보유한 문명은 주로 무역경제의 위에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트로이라는 소도시가 주변지구의 농업인구에만 의존했더라면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많은 재보를 보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트로이가 자신의 재부창조능력에만 의존했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많은 부를 보유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트로이의 재부원천은 무역이었고, 그는 당시 유럽,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무역요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재산은 무역화물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중국의 말로 하자면, "이곳을 지나가려면 통행세를 내라"는 것이다. 그리스연합군이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트로이를 함락시키려고 했던 것은 헬렌이 끌려간 것과 같은 간단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미녀 헬렌이 붙잡혀간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연합군이 트로이를 공격하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대량살상무기를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연합군이 트로이를 공격하 기본 목적은 그 재물이 흐르는 통로를 장악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트로이 이외에, 고대그리스의 다른 고고학적인 발견을 보더라도, 크레테문명, 미케네문명은 모두 무역경제의 결과물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중해의 자그마한 섬 하나에 스스로 광산도 없으면서, 스스로 물산을 많이 생산하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그렇게 많은 금은재보를 확보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무역경제의 교환수단은 당시 통일된 화폐가 없던 그리스에서는 금은등 귀금속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서방문명이 황금등 귀금속을 중시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중국에 있어서는 무역은 시종 경제활동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해다. 농민의 거래라는 것은 생활필수품을 교환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고대사회의 가장 주요한 재산은 무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도시는 중국고대사회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특히 초기의 하(夏), 상(商), 주(周)시대에는 그러했다. 이 두가지 서로 다른 재부의 원천은 먼저 금은등 귀금속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로 나타난다. 당시 중국인들은 옥석(玉石)을 금은(金銀)보다 훨씬 중시했다. 옥석은 무역의 중개물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무역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무역중심인 도시도 발달하지 않았다. 자연히 도시에 대량으로 금은재보가 집중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형도시의 유적에서 금은재보를 보유한 수량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고대문명을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적당하지 않다. 은허의 경우에도 청동기등의 물품이 출현하였지만 이것은 도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묘에서 나온 것이다.
지중해문명은 무역을 주요한 경제원천으로 삼았고, 이는 소형도시국가의 무역경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단기간내에 부가 집중되는 현상을 낳았고, 동시에 주변사람들의 질시를 받아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것은 다시 한번 번영했던 도시문명이 돌연 중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현상은 현대고고학자들이 대량의 금은재보를 작은 도시문명유적에서 찾아낼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하나의 문명의 존재가 하나의 도시의 소실과 더불어 소실되지는 않았다. 중국고대사회의 재산은 주로 무역으로 인하여 도시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농업으로 인하여 농촌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하나의 도시유적이 보유한 금은재보를 가지고 문명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노력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지중해지역의 무역경제에 대하여 말하자면, 도시집중은 문명의 전체 내용을 나타낸다. 도시와 농촌의 구벌은 바로 문명과 야만의 구별이다. 그러나, 중국의 농업문명에서는 도시는 주로 관리기능을 가질 뿐이다. 문명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농업문명에서, 도시와 농촌의 구별은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농업문명의 정수는 농촌에서 보유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현재 여전히 볼 수 있는 명청시대의 민가촌락에서 그 정치함과 우아함을 볼 수 있고, 이것은 같은 시기의 도시의 민가에 전혀 뒤지지 않는 것이다.
주나라는 당연히 역사에 포함된 시대이다. 그러나, 주나라때의 도성과 묘지유적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 주나라때의 금은재보가 발견되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주나라가 완전한 문명과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데 문제로 되지 않는다. 상나라때의 은허는 도시유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묘지이다. 더 이른 시기의 하왕조는 만일 우리가 여전히 서방의 고고학적인 개념에 따라, 하나의 소도시유적의 금은재보를 가지고 문명을 형량하고 판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제대로된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서방의 지중해문명을 연구하면서 얻어낸 고고학과 문명의 관계를 그대로 하왕조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고학적인 발견중에서 하남 언사(偃師)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가 있다. 연대상으로 보면 이리두문화는 하왕조에 속한다. 지중해의 각종 '문명'과 비교하자면, 중국인들은 이리두를 그저 '문화'라고밖에 부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지중해의 각각의 '문명'유적에서 보유한 인구는 수천명의 규모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리두문화'의 규모는 개략 15만명의 사람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사람은 더 많게 보기도 한다. 그리스의 '도시문명'과 비교하면, '이리두문화'가 비로소 진정한 도시나 도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이리두문화'가 바로 하나라의 도성이라고 선포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서방근대고고학의 영향을 받아서, 이리두에서는 대량의 귀금속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리두문화'의 성격에 대하여, 서방고고학이 만든 지중해고고학의 틀을 버려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중국고대시기의 역사증거에 대하여, 그저 진시황과 같은 폭군이 출현해야만, 비로소 재부가 고도로 불합리하게 집중하게 되고, 비로소 오늘날 서방고고학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순과 같은 '현군'들처럼 폭정을 행하지 않은 성현들은 우리가 영원히 서방고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금은재보상의 고고학적 증명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중국의 벼경작은 이미 1만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최초의 사직품(絲織品)도 이미 7천년전에 출현했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에 도대체 언제부터 금은등 귀금속을 중시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하나라 사람들은 금은을 정말 분토처럼 본 것은 아닐까
종합하면, 서방고고학이론의 어떤 이론은 이것이 생겨난 배경이 지중해도시국가의 무역경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모델은 중국고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이론을 간단하게 도식적으로 중국에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하왕조의 도성을 찾거나 확인하는데, 서방의 고고학이론을 그대로 빌려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리두문화"가 하나라의 도성으로 인정될 것인가 아니냐의 점은 진정한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결론을 내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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