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종결된 중국의 항일전쟁은 세계전쟁역사상 유례없이 잔혹하고 비참했다. 또한, 독특했다. 선전포고를 한 시간도 특이하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심양(봉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금방 요녕, 길림, 흑룡강의 동북삼성을 장악했다. 이후 반년도 되지 않아, 소위 "만주국"을 건립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중화민국정부는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1932년 4월 15일, 중화소비에트공화국임시중앙정부주석인 모택동은 <<대일전쟁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는 "현재 중국소비에트지구는 오래전부터 제국주의의 속박을 벗어났다....중화소비에트공화국임시중앙정부는 이에 정식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중국의 공농홍군과 많은 피압박민중을 이끌고 민족혁명전쟁으로써 일본제국주의를 중국에서 축출함으로써, 중화민족의 철저한 해방과 독립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의 세력이 미약하였으므로, 이 대일선전포고는 국제사회의 승인과 지지를 얻지도 못했고, 더구나 일본인들은 아예 상대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일본에 대하여 가장 먼저 항거한 것은 약간의 "마적"성격이 있는 "혼성군대"였다. 일본침략은 종전에 볼 수 없던 재앙을 가져왔다. 마점산(馬占山)이 일본에 공격을 시작하자, 동북지방의 민중들은 모두 힘을 얻었고, 동북군의 옛부대원, 지방민단, 옛경찰, 심지어 산속의 "마적떼"까지 무장하여 사방팔방에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동북 "의용군"은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각종 유형으로 이루어진 무장군대의 총칭이다. "의용군"의 구성원들은 복잡했다. 농민이 약 50%를 점하고, 일찌기 동북군, 경찰을 지낸 사람이 약 20%, 마적출신이 약 20%, 지식인, 상인출신이 약 5%, 이외에 일본의 침략에 분대한 녹림호한, 지주무장부대까지 합하여 이들 의용군은 약 50만에 달하였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다시 전단을 열었고, 북경과 천진이 함락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때 중국과 일본이 서로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만, 이때부터 전국에서 항일의 열기가 높아지게 되었다. 장개석 위원장도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남북을 가리지 않고 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사람이건 항전의 책임이 있다"라는 태도를 보였고, 중국의 항일전쟁은 선전포고없이 싸우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진주만공습을 감행하며, 태평양전쟁이 폭발한다. 제2차세계대전의 구도가 완전히 변모하였다. 같은 해 12월 9일, 국민정부는 정식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한다. 이와 동시에 독일, 이탈리아에도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중국정부는 왜 이렇게 선전포고를 늦추어 온 것일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일본이 지나치게 강했고, 일본과 전쟁을 해서 승산이 크지 않다고 보았다. 당시, 중국은 일본과 경제력, 군사력에서 차이가 컸다. 그러한 점에서 장개석은 일본과 개전하는 것보다는 외국의 중재와 조정에 의지하여 해결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일본과의 사이에 "절교하지도 않고, 선전포고하지도 않고, 강화하지도 않고, 조약을 체결하지도 않는다"는 대일외교정책을 수립한 것이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모호했다.
둘째, 국내의 여러 군벌들이 각자 지방을 할거하고 있어, 통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셋째, 대일항전에 대한 사상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항전하면 반드시 질 것이라는 사조가 팽배했었다.
넷째,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내부부터 안정시켜야 한다)"의 방침으로 인하여, 항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척결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즉, 반공제일, 항일제이를 방침으로 정했던 것이다. 장개석은 혁명은 제국주의보다 나쁘다고 생각했고, 제국주의에 망하면 망국노가 되어 목숨은 연명하지만, 공산당에 망하면 그럴 수도 없다는 논리를 폈다. 또한, 시간적으로 일본인들이 3개월에 중국을 멸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국민당은 3개월이면 공산당을 소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 주의할 점은 일본정부도 이전에 본국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고,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등을 고려하여, 일본군에서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중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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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중화민국정부대일선전포고(원문)
일본군벌은 예로부터 아시아를 정복하여, 태평양을 독패하는 것을 국책으로 삼았다. 여러해이래, 중국은 일체의 희생에 불구하고, 계속하여 항전하였는데, 그 목적은 중국의 독립생존을 보위하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야심을 깨부수고, 국제공법과 정의를 보호하며, 인류의 복지와 세계평화를 실현하는데 있다. 이것은 중국정부가 여러번 밝힌 것이다.
중국은 평화를 아주 사랑하는 민족이고, 과거 4년여의 신성한 항전으로 침략자인 일본이 실질적인 징벌을 받은 후 반성하기를 기대하였다. 이 기간동안, 각 우방들은 극단적으로 인내하고 그 화를 참으면서 전태평양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강포한 성격의 일본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우리의 맹방인 영국, 미국에 도전하여, 전쟁침략행위를 확대하였으며, 감히 전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파괴하는 괴수가 되며, 침략을 계속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었다. 신의를 존중하는 모든 국가들이라면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형국이 되었다.
이에 일본에 정식 선전포고를 하여, 중외에 고한다. 모든 일체의 조약, 협정, 계약중에서 중국-일본에 관련되는 것은 모두 폐지한다. 이에 포고한다.
중화민국30년12월9일
주석 임삼(林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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