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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홍콩 구룡채성(九龍寨城) : 세계최고의 인구밀도

by 중은우시 2007. 8. 30.

 

 

구룡채성은 저롱채(猪籠寨, 저롱은 돼지우리라는 뜻임)라고도 부른다. 홍콩의 구룡에 있었던 성채이며, 1993년에 철거되었다. 철거되기 전에는 50,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점유면적은 0.026평방킬로미터이어서, 인구밀도가 190만명/평방킬로미터에 달하였으며,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구룡채성의 역사는 중국의 송나라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원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었다.홍콩은 나중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1898년의 <<전탁향항계지전조>>에 따라 홍콩안에 위치하기는 하였지만, 구룡채성은 여전히 청나라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구룡성채에서는 여전히 청나라 관리가 일을 보았고, 이들 관리의 지위는 지금으로 따지면 영사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영국은 일찌기 1899년 구룡성채로 진입한 적이 있었으나, 곧 성채의 관리를 포기하고 주둔병사를 철수시킨다. 189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이곳의 청나라 주둔군은 여전히 구룡채성내에 아문과 다른 건축물들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구룡성채는 옛중국을 느낄 수 있는 관광지로 변모했다.

 

1941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했다. 카이탁공항의 수로을 확대하기 위하여 구룡성채의 성벽을 전부 허물어 버렸다. 일본이 투항한 후, 노숙자들은 구룡채성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1948년 영국정부가 진입하여 정돈하고자 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홍콩의 경찰이나 정부는 진입할 수가 없었고, 중국대륙정부는 관리를 거절하여, 구룡성채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범죄의 온상, 빈민가로 변모했다. 더우기 3불관(중국도 관리하지 않고, 영국도 관리하지 않고, 홍콩도 관리하지 않는 곳)으로 당시 구룡성채에 대한 관할권문제는 표현될 수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성립이후, 대량의 난민이 화남지구에서 홍콩으로 몰려들었고, 구룡성채에 자리잡았다. 홍콩정부가 관리를 완전히 포기함에 따라 구룡채성은 삼합회(트라이어드)가 활약하는 지대로 되고, 마약판매, 매음, 도박등 불법행위의 온상이 되었으며,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섹스업소, 도박, 아편굴, 헤로인, 개고기식당등이 곳곳에 들어섰다. 1959년, 구룡채성에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중국과 영국정부는 서로 사건처리책임을 미루게 된다. 이외에도 홍콩정부는 당시 중국한의사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구룡채성은 무허가의사와 가짜상품판매의 거점이 되었다.

 

1973년에서 1974년 사이에 홍콩경찰은 3000명을 파견하여 강제로 구룡채성에 진입했고, 구룡채성의 조직폭력배를 소탕했다. 구룡성채는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회생했다. 철근콘크리트집이우후죽순처럼 건립되었고, 불법확장, 불법건축이 횡행하였으며, 골목은 좁아서 마치 복도와 같았다. 주민들의 음용수는 8개의 공용파이프에서 빼오거나 우물을 이용했다. 전혀 계획없이 건축물이 들어섰으므로 구룡성채의 위생환경은 아주 나빴다. 1980년초, 구룡채성에는 약 350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범죄율은 홍콩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훨씬 높았다.

 

1984년이 되어, 중국과 영국정부는 <<공동성명>>을 체결해서 홍콩문제에 대한 처리에 합의한다. 1987년 양국은 공동으로 구룡채성을 철거하기로 합의한다. 구룡채성은 1993년 철거되기 전에 성룡이 <>라는 영화를 찍도록 하였고, 일본의 탐험가들로 하여금 구룡성채지도를 그리도록 한 바 있다.

 

구룡성채가 철거된 후, 홍콩정부는 원래의 자리에 공원을 만들었다. 원래 "구룡성채공원"으로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철거전에 오래된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이 지역에서 고대의 문화재를 발굴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재 중에는 구룡채성의 남문자리에서 출토된 화강암돌편액이 있는데, 거기에 "남문"과 "구룡채성"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정부는 그리하여 이름을 "구룡채성공원"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