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홍(黎元洪)
호북 황피(黃陂) 사람. 1864년 출생. 1911년 무창기의때 혁명군에게 붙잡혀 중화민국군정부 악군대도독 겸 총사령관이 되어, 봉건황제제도를 무너뜨린 지도자가 됨. 1912년 남경임시정부의 부총통에 당선됨. 1916년 원세개가 죽은 후 대총통의 자리를 승계함. 민국초기의 정계에서 여원홍은 북양군벌이 조종하던 도구에 불과했다. 원세개가 세력을 잡았을 때 그는 집안에 연금되어 귀머거리봉사처럼 생활하던 "여보살(黎菩薩)"이었고, 원세개가 죽은 후에는 대총통의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병권이 전혀 없던 그는 그저 북양정부의 고무도장역할밖에 할 수가 없었따. 모두 단기서(段琪瑞)가 시키는대로만 했다. 조금이라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단기서는 장훈(張勳)의 변자군(辮子軍)을 불러내서 복벽, 반복벽의 장난을 치고, 결국 여원홍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1922년 조곤(曹錕)이 정권을 잡자 다시 그를 대통통의 위치로 올려서 광동의 임시대총통 손중산과 대항하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다시 조곤에 의하여 자리에서 끌려내려온다.
1926년, 여원홍은 천진의 주택에 테니스코트를 건설하고, 자주 오후에 1시간 테니스를 쳤다. 겨울이 되면, 테니스장은 스케이트장으로 바꾸었다. 여원홍은 서예를 좋아해서, 하야한 후에는 서예를 즐기느라 피로한 줄을 몰랐다. 각지에서 그의 글을 구하는 요청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는 무창기의기념일을 아주 중시해서, 매번 이 날이 되면, 폭죽과 노천영화를 준비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집에서 함께 이 날을 즐기도록 하였다. 여원홍은 실업투자도 중시하여 수십개의 기업을 설립했고, 은행에 대출도 받았다. 1924년, 은행이 원금상환을 독촉하자, 할 수없이 북경 동창후통의 주택을 팔아치워야 했다.
1926년, 여원홍은 뇌일혈로 쓰러진다. 다음해에는 호전되었다. 1928년 여름, 부인과 함께 영국조계지역으로 가서 경마를 구경하다가 옛병이 다시 도져서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6월 3일 서거한다. 향년 64세였다. 6월 28일, 남경국민정부는 여원홍에게 국장(國葬)을 거행해준다. 전국각지는 반기를 걸어 애도했고, 예포 17발을 쏘았다. 여원홍은 국민당이 정권을 취득한 후 국장이라는 융중한 행사를 치른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풍국장(馮國璋)
하북 하간(河間) 사람이다. 1859년생이며, 북양삼걸(北洋三傑)의 하나이며, 직계군벌의 창시자이다. 1917년, 대리대총통이 된다. 1918년 10월 임기만료로 물러난다. 그는 재물을 잘 끌어모았고, 경영활동은 대부분 금융과 부동산에 집중되었다. 고향집에는 좋은 밭 천무(1무는 200평)가 있었으며, 강서 남통에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염전개간회사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땅이 70만무나 되었다. 1919년 자금 1000만위안을 모아서 개원실업공사를 설립하고, 이어서 병공창(兵工廠), 철광과 전등회사를 만든다.
동시에 옛부하들과 연락하여 신당을 건설하고자 하기도 한다. 사후에 발견된 그의 무기창고에는 60만대양의 가치를 지닌 무기가 쌓여 있었다. 그중 절반은 풍국장이 이전에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이고, 나머지 절반은 개인재산으로 구매한 모제르(Mauser)총이었다. 대리대총통을 맡을 때, 풍국장은 25대의 차량을 이용하여 창주로 운송하여 보관하였다. 1919년 12월 12일, 친구와 얘기할 때, 풍국장은 돌연 병이 도져서, 28일 사망한다. 향년 62세이다. 국무회의는 58000위안을 내서 풍국장의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한다. 1920년 2월 2일 영구는 하남의 고향에 묻혔다.
서세창(徐世昌)
천진사람이다. 1855년 하남에서 출생하였으며, 원세개의 옛친구이다. 청나라정부의 내각협리대신(부총리에 해당함)를 지냈고, 1918년 총통에 당선되며, 1922년 직계군벌에 의하여 자리에서 쫓겨난다.
하야후, 서세창은 천진의 영국조계지역에서 17년간 생활한다. 은거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가 살던 집에는 "퇴경당(退耕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퇴경노인(退耕老人)" 또는 "퇴수(退叟)"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집은 10무정도 넓이였고, 그 안에는 빈 땅이 많았다. 그는 일하는 사람들을 시켜 밭을 만들고 채소를 심었고, 어떤 때는 스스로 호미를 들고 나서기도 했다. 이외에 그의 부인은 일찌기 하남의 휘현(輝縣)에 땅을 사두었는데, 서세창이 은거하면 쓰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곳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서세창은 수도에 전념했다. 매일 100번 절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서세창은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다. 대부분의 시간을 글쓰고 그림그리는데 썼다. <<청유학안>> <<퇴경당정략>>등 10여권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매국노인 왕극민(王克敏)과 친일 천진시장 반육계(潘毓桂), 일본사단장 장판원(長坂垣)과 특무대장 토비원(土肥原)이 여러차례 그에게 "화북의 영수"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서세창은 문을 걸어잠그고 만나주지 않았다. 이후 병이 든 것처럼 외부에 알렸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가 되어 버렸다. 1938년 겨울, 방광암에 걸렸고, 1939년 6월 5일 사망하니, 그의 나이 85세때의 일이다. 임종의 유언으로, 부고를 내지 말도록 하였고, 하남휘현에 묻어달라고 하였으며, 묘지를 만들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란으로 영구는 하남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조곤(曹錕)
1862년생. 천진 사람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베를 만들어 팔던 집안출신이다. 그러나, 이 네명의 총통중에는 가장 실력이 있던 사람이다. 1923년 뇌물을 주고 민국대총통이 된다. 1924년 10월, 풍옥상이 전보를 보내서 단기서를 국민군대원수로 추대하고, 조곤에게 도장을 내놓으라고 하자, 전보를 보내어 사직한다.
1926년 조곤은 복직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접고, 은거생활로 들어간다. 평민으로 내려앉은 조곤은 자신의 어릴 때의 모습을 회복한 것같았다. 많은 가난한 이웃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고,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매일 여름밤이면, 조곤의 집은 많은 차를 파는 사람, 서양차를 끄는 사람, 채소를 파는 장삿꾼들이 몰려들었다. 조곤은 이들과 함께 옷통을 벗고 부채를 부쳤으며, 작은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1937년 노구교사변이 일어난 후, 일본인은 갖은 방법을 써서 조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자 하였다. 조곤은 부인의 권유하에, 죽을 먹을 지언정 일본인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겠다고 맹세한다. 친일정권인 화북치안군총사령, 친일하북성성장이 그를 설득하러왔지만, 모두 조곤부부에게 쫓겨나고 만다.
1938년 5월 17일, 조곤은 천진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향년 76세이다. 일본척에서 적지 않는 부조금을 보내왔지만, 조곤의 부인은 모두 거절한다. 6월 14일, 국민정부는 영을 내려 조곤에게 육군일급상장의 계급을 추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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