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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펄 벅(새진주, 賽珍珠)과 세명의 남자

by 중은우시 2007. 5. 2.

 

글: 비룡(飛龍)

 

펄벅은 중국을 묘사함으로써 노벨상을 획득한 미국의 여류작가이다. 그녀는 1902년에 미국의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다. 3개월만에 그녀는 전도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왔다. 중국에서는 모두 34년간 생활했고, 그중 18년은 강소성 진강(鎭江)에서 보냈다. 여기서 그녀는 동년, 청소년시기를 보낸다. 진강은 펄벅의 인생관, 세계관이 형성된 곳으로 보아도 된다. 또한 여기서 그녀는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필자가 본 자료에 의하면, 펄벅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감정은 매우 깊었고, 그녀는 중국을 자기의 고향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그녀의 출신지난에 '진강'이라고 계속 써왔었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그녀가 임종직전에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묘비에 중문으로 '새진주'라는 세 글자를 써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도대체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펄벅은 중국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아래는 새진주와 세명의 중국남자에 얽힌 숨은 이야기이다.

 

사료에 의하면, 펄벅은 중국으로 온 후 어려서부터 대부분의 중국아이들처럼 중국전통의 서당식 교육을 받았다. 공(孔)씨성의 한 유학자로부터 "사서", "오경"을 배웠다. 중국말도 할 줄 알고, 중국글자도 쓸 줄 알았으며, 중국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어린 펄벅에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유모가 그녀에게 얘기해준 각종 민간전설과 주방장이 얘기해준 "삼국" "수호"등의 이야기였다. 이런 구두문학은 풍부하고 심후하게 펄벅의 정신세계에 자양분을 제공했고, 중국과 중국인, 중국문화에 대하여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의 이후 문학창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녀의 대표작품인 <<대지>> <<아이들>>과 <<분가>>의 삼부작은 모두 중국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첫째, 서지마(徐志摩)와의 스캔들

 

펄벅이 어른이 된 후, 먼저 강소성 진강, 안휘성 숙현과 남경등의 대학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중국통"이라고 불렀다. 이 기간동안 그녀는 중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신월사(新月社)"의 주요멤버인 서지마와 만났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국경을 넘어선 사랑을 꽃피웠다고 한다.

 

1924년,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양계초, 채원배에 의하여 북경강학사의 명의로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한다. 그는 상해, 항주, 남경, 제남, 북경, 태원, 무한등지를 방문한다. 서지마는 타고르의 일정기간동안 통역을 담당한다. 남경의 타고르환영회에서, 펄벅은 서지마를 만난다. 당시에 남경의 한 교회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던 펄벅은 풍류남아인 서지마와 교분을 가지고, 이후 한동안 두 사람은 '보통이상의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이야기에 대하여 펄벅은 자신의 작품에서 여러번 흔적을 느낄 수 있게 해두었다. 혹은 책속의 인물을 통하여 서지마를 그렸다. 이러한 상황은 펄벅이 생전에 그녀의 두 명의 가장 친한 여자친구들에게만 털어놓았다고 한다. 나중에 그중 한 친구가 공개한 바에 의하면 펄벅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작품인 <<북경내홍>>에는 그녀와 한 중국친구의 '보통이상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가 누구였는지는 시종 밝히지 않았다.

 

1925년, 펄벅은 단편소설 <<한 중국여자의 이야기>>를 썼다. 여기서 이족 청년남녀의 로망스를 그렸다. 이로써 그녀와 서지마의 사랑을 투영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단편소설에서도 펄벅과 서지마의 사랑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소설중 남자주인공이 비행기사고로 죽는 장면을 그렸는데, 이것은 서지마가 제남부근의 당가장에서 비행기사고를 당한 것과 아주 잘 들어맞았다. 펄벅은 그녀의 작품중 네 곳에서 서지마의 그림자를 남겨두었고, 그들 영혼 깊은 곳의 그리움을 새겼다.

 

펄벅이 죽은 후 5년이 되어서, 그녀의 친구인 사라 포튼은 '방문기'에서 이름을 꺼냈다. 이 신비한 남자친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대중들이 잘 알고 있으며 '중국의 바이런'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던 서지마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점은 우리는 서지마의 시나 모든 서지마의 전기에서 이 사랑이야기를 언급한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서지마의 친구들은 거의 펄벅과 서지마간의 이 사랑이야기를 모르고 있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펄벅은 서지마보다 4살이나 많고, 두 사람이 만났을 때는 펄벅이 이미 32세로 살도 쪘고, 용모도 평범하며 화장을 즐기지도 않았는데, 서지마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을 리 없다는 것이다. 펄벅과 서지마의 사랑이야기에 대하여는 펄벅이나 그녀의 친구들로부터 온 일방적인 이야기만 있다. 서지마의 편지나 일기등의 유력한 증거는 모자란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국경을 넘은 사랑이야기는 문단에서 해결되지 않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둘째, 임어당(林語堂)과의 다툼

 

펄벅은 1895년에 태어난 임어당보다 3살이 많다. 펄벅의 부모와 임어당의 부친은 다 같이 전도사였다. 서로 다른 것은 펄벅의 부모는 중국에 전도하러 온 미국인이고, 임어당의 부친은 중국에서 전도하는 중국인이라는 점이다. 펄벅과 임어당은 중국과 중국문화를 아주 사랑했다. 그리고 중국문화의 분위기에 도취되었다. 펄벅은 영문이 뛰어나며, 중국문화를 잘 알며, 문필이 뛰어나고 유창하여 아름다운 작가를 만나기를 고대했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여러가지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녀는 <<중국평론주보>>의 평론난에서 '임어당'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그녀는 임어당의 글이 대담하고 신선하며 정확하다고 생각했고, 문필이 깨끗하며 새롭고, 자연스러우며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 이름은 아직 낯설었다. 여러번 연락한 끝에, 펄벅은 임어당을 찾았고, 두 사람은 1933년 어느날 밤에 임어당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펄벅이 외국작가가 쓴 중국을 주제로 한 작품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자, 임어당은 흥분하여 답변했다"나도 아주 중국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 나의 우리나라에 대한 진실한 감정을 담고 싶다" 임어당의 생각이 자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펄벅은 아주 기뻤다. 그래서 열정적이고 격정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왜 쓰지 않느냐. 너는 쓸 수 있을 것이다" 펄벅은 자기가 품어온 생각을 말했다. "나는 오랬동안 생각했었다. 중국인이 중국에 관해 쓴 책을 불 수 있게 되기를" 나중에 펄벅은 장태공사의 사장인 파르시에게 이 일을 얘기하고, 임어당에게 책을 쓰도록 격려했다.

 

그래서, 1934년부터, 임어당은 10개월의 시간을 들여 책을 썼다. 제목은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이었다. 이 책은 1935년 미국에서 출판된 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것은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큰 반향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 책의 서문에는 펄벅이 쓴 서언이 있다. 그녀는 이성적이면서 깊이 있는 논조로 이 위대한 책을 칭송했다. 펄벅은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 책은 실사구시로 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책은 자랑스럽게 썼고, 유머있게 썼으며, 아름답게 썼다. 엄숙하면서도 재미있고, 고금의 중국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평가하였다. 나는 이것이 지금까지 가장 진실하고, 심각하며, 완전하고, 중요한 중국에 관한 저작이라고 믿는다. 기쁜 것은 이것이 중국인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이다. 현대의 중국인에 의하여. 그의 기초는 과거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그의 풍성한 과실은 오늘 열매를 맺었다"

 

이것은 대단한 시작이었다. 이 책은 중국인이 진정으로 미국인에 대하여 중국문화를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미국 양국작가의 친밀한 우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의 기간동안 임어당과 펄벅 그리고 그들 두 집안은 깊은 우의를 다진다. 임어당의 책을 먼저 펄벅부부가 운영하는 출판사에게 출판하게 했을 뿐아니라, 두 집안은 자주 만났고, 두 집안의 아이들도 함께 놀았으며, 두 집안이 마치 한 식구와 같았다. 이것은 임어당과 펄벅의 '밀월기'였다.

 

이처럼 단단했던 두 작가의 관계가 왜 마지막에는 서로 원수지간으로 변모했을까? 소문에 의하면, 임어당이 미국에서 생활하던 기간동안, 전력을 다하여 중문타자기를 연구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40만달러의 모든 재산을 여기에 소비했다고 한다. 나중에 할수없이 여러해동안 협력하던 펄벅에게 돈을 빌렸다고 한다. 그러나 임어당을 놀라게 한 것은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점이다. 펄벅은 그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임어당의 자존심을 많이 상하게 하였다. 이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결렬시켰다. 임어당은 나중에야 펄벅부부와 합작하면서 손해를 많이 봤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출판사는 10%의 인세를 주는데, 펄벅부부는 임어당의 책을 출판하면서 50%를 가져갔다. 그리로 판권도 임어당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회사의 소유로 해두었다. 이 때, 임어당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원래, 펄벅이 출판사를 차린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그는 여러해동안 많이 손해를 봐왔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임어당은 변호사에게 위임하여 펄벅에게 저작판권을 돌려달라고 요청했고, 태도는 아주 단호했으며 전혀 되돌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소식을 들은 후, 펄벅은 놀라면서도 당황했다. 그녀는 임어당의 딸 임태을(林太乙)에게 전화를 했고, 그녀의 부친인 임어당이 미친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나중에 임어당은 남양대학의 총장이 되었으며, 그는 전보를 보내어 펄벅에게 고별인사를 했다. 그러나, 임어당은 회신을 받지 못했으며, 이는 또 다시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슬픔에 젖었다. "나는 한 미국인을 꿰뚫어 보았다" 이후 근 20여년간 협력했고, 우의가 깊었던 작가들은 단절했다. 그들은 강물이 서로 갈라진 후 다시는 합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의미깊은 것은 펄벅이 죽은 후, 몇명의 양자가 그녀가 남긴 700만달러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웠다. 그들은 7년간 소송을 벌인후에야 비로소 해결을 보았다. 이것은 아마도 펄벅이 생전에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셋째, 노신이 본 펄벅

 

펄벅은 80여년의 생애에서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다. 만년이 되어, 그녀는 다시 중국방문을 신청했다. 그러나, 펄벅에게 있어서 신중국에서 높은 명망을 가지고 있던 노신(魯迅)의 그녀에 대한 평가는 오랜동안 그녀의 중국내에서의 운명의 부침을 나타냈다.

 

사상가, 혁명가로서의 노신은 '중국문화의 수호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시시때때로 중국문화계 내지 세계문단의 동향을 관찰했다. 노신은 펄벅은 중국을 사랑하고 그녀가 중국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인 자신이 이해하는 만큼 깊이있지는 않다고 보았다. 펄벅의 <<대지>>가 중국어로 번역된지 얼마되지 않은 1933년,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5년전, 노신은 펄벅의 작품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정하는 전제하에서 어느 정도의 불만도 나타냈다. 그는 <<대지>>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했다: "그녀가 깨달은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1934년에 이르러, 노신은 펄벅이 <<수호전>>을 영문으로 번역하면서 그 제목을 <<사해지내(四海之內, 천하라는 의미)는 모두 형제이다>>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비난했다. "양산박의 사람들은 천하사람을 모두 형제라고 한 것이 아니다"

 

노신의 이러한 평론은 당연히 그가 다른 문제를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깊이가 있었고, 다른 사람이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었지, 이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었다. 노신은 살아있던 마지막 해에 펄벅에 대한 생각을 약간 바꾸게 된다. 그는 1936년, 일본인 친구에 대한 서신에서 펄벅에 대한 평가가 잘못된 것같다는 말을 한다. 그저 노신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어 이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는 못했고, 이로써 나중 사람들에게 "노신은 펄벅의 사람됨과 글에 대하여 모두 좋지 않게 생각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이러한 간단한 인상은 간단한 추정에 의하여 내린 결론이다. 역대 정치운동에서 사람들이 다시 여기에 가세하여, 펄벅과 그의 작품은 해방후 오랫동안 중국대륙에서 금서가 되고 공격대상이 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노신의 펄벅에 대한 악의 없는 몇 마디 말이 자연스럽게 펄벅을 공격하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의외로 생각하는 것은, 펄벅은 노신 본인에 대하여 시종 우호적인 감정과 경의를 표시했다는 점이다. 관련자료를 보면, 노신이 경멸어린 말투로 펄벅의 작품을 평한 삼일째 되는 날, 펄벅은 장백우(章伯雨)라는 그녀를 찾아온 청년에게 노신의 상황을 묻고, 노신의 학문과 창작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노신의 처지에 대하여도 관심과 동정을 나타냈다. 1934년, 펄벅은 <<아시아>>잡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다시 에드가 스노우에게 청하여 <<노신--백화대사>>라는 글을 쓰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을 그 잡지 1935년 1-2월호에 실었다. 1936년 9월호에는 다시 스노우가 번역한 노신의 소설 <<약>>과 산문 <<풍쟁(연)>>을 싣는다. 이것은 노신 생전에 발표된 최후의 번역본이다.

 

펄벅은 노벨상수상식때 <<중국소설>>에 대하여 강연하면서, 노신의 <<중국소설사략>>을 여러차례 인용한다. 1954년, 중국과 소련의 문예계에서 펄벅을 함께 비난하면서 저주를 퍼부을 때, 펄벅은 <<나의 몇개 세계>>라는 글에서 노신에 대하여 "아마도 다음을 첫번째로 의식한 사람일 것이다: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인민을 결합시켜야만, 간단한 모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1972년, 펄벅이 서거하기 1년전에, 그녀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라는 글에서 다시 한번 "많은 우수한 중국작가가 농민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지만, 노신은 그중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