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추우(余秋雨)
1.
귀주, 운남, 광서의 소수민족지역을 여행하면 자주 놀랄만한 아름다움에 깜짝 놀라곤 한다. 산수도 아름답고, 마을도 아름답고, 사람은 더욱 아름답다. 들리는 말로는 많은 화가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고, 그 와중에서 예술의 등급이 몇단계 승격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내 친구인 정십발(程十發), 정소광(丁紹光)이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쑥스러운듯 묻는다: "이곳에서 어디에 미녀가 가장 많습니까?"
사실 뭐 쑥스러워할 것도 없다. 이것은 중요한 미학적인 문제이다. 미녀 한 명은 이미 인체의 아름다움의 정화가 모인 것인데, 미인들이 대규모로 자연스럽게 배출된다면 그것은 인간세상의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 원인은 아마도 심오하고도 신비스러울 것이다.
어디에 미녀가 가장 많은가? 내가 진지하게 비교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귀주성(貴州省) 뇌강현(雷江縣)의 서강묘채(西江苗寨)에서 한 무리의 미녀군단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날은 마침 이 곳의 "흘신절(吃新節)"이었고, 여름수확이 막 끝난 때였으며, 햅쌀이 이미 나와 멀리서 가까이서 모두 모여들어 축하하는 명절이었다. 긴 복도에는 길게 끝이 보이지 않는 낮은 탁자를 놓아두고 촌민들은 양쪽에 앉아서 먹고 마셨다. 긴복도의 바깥 광장에서는 이미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은 원래 보통의 마을축제일이다. 그런데, 눈앞에서는 특이한 광채가 떠도는 것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길다란 낮은 탁자의 곁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아름답고 웃는 얼굴이 보였다. 광장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이나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아름다웠다.
서강묘채는 제법 컸다. 약 천호정도 되며, 4,5천명이 산다. 그러다보니 이 정도로 규모있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띄워주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필자의 미에 대한 기준은 항상 높은 편이다. 일찌기 상해희극학원 원장을 맡고 있을 때 연기학과의 학생을 모집한 바 있었으므로 기준은 그 때부터 이미 높아져 있었다. 나중에 여러번 "유니버셜 미스차이나선발대회"의 심사위원장으로 참가한 바 있어서 눈은 더욱 높아졌다. 얼마전 자주 미디어에서 얘기하던 적지 않은 "미녀작가"에 대하여 어느 기자가 질문했을 때도 나는 '작가는 되기 쉽다. 그러나 미녀인지는 말하기 어렵다'고 대답한 바 있다. 그러므로 필자가 서강묘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데 대하여 여러분은 믿어도 좋다.
서강묘채의 여자아이들도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미소로 다른 사람의 칭찬에 감사한다. 그러나, 주변에 예쁜 여자아이들이 너무 많다보니 그들은 이것때문에 부끄러워한다거나 교만해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이를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지도 않는다. 마을의 남자아이들도 잘 생겼다. 그러나, 여자아이들과 비교하면 차이가 그래도 크다. 그렇지만 모두 만족하는 표정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예쁜 여자아이들의 첫번째 배우자후보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은 이 푸른 산에 둘러싸인 지방을 좋아하고, 자기의 아름다움이 외롭게 외부에서 유랑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모두 편안해 보인다. 그녀들과 비교하자면, 바깥 도시에 그녀들보다 훨씬 못한 여자아이들은 매일 거울을 보고 다듬고 화장을 하며 예쁜 척하고 있지 않은가.
적지 않은 중원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보기 전에는 소수민족의 여자아이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산과 들의 아름다움, 변방의 아름다움, 기묘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기 쉽상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강묘채의 여자아이들은 아주 단정하고 예쁘며, 중화문명의 주류인 숙녀의 이미지에 가깝다. 만일 은장식이 짤랑거리는 소수민족복장만 아니라면, 그녀들의 용모는 장안의 이원(梨園)이나 양주의 부잣집에서 보일 모습이다.
이것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데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들에게 집안혈통을 물어봤을 때였다. 그녀들은 놀랍게도 웃으면서 자기는 "치우(蚩尤)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는가?
2.
실제 아름다운 그녀들과 "치우"의 두 가지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치우라면 중화문명사상 첫번째 전쟁에서의 패배자가 아닌가. 그를 물리친 것은 바로 중국인의 공동조상인 황제(黃帝)였다. 그리하여, 그는 최초의 '반면인물(反面人物)'이 되었다. 치우는 어떤 때에는 하나의 부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 부락이 바로 하나의 '반면족군(反面族群)'이 되는 것이다.
승리자의 말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승리자는 항상 패배자를 요마로 묘사한다. 치우는 이렇게 요마(妖魔)로 묘사된 중국역사상 최초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요마화의 과정은 어떠했는가? <<용어하도>>에는 이렇게 말한다. 치우와 그의 형제들은 모두 "짐슴의 몸뚱이에 사람의 말을 하고 있고, 구리로 만든 머리에 쇠로 만든 이마를 지니고 있다. 모래돌맹이를 먹으며, 병장기 도, 극, 대노를 만들어 천하에 위력을 떨쳤다". <<술이기>>에는 이렇게 말한다. "치우는 사람의 몸에 소의 발굽을 가지고 있고, 눈이 네 개이고 손이 여섯 개이다" <<현녀전>>에는 이렇게 말한다. "치우는 변환이 무궁무진하다.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며, 구름을 만들고 안개를 뿜는다. 그리하여 황제의 군대가 미혹에 빠지게 만들었다" <<지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치우는 큰 안개를 3일간 만들어 군대가 모두 미혹에 빠졌다"
이런 요마화의 말들은 <<사기정의>> <<태평어람>> <<광박물지>> <<고금주>> <<초학기>>등의 주요 저작들에도 인용되어, 영향을 후대에까지 널리 미쳤다.
더욱 심한 것은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문자를 만들 때, 두 자의 낮추는 글자를 이 요마화된 패배자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바로 "치우"이다. 어떤 학자는 권위있는 한자사전을 뒤져서 이 두 글자의 의미가 패(悖, 이그러지다), 역(逆, 거스르다), 혹(惑, 미혹시키다), 류(謬, 그릇되다), 난(亂, 어지럽다), 이(異, 다르다), 열(劣, 모자라다), 누(陋, 누추하다), 천(賤, 비천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고, 그 사이에는 적의와 원한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바로 문자의 첫번째 희생자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보아온 역사서적에서는 모두 치우를 고대시대에 '횡행패도(橫行覇道)'했던 자로 묘사하고 있다.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수천년을 내려온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중국인들이 조상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오늘 날, 이런 주장과 여론이 한꺼번에 뒤집히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서강묘채의 이 여자아이들로부터 "우리는 치우의 후손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아주 편안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런 표정은 우리의 관성적인 사고에 어떤 새로운 일깨움을 주는 것은 아닐까?
3.
이 토지에서는 일찌기 남자는 농사짓고 여자는 물레질하며, 형벌도 전쟁도 없는 '신농지세(神農之世)'를 구가한 적이 있다. 이 시대는 결국은 부락간의 전쟁시대로 대체되었다. 모든 부락은 멸망을 피하기 위하여 씨족혈연을 기초로 하는 연합을 구성했고, 역량을 확대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서로간의 전쟁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오랫동안 대립해온 황제와 염제도 아마 먼 친척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치우는 아마도 염제의 후예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먼저 황제와 염제가 싸웠다. 이것이 판천지전(阪泉之戰)이다. 염제가 크게 패하여 망하였고, 부족은 황제의 부족에 흡수되었다. 이 과정이 순조로워 황제는 아주 만족했고, 염제의 부족들을 아주 잘 대해주었따. 그리하여 승리자와 패배자를 한데 묶어 함께 조상으로 칭하게 되었고, 이 부족은 이후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고 스스로 부른다. 다만, 왜 황제는 또 다른 적수인 치우의 부족을 편입하면서 자신의 승리를 상징하는 공동의 족보에 올리지 않았는가? 아마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치우와 황제가 싸웠던 탁록지전(涿鹿之戰)이 정말 힘들게 싸운 전쟁이었고, 황제는 이것을 생각하면 두려웠고, 기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남아 있는 기록을 모아보면, 황제가 염제를 이길 때는 겨우 "삼전(三戰)"을 거쳤을 뿐이다. 나중에 천하를 평정하는데도 겨우 "오십이전(五十二戰)"을 거쳤다. 그러나, 치우와의 전쟁에서는 연속으로 칠십이전(七十二戰)을 하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서, 구천현녀(九天玄女)에게 방법을 물었다. "저는 만전만승(萬戰萬勝)하고 만은만닉(萬隱萬匿)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황제가 이렇게 물은 것을 보면, 싸워서 이기는 것뿐아니라, 져서 숨는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때 그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구천현녀는 황제에게 제승신부(制勝神符)를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구천현녀가 "여발(女魃)"을 보내어주어 전쟁터의 분위기를 황제에게 유리하게 바꾸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최종적으로 지남차(指南車)를 이용하여 치우에게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이 전쟁은 아주 참혹했고, 위기일발이었다. 아마도 치우가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중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황제와 사관은 치우를 요마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한가지는 황제가 오랫동안 공격했음에도 무너뜨리지 못했던 이유를 납득가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두번째는 정의를 자기 편이라고 하여, 후세인들이 만일 치우가 승리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치우가 이겼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필요가 아주 컸다. 왜냐하면 치우의 부락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는 구려족(九黎族)의 우두머리였고, 구려족은 지금의 산동(山東) 동서남부, 강소(江蘇)의 북부, 산서(山西), 하북(河北), 하남(河南)의 황하유역에 생활하고 있었으며,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여도 죽여도 다 죽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할 수없이 그들에게 너희의 예전 우두머리는 요마이다. 그러니, 지금의 통치자인 나의 말을 따르라고 하여야 했던 것이다.
황제가 이렇게 한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가 채택한 것은 중원대지를 통일하는 필연적인 조치였다. 만일 염제 또는 치우가 통일했더라도, 아마 비슷한 전략을 채택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악명을 한 몸에 뒤집어쓴 치우의 진정한 최후를 생각하면 가슴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그는 황하문명의 창조자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찌기 하남성 신정에서 CCTV가 생중계하는 황제제사대전을 주재한 바 있다. 그리고 홍콩봉황TV의 유장락, 왕기언 선생과 함께 섬서에서 황제릉을 참배한 바 있다. 다만, 치우의 혼령은 도대체 어디에 묻혀 있는가?
20여년전에 곡진 선생이 <<하북사범학원학보>>에서 발표한 글에서 황제와 치우의 전쟁장소는 분명 하북성 탁록현 공산향 삼보촌의 북쪽에 고성유적지 동북방의 평지일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여러 고서적을 참고하고, 현장을 시찰하여, 노력을 많이 들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땅이 너무 좁은 곳이다.
<<황제내전>>의 기재에 의하면, "황제가 치우를 토벌하는데 현녀가 황제를 위하여 기우고(夔牛鼓) 80을 만들었는데 한번 울리면 오백리에 미쳤다. 연속으로 울리면 삼천팔백리에 미쳤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단위는 당연히 과장이 있으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전쟁의 규모가 크고 지역이 넓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치우는 결국 패전했고, 포로가 되어 죽었다. 그 광경은 아주 장관이었다. 그리고, 이런 장관인 광경은 아마도 넓다른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산해경. 대황남경>> 및 정현의 주석에는 치우가 황제에게 포로로 잡힌 후 나무로 만든 형구 질곡(桎梏, 발을 채우는 것이 질, 팔을 채우는 것이 곡이다)을 목에 채워서, 지금의 하북성 북부의 탁록현에서 지금의 산서 서남부의 운성지역까지 압송했다. 이 길은 매우 길다. 하북성의 상당부분을 통과해야 하고, 산서성의 대부분을 통과해야 한다. 치우의 팔다리는 질곡에 의하여 상처가 깊었고, 질곡에는 치우의 피가 배었다.
왜 먼거리를 압송해갔는가? 군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각지역의 민심을 자기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다.
종착지는 운성현의 남쪽인 중조산(中條山) 북록의 한 곳이다. 그곳은 치우를 처형한 형장이다. 처형방식은 "신수해할(身首解割)"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 지방은 오랫동안 해주(解州)로 불리운다.
치우가 피살된 후, 질곡은 형을 집행한 사람이 벗겨내어 들판에 버렸다. 이 질곡은 원래 오랫동안 치우를 압송하는데 사용되면서 피가 베어 있었고, 이때는 더욱 선혈이 선명했다. 질곡은 들판에 버려져서 금방 뿌리를 내렸고, 단풍나무로 성장했다. 단풍은 피처럼 붉었다.
이때부터 더욱 아름다운 전설들이 나타난다.
치우가 죽은 곳에는 하나의 호수가 생겼는데, 호수의 색깔이 피빛이고, 짠맛이 난다는 것이다. 송나라때 과학자인 심괄의 <<몽계필담>>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해주의 소금못은 방원 백이십리이다. 오랫동안 비가내리고 네 개 산의 물이 모두 여기에 모여도 넘친 적이 없었다. 가뭄이 크게 들어도, 마른 적이 없었다. 색깔이 붉고, 판천의 아래에 있으므로 민간에서는 "치우혈"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연이 겹쳐서 이루어진 전설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대단하다.
치우가 죽은 후, 유체는 다시 천리를 여행하여, 현재의 산동성 서부의 황하북안에 도착한다. 이곳은 구려족이 거주하는 곳이다. 왜 이렇게 긴 장례길을 걸었는가? 한가지 주장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치우의 옛부족들에게 치우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도는 것을 막기 위ㅏㄴ 것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은 황제가 인자하여, 자기의 적수를 고향에 묻히도록 해주었다는 것이다. 다만, 아무리 인자하더라도 후환은 막아야 하여, 머리와 몸을 분리하여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곳은 상당히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이 점에 관하여, 치우의 영혼은 분명 분노했을 것이다. <<황람. 총묘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치우총"은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 안에 있다. 높이가 칠장이고, 백성들은 10월에 제사지낸다. 붉은 기운이 비붉은 비단처럼 나와서 백성들은 "치우기(蚩尤旗)"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천상학(天象學)에서도 "치우기"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구름이 위는 누렇고 아래는 하얀 것을 말한다. <<여씨춘추>>에 이런 기록이 있다.
보라, 치우는 분노를 구름으로 표현했다. 하늘마저도 그를 다르게 대접한 것이다.
당시 전쟁에 대한 기록중 하나는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날, 황제의 군대는 치우를 포위했고, 그를 말에서 끌어내렸으며 질곡을 채웠다. 치우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전투마의 고삐를 풀었다. 이것은 장수가 자기의 전우와 고별하는 것이다. <<제왕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곳에는 바로 호기있는 지명이 붙어 있는데 바로 "절비지야(絶轡之野, 비는 고삐임)"이다. 필자는 일찌기 대만의 <<역사학간>>에서 역사학자인 송림 선쟁이 이 지명에 대하여 쓴 하나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러한 글이 역사논문에 등장한 것이 좀 의외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송림선생의 억누르기 힘든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는 이렇게 적었었다:
"절비. 고삐를 끊는 것이다. 한때 치우를 태우고 천하를 달리던 강인한 전마는 선혈이 사방에 뿌려있고 시신이 가득한 붉은 색 황야를 밟고 서서 동청색의 하늘에서 장막이 내리워질 때, 차가워진 피의 광야에서 장소비명(長嘯悲鳴)하고 있다"
중화오천년문명역사의 첫번째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옛날의 호탕한 기운을 접하면서 아무리 엄격한 학자라도 호탕한 붓을 놀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붉은 황야의 땅끝에서는 역사와 전설과 문학은 경계를 확실히 나누기 힘들 것이다.
4.
나는 서강묘채의 두 젊은 여자드에게 물었다: "너희가 치우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냐?"
이것은 그저 장난치는 물음이었고,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녀들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생각도 못하게 그녀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쟁에서 져서 계속 도망친 것이지요. 황하유역에서 장강유역으로, 다시 이곳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조정의 관병은 계속 쫓아오고, 우리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된 겁니다"
말을 다 하고는 다시 웃었다. 그렇게 가벼운 표정으로 그렇게 잔혹한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 나의 주의를 끌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한번 물었다: "정규 역사서에는 치우의 후예가 이곳으로 이전해왔다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데, 너희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느냐?"
"있어요" 그녀들은 여전히 즐겁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전래되어 불리워지는 묘족의 사시(史詩)가 있는데, <<풍수가(楓樹歌)>>입니다. 우리 묘족의 조상인 강앙(姜央)은 바로 단풍나무(楓樹)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대로 단풍나무를 숭배하고 베지 않고 있습니다. 단풍나무가 바로 치우의 질곡이라는 걸 아세요?"
나는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 "알았다"고 연이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속에는 황하의 가까이에서 질곡이 단풍나무로 바뀌는 놀라운 광경이 떠올랐다.
그녀들은 또 말했다: "조정은 우리를 추적해서 붙잡지 못했으니 쓰지 못한 것이구요. 우리 묘족은 문자가 없으니 기록을 못한 것이예요. 우리는 단풍나무만 기억하면 돼요. 그게 역사니까요"
그녀들과 헤어진 후 필자는 서강묘채의 돌계단길에서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글로된 역사는 실제로 너무나 중요한 내용을 빠트리고 있는 것이다. 보라. 중화문명의 최초의 승리자와 패배자의 역사도 그저 절반 정도밖에는 남아있지 않지 않은가.
겨우겨우 남아 있는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치우가 패배한 후, 그의 부하인 구려족은 황제에 의하여 개편되었다. 대체로 선, 악의 두 부류로 나뉜 것같다. "선한 류"는 추로(鄒魯)의 땅에 보내는데, 지금의 산동성 남부이다. 나중에 공자, 맹자의 고향이 된다. "악한 류"로 분류된 사람들은 북방으로 유배보낸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은 흉노와 연결된다. "선한류"이건 "악한류"이건 모두 자신을 구려의 후예로 기억한다는 점이다. 바로 여민(黎民)이다. 우리나 나중에 습관적으로 말하는 "여민백성(黎民百姓)"도 이와 관계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점은 치우의 부하들이 모두 남으로 도망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도 상당한 부분은 황제의 주류문명에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후예는 치우의 후예와 통혼을 했다는 점이다. 황제의 후예는 남자이고, 치우의 후예는 여자이며 절세미녀이다. 이로써 볼 때, 치우는 요마가 아닐 뿐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유전인자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치우의 부하들 중에서는 불굴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용맹과 전투를 숭상했고, 패배자의 후예이지만 자부심을 유지했으며, 선조의 사명을 등에 없고,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역사상 요(堯)에 대항하였던 단강(丹江)의 삼묘(三苗) 부락도 스스로 치우의 "구려의 후예"라고 하였었다. 이들이 아마도 묘족의 선조가 아닐까?
삼묘는 요를 이기지 못했고, 요에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시시때때로 반항했다. 요는 그들은 돈황의 삼위산(三危山)으로 쫓아보낸다. 이것이 바로 <<사기. 오제본기>>에 기재된 "삼묘를 삼위로 이주시키다"라는 부분이다. 삼묘의 수령인 환두(驩兜)는 숭산(崇山)으로 유배가는데, 지금의 호남성 대용시의 서남에 있고, 무릉산(武陵山)에 속하는 지역이다.
나중에 우(禹)임금은 다시 삼묘와 70일에 이르는 큰 싸움을 벌인다. 삼묘는 대패하고, 이후 역사책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책에 나타나지 않는 무리들은 행동이 더욱 신비해진다. 소설림 교수는 굴원이 쓴 <<국상>>은 바로 머리없는 전신 치우를 제사지내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더 많은 자료와 방증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것을 생각하면 피가 끓는다.
이 불굴의 남녀는 당연히 어떤 조정에서든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정말 윗글에 쓴 것과 같다면, 구려족에는 상당한 사람들이 북방으로 유배되어 흉노에 흡수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흉노를 적으로 삼은 한왕조는 아마 자기의 적수와 치우간의 모종의 관계를 찾아내려고 하였을 것이며, 그리하여 더더욱 치우의 이미지를 악마시하는 방향으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으로 도망친 흉노를 쫓았다. 남으로 도망친 흉노와 호남에 자리잡은 삼묘는 혹시 만나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바로 한나라때 삼묘의 일부 사람들이 귀주, 운남 일대로 흘러들었다.
역사학자인 장태염, 여사면 선생은 일찌기 이렇게 생각했다. 고대의 삼묘가 반드시 현재의 묘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충분한 문자기록은 없다. 그러나, 장기간 문자가 없던 민족들에게 이런 기록을 찾으라고 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장태염, 여사면 선생이 서강묘채를 와봤더라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시를 들었다면, 신처럼 모셔지는 단풍나무를 봤다면, 아마도 견해를 바꾸지는 않았을까?
5.
당연히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의 젊은이들은 자기의 조상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수천년동안 뿌리깊은 악명을 확인하는 것이면서 수만리를 도망쳐온 패배자의 길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확인은 또한 하나의 부담이다. 멸시와 조소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경계와 감시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확인과 부담은 그글에게 있어서는 대대로 이어진 역사의 숙명이다. 그들은 책으로 써서 남기지도 않았고, 글로 써서 산속에 숨겨두지도 않았다. 그저 담백하게 인정함으로써 모든 부담을 짐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들은 황량한 벌판에서든 피흘리는 전쟁터에서건 중요한 순간마다 이렇게 되뇌였을 것이다: "우리는 치우의 후예이다"
"우리는 치우의 후예이다"
"우리는 치우의 후예이다"
......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밤들의 생명의 비밀스런 언어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억울한 것인지 잊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자기의 조상을 변호해야할지도 몰랐다. 모든 변호는 이 말 속에 있다. 그저 자기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마침내 밤이 지나갔다. 비밀언어는 이미 밝은 대낮에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천년의 증류를 지나, 더 이상 원한의 흔적은 없다. 더 이상 복수의 화도 남아 있지 않다. 더 이상 호소할 생각도 없다. 더 이상 미워할 이유도 없다.
전혀 의외였던 점은 그들의 후예가 여전히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수천년의 야반도주는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마지막으로 얻은 것은 그럼에도 "생존유지"가 아니라 "아름다운 생존"이었다.
귓가에 떠도는 그 말은 빠른 목소리의 노래처럼 전해져 온다: "우리는 치우의 후예이다"
필자는 생각한다. 치우는 이때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 승리는 서강묘채 여자아이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있다.
이러한 승리는, 글로된 역사의 승패논리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녀들은 아름다움으로 모든 것을 대변한다.
6.
서강묘채를 떠나기 전에, 촌채의 우두머리인 "고장두(鼓藏頭)"는 아직 나이가 젊은 세습의 당수성(唐守成)이었다. 그는 나를 한 곳으로 데리고 갔는데, 가서 보니 뇌공평위에서 옮겨온 몇 개의 청석고자비(靑石古字碑)가 있는 곳이었다. 뇌공평은 촌채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높은 언덕에 있었다. 그곳은 이 산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천둥번개가 생기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풍경은 아주 아름다웠고, 서강묘족의 선조들이 이곳에 거주했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묘족반란군과 조정의 관군들이 차례로 거주했었다. 이 곳의 몇개의 청석고자비는 글자가 한자의 필획과 비슷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전혀 달랐다. 문자가 없었던 묘족도 예전에는 문자를 가진 적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때였을까? 그리고 얼마간이나 사용했을까? 사용범위는 얼마나 넓었을까? 그리고 왜 소실되었을까?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자시히 이 문자와 서하문자(西夏文字)를 비교해 보았다. 그후에 여러가지 추측을 하게 되었다. 만일 묘족이 문자를 가졌더라면, 아마도 어느때 어느 곳에서 완벽한 기록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을까? 다만, 누가 그걸 읽고 해석한단 말인가? 다시 한번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이외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는 너무나 많다. 그리하여 책상위에 놓여진 역사는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그다지 자랑할 것도, 그다지 드러낼 것도, 그다지 자만할 것도 없다. 현재 열기가 지나친 "국학"의 한족 주류문명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현지의 학자중 한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이 고자비는 일찌기 한 한족의 선배학자에 의하여 "공명비(孔明碑)"로 명명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설에 따르면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이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 사실을 묘족문자로 새겨놓은 것일 거라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선배학자는 완전히 한족의 입장에서 제갈량이 이 곳을 왔을 지도 모른다는 전설을 진실로 생각한 것이고, 무슨 글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제갈량이 아니면 그런 글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황제와 치우의 천고항쟁에 비추어보면, 제갈양이 참여한 삼국전투는 의미나 결과에 있어서 작은 전투에 지나지 않는다. 치우의 후대들이 어렵게 천둥번개치는 산골짜기에 아름다운 거주지를 마련했는데, 제갈량이 얼굴을 들이밀어서야 되겠는가. 그 고자비는 분명히 제갈량과는 무관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더 이상은 공명비라고 부르지 말라. 그냥 고자비라고 불러라. 묘족글자인지 아니지는 아직 쉽게 결론내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참 얘기하는데, 7,8세된 묘족 여자아이들이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그중 한명이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아저씨,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중요한 문화인이라면서요. 저한테 말해주실 수 있나요. 문화인이 뭐하는 거예요?"
나는 웃었다. 마음 속으로 이런 큰 주제를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했다. 나의 왼손과 오른 손은 각각 이 두 명의 어린 여자 아이의 자그마한 손에 붙잡혀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잘 들어라. 문화인이 하는 것은 전인류와 자기의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더욱 아름다워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녀들에게 말을 따라해보라고 했다. 첫번째는 그녀들이 줄줄 말하지 못했지만, 두번째는 둘 다 줄줄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손을 그녀들의 작은 손에서 빼내고, 가볍게 그녀들의 볼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 후에 "고장두"와 작별인사를 했고, 귀로에 올랐다.
언덕위에 올라서 다시 되돌아보니, 서강묘채는 이미 황혼의 산색에서 모호해져 있었다. 금방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빨리 기억에 남겨야 했다: 서강묘채는 동경 108도10분, 북위26도30분이 만나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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