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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때 환관과 대신간의 한판 승부

by 중은우시 2007. 11. 22.

글: 수은하(水銀河)

 

동한(東漢), 당(唐), 명(明)의 세 황조는 중국에서 환관의 위해가 가장 극심했던 황조들이다. 그러나, 동한의 환관들은 자주 외척의 견제를 받았었고, 명나라의 황제는 아주 발호했던 위충현과 같은 인물도 황제의 한마디 명령에 처형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 두개의 황조에서의 환관은 어찌되었던 노비의 위치였다. 당나라의 환관들은 달랐다. 당숙종시기의 이보국(李輔國)부터, 조정대신의 승진과 강등, 황제의 옹립과 폐위, 심지어 황제의 생살대권까지 모두 그들이 한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노비가 주인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는 당나라 중후기 이후의 황제옹립표이다:

 

당대종(唐代宗) : 환관 이보국(李輔國)이 옹립

당목종(唐穆宗) : 환관 양수겸(梁守謙), 왕수규(王守圭)등이 옹립

당문종(唐文宗) : 환관 양수겸, 왕수징(王守澄), 양승화(楊承和)등이 옹립

당무종(唐武宗) : 환관 구사량(仇士良), 어홍지(魚弘志)등이 옹립

당선종(唐宣宗) : 여러 환관이 옹립

당의종(唐懿宗) : 환관 왕종실(王宗實)이 옹립

당희종(唐僖宗) : 환관 유행심(劉行深), 한문약(韓文約)이 옹립

당소종(唐昭宗) : 환관 양복공(楊復恭), 유계술(劉季述)이 옹립

 

황제들이 환관에 의하여 옹립되었으므로, 생살대권을 환관들이 장악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당숙종은 이보국에 의하여 죽었다. 당헌종은 환관 진홍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당경종은 환관 유극명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를 보면, 모두 황제가 어찌 이 정도로 핍박을 받았단 말인가? 도대체 대신들은 무엇을 하였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당한 세계의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가 한 무리의 환관들에게 완전히 장악되다니,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냥 참고넘길 수가 없을 일이다. 이렇게 된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바로 환관들이 아주 중요한 하나의 패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금군(禁軍)이다. 이 무장세력이 있으면, 아주 손쉽게 조정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러나, 압박이 있는 곳에 반항이 있다는 좋은 말도 있다. 황제와 대신들은 일련의 자잘한 투쟁을 했었다. 예를 들면, 당대종, 당덕종, 당헌종이 통치하던 시기에 환관들은 적절히 통제된 �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짧았고, 후임자들의 수준이 따르지 못해서, 일시적인 일에 그치고 말았다. 이중 당문종때 발생한 감로지변(甘露之變)은 환관과 대신들간의 한차례 큰승부였다. 이는 이후 대신들이 철저히 패배하는 국면을 공고히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결전을 부른 인물은 당문종 이앙이었다. 그는 당목종의 둘째아들고, 중당시기에 비교적 능력있던 황제였다. 그가 승계하였을 때의 당나라제국은 문제투성이었고, 모순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환관인 양복공은 아주 광망자대하였다. 원대한 포부를 품은 당문종은 즉위후 일련의 부국강병조치를 취한다. 대화원년(827년) 즉위시로부터, 궁중의 도사 기처현, 양충허 및 예인 이원집, 왕신등을 영남으로 유배보낸다. 대화3년(829년)에는 다시 영을 내려 봉상(섬서성 서부 감숙성동부), 회남(안휘 수현) 두 도의 관리들을 황궁에 보낸 여악사 24명을 원적으로 되돌려보냈다. 개성5년(840년)에는 다시 후궁에서 궁녀3000명을 방출하고, 교방악공, 내감 1270명을 원적으로 돌려보낸다. 황실의 사냥용으로 쓰이던 매와 개도 모두 풀어주었고, 각지에서 조정으로 진귀한 보물과 비단들을 상납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당문종의 이러한 행위는 환관 구사량과 같이 황제에게 주색잡기의 놀거리를 제공하면서 군주를 고혹시켰던 무리들에 대한 반격이었다. 당문종의 즉위후 두번째로 한 일은 과거시험을 통하여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에서 환관이 주도하는 국면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대화2년, 당문종은 영을 내려 "직언급간과"의 시험을 쳤는데, 유분의 <<직언간언책>> 5천자는 환관이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하여 날카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환관이 조정을 장악한 현상에 대하여 "환관 5,6명이 천하를 대권을 잡았고,..여러 신하들이 감히 그 현상을 �하지 못하고, 천자도 그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아무 일도 안하는 무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줄여서, 사회의 빈곤한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적었다. 주시험관은 그의 글로 환관들의 미움을 살까 겁을 내서 그를 조정에 뽑지 않았다. 문종황제도 나서서 간여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기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말년에 문종은 환관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는 유분이 내놓은 대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문종이 세번째 했던 일은 송신석을 재상으로 임명한 일이다. 이렇게 하여 환관세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대화4년(830년)에 문종은 송신석을 재상으로 삼는데, 송신석은 내외에서 평가가 아주 좋은 편이었다. 감찰어사, 예부원외랑, 한람학사를 지냈었다. 조정대신중 청렴하기로 이름있고, 붕당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종의 이러한 과단성있는 조치들은 바로 환관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송신석이 환관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기밀이 새어나가서, 환관들이 먼저 손을 쓰게 된다. 추밀사 겸 우군중위 왕수징등은 송신석이 장왕 이주(목종의 여섯째아들)과 결탁하여 모반했다고 밀고한다. 다음 해 송신석이 쫓겨나며 계획은 실패한다.

 

환관두목 왕수징은 송신석사건을 통하여 결론을 얻는다. 반드시 당문종을 엄히 감시하고, 그의 말한마디 행동하나를 통제해야만 자기들이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화8년(834년) 가을, 왕수징은 정주를 어의로 추천하여 문종의 병을 치료하게 한다. 그리고 심복인 이훈으로 하여금 당문종에게 <<역경>>을 강의하게 한다. 두 사람은 당문종의 신변호위가 되었다. 문종의 일거수 일투족은 이들 두 사람에게 감시당했다. 문종은 그러나 역공을 취한다. 두 사람에게 높은 녹봉을 주어 자기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정주를 태복경으로 삼고, 이훈은 한림시강학사로 삼는다. 다음 해 가을에 이훈은 재상으로 삼고, 정주를 봉상절도사로 삼는다. 두 사람은 안팎에서 호응하여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환관들에게 타격을 가한다. 이들은 헌종의 환관인 양승화, 왕천언, 진홍지, 왕수징등을 죽인다. 이리하여 환관을 제거하는 첫번째 단계를 성공한다. 철저하게 환관세력을 제거하려면, 조정에서 더 많은 무장세력을 장악해야 했다. 그리하여 이훈은 다시 호부상서 왕반을 태원절도사로 추천하고, 대리경 곽행여를 분녕절도사로 보낸다 두 사람이 부임하기 전에 경조윤 나립언, 금오대장군 한약, 어사중승 이효본등이 병사를 모아서 환관을 모조리 제거하고자 한다.

 

대화9년(835년) 10월 21일 자신전에서 아침조회가 거행되었을 때, 금오대장군 한약은 좌금오장원안의 석류나무에 밤에 감로가 내렸다고 보고한다. 재상 이훈은 즉시 제의하여 하늘이 상서로운 조짐을 황궁에 내린 것이니, 당나라가 크게 흥할 길조라고 보고한다. 황제는 바로 하늘에 제사지내어 국운을 흥성하게 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문종은 함원전에 잠시 머물면서 재상, 중서, 문하성의 관리들로 하여금 이를 보게 한다. 여러 관리들은 살펴본 후 주청드리기를, 진정한 감로가 아닌 것같다고 말한다. 문종은 다시 신책군의 좌우호군인 구사량 어홍지등에게 명하여 전체 환관을 데리고 와서 진짜인지 살펴보고 즉시 보고하라고 한다. 구사량등이 좌금오장원에 이르렀을 때, 한약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원내에 병사들이 여럿 매복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즉시 도망치게 된다. 환관을 금오원에 유인하여 몰살시키려던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난다. 환관은 함원전으로 도망온 후, 문종을 협박하여 가마에 태우고 내궁으로 들어간다. 이훈, 한약등은 급히 내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보호하고자 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금오위의 병사와 어사대의 병졸 약 500여명이 달려왔고, 환관 수십명을 죽인다. 그러나, 환관은 이훈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문종을 들고 선정문 안으로 도망쳐서 문을 잠그려고 한다. 조정신하들은 놀라서 흩어진다. 이훈은 종남산의 절로 도망가서 피신한다. 이것이 역사상 환관을 몰살시키려던 "감로지변"사건이다.

 

환관은 문종을 협박하여 궁으로 들어가게 한 후 바로 신책군 500명을 파견하여 칼을 들고 황궁을 나서며, 만나는 자들마다 죽인다. 이때 죽은 자가 600-700명이다. 이어서 성문을 걸어잠그고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쳐 다시 1000여명을 죽인다. 이 일에 참여했던 관리인 이훈, 왕애, 서원여, 왕반, 곽행여,나립언,이효본,한약등은 모두 체포되어 살해당한다. 감로지변때, 정주는 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왔는데, 도중에 변을 만나 봉상으로 돌아갔고, 나중에 감군인 환관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관리들은 모두 멸족의 화를 당했고, 연루된 자들이 아주 많았다. 감로지변이후에 관리들이 대량으로 피해를 입어, 조정의 빈자리가 아주 많았고, 아무도 일을 하지 않았다. 환관들은 더욱 전횡을 하게 되었으며, 황제는 더욱 욕을 당하게 되었다. 문종은 곧 한을 품고 죽는다. 이리하여 당나라의 통치는 더욱 암울해진다. 마지막황제인 당소종때, 내정과 외번이 합력하여 비로소 환관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따. 그러나, 이때의 당나라는 이미 마지막 붕괴로부터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