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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이시진(李時珍)의 표준화상에 관한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7. 3. 27.

장조화(蔣兆和)가 그린 이시진상

 

북경의과대학이 보관하고 있는 이시진상

 

현재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있는 이시진의 모습은 원래 이시진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비교적 진실한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이시진의 화상은 반세기동안 전혀 공개되지 못하고 있다.

 

1950년대이후 지금까지 중국내, 외를 불문하고 우표건, 학술간행물이건, 티비이건, 조각을 하건 이시진의 모습으로 채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장조화'가 창작한 예술작품인 '이시진상'이다. 왜, 장조화의 '이시진상'이 표준상으로 채택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일까?

 

1994년, 북경의과대학 의학사연구센터의 주임이며 저명한 의학가인 정지범(程之範) 교수는 이와 관련된 뒷이야기를 밝힌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진짜 이시진상이 햇볕을 보지 못하고, 장조화가 그린 이시진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53년 봄의 끝자락에, 나는 신문에서 뉴스 하나를 보았다. 바로 소련의 모스크바대학의 신교사를 낙성했는데, 그 복도에 세계의 유명한 과학자의 초상을 대리석에 새겨놓았는데, 그 중에는 중국의 의약학자인 이시진과 수학자인 조충지(祖沖之)가 들어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즉시 이시진상이 북경의과대학이 보존하고 있는 이시진상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의사학과(醫史學科)의 주임인 이도(李濤) 교수와 상의한 후, 서신을 보내어 물어보았다. 오래지 않아, 모스크바대학에서 회신이 왔는데, 이 이시진상은 중국과학원의 곽말약 원장이 제공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 날, 이도 교수는 즉시 나에게 곽말약 원장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알아오라고 했다. 마침 곽말약은 출장중이었다. 곽말약의 비서는 이시진상에 대한 정황을 알려주면서 두 가지 의견을 얘기했다.

 

첫째, 당시 모스크바대학에서는 급하게 이시진상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과학원에는 보관하고 있는 이시진상이 없었다. 그래서, 곽말약은 장조화 선생을 초청해서, 명나라때 복식과 관려자료를 건네주고 이시진상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모스크바대학으로 보냈다.

 

둘째, 북경의학원이 보관하고 있는 이시진상은 봉존(封存)해주고, 다시 공개하지 말아달라. 이 일은 기밀유지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이시진의 진짜 모습을 그린 이시진상은 북경의과대학에서 40여년간 햇볕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이 내용은 1994년 12월 31일자 건강보에 실린 내용임)

 

장지범 교수는 이 내용에 대하여 추가로 2001년 1월 9일 아래와 같이 회신한 바 있다.

 

"동정상 주임:

 

이시진화상에 관한 일은 건강보에서 94년에 밝힌 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신으로 혹은 내방하여 물어본 바 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장조화가 그린 것에서 바꾸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전인대상무위원회 및 부위원장에게 서면으로 질의한 바 있다. 회신에서는 현재 장조화가 그린 이시진상이 이미 국제적으로 공인되었으니, 이것을 고친다면 국가이미지에 문제될 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고치지 말라. 그리고, 북경의과대학에 보존하고 있는 이시진상은 비록 연대가 오래되고, 명나라때 글에서 기술한 용모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바로 이시진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1920년대 1930년대의 의학관련서적에서는 모두 이 것을 사용했다). 그러니, 개인의견으로는 고칠 필요가 없다고 본다. 1950년대초에 소련이 급히 과학자상을 만들려고 했고, 중국과학원에 이시진상을 요청했다. 당시 곽말약 원장은 장조화에게 요청해서 명나라때의 의복과 모자를 근거로 이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장조화는 이 임무를 부여받은 후에 당시 북경4대명의로 이름있던 초룡우(肖龍友)를 모델로 하여 이시진상을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물어보시니 이렇게 답변드리는데, 외부로 발설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정지범. 2001. 1. 9"

 

주: 1935년, 국민당정부는 중의조례를 반포하였고, 시험방법과 절차등을 기재하였다. 당시 북경의 제1차시험때 시금묵(施今墨), 초룡우(肖龍友), 공백화(孔伯華), 왕봉춘(汪逢春)의 네 사람을 주시험관으로 추천했다. 그래서 이 네 사람을 "북경4대명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초룡우(1870-1960)는 1934년 공백화와 함께 '북경국의학원'을 차렸고, 15년간 지속했다. 그리고, 중화의학회 부회장, 중국과학원 생물지학부 학부위원, 중앙문사관 관원, 위생부 중의연구원 명예고문등의 직을 지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