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중국주일점령군(中國駐日占領軍)의 파견문제

by 중은우시 2007. 6. 14.

글: 여건평(黎建平)

 

1945년 8월 15일 일본투항후, 미국정부는 중국정부에 연합군을 도와 부대를 일본에 파병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국제, 국내형세의 변화로 인하여, 중국은 전승국으로서의 이 권리를 결국 상실하고 말았다. 아래는 그 경위이다.

 

1945년 9, 10월 미국정부는 미국주중대사관을 통하여 중국정부에 공문을 보내왔다. 대체적인 뜻은 "중국정부가 부대를 파견하여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는 것에 협조하는 것에 관한 건"이었다. 당시 중국정부 외교부, 군사위원회 외사국은 장개석 시종실(侍從室)에 보냈고, 승인서명을 받았으며, 중국군령부 부장인 서영창(徐永昌)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군령부 제1, 제2청은 5000명으로 지대(支隊)를 구성해서 일본에 파견한다"

 

아마도 국민당정부는 당시 국내정세를 고려하여 겨우 여단규모의 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중국과 미국 쌍방은 일찌기 중국점령군 파견문제에 대하여 여러차례 협상을 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에서는 5만의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고, 손립인(孫立人)이 지휘하는 신일군(新一軍)을 지명하여 이 업무를 담당하도록 요청했다. 신일군은 전부 미국식으로 무장했고, 손립인도 미국버지니아군사학교를 졸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여러 장군들과 면식이 있었고, 당시에 신일군은 광주에 주둔하여 일본으로 가기도 편리했다. 그러나, 국민당 당국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일군은 당시 국민당군대에서 첫째, 둘째가는 전투력을 가진 부대였고, 일찌감치 동북으로 보내어 임무수행하기로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정예부대를 국내에서 활용하고 싶어했다.

 

나중에, 미국측은 다시 최소한 사단규모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사단규모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러번 검토한 끝에, 국민당은 15000명으로 편제된 사단을 보내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부대는 1945년 12월 하노이에 가서 항복을 받은 영예이사단으로 구성된 육군67사단이었다. 이들이 일본점령군으로 선발된 것이다. 사단장은 대견(戴堅)이었다. 다음 해 4월, 영예2사단은 남경정부의 명령을 받아 하이퐁으로 가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주일점령군의 주둔지로 연합군 총사령부가 처음에 정했던 곳은 니이카타현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호쿠리쿠(北陸)지역이었다. 중국에서는 니이카타는 일본의 중요지역도 아니고, 공업지역도 아니며, 산만 많고 사람은 적은 곳이어서 중국점령군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코쿠(四國)를 주둔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곳은 대공업지역은 아니지만, 완전한 하나의 섬이어서, 중국군대가 이 곳에 주둔한다면, 다른 부대와 접촉하지 않아도 되어 관리와 통제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에서는 시코쿠는 이미 영국군의 주둔지로 결정되었다고 통지했다. 중국측은 다시 큐슈를 요청했다. 이유는 나카사키가 상해에서 가깝기 때문에 보급이나 연락이 모두 편리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나중에 연합군 총사령부는 아이치(愛知)현을 중심으로 하여 시즈오카(靜岡)와 미에(三重)의 두 현을 포함하는 곳을 지정해주었다. 아이치의 현정부소재지인 나고야시는 일본의 제3대공업지역이었고, 시즈오카는 풍경이 뛰어나고 농엽지역이어서 주둔하기 편리한 곳이었다. 이리하여 중국의 주일점령군이 주둔할 곳이 정해졌다. 총사령부는 아이치현의 현정부소재지인 나고야로 정해졌고, 미군제8군의 지휘를 받기로 되었다.

 

1946년 5월초, 장개석은 남경에서 제67사단의 사단장 대견을 접견했다. 이후 3차례로 나누어 이 사단의 연대이상의 모든 장교를 접견했다. 5월 27일, 대견과 연합국일본관제위원회 중국대표단단장인 주세명(朱世明)은 함께 일본으로 갔다. 대표단구성원과 점령군사전파견인원은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갔다. 그들일행이 상해강만공항을 출발하여 B-24폭격기를 탔다. 전승국의 신분으로 가는 것이므로 그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일본에 들어갔고, 전승국의 위엄을 보였다. 폭격기는 폭탄을 휴대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비행기의 기관총등은 원래대로 두었다.

 

이번에 일본에 도착한 중국점령군 사전파견부대는 주로 연합군총사령부와 미군 제8군과 연락했다. 동시에 중국군이 주둔할 주둔지와 부대건물현황을 살펴보았고, 일부 다른 사항에 대하여 미군과 협의했다.

 

비행기가 일본 아츠기(厚木)공항에 도착한 후, 대표단은 동경으로 갔다. 점령군사전파견부대원들은 요코하마에 남았다. 대견은 먼저 미8군사령관을 만났다.

 

6월 4일 오전, 대견은 동경에 가서, 주세명과 함께 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장군을 만났다. 다음 날, 그가 일본을 더나기 전에 67사단의 편제장비일람표를 건네주었다. 동시에 두 가지 임무를 내렸다: 하나는 미군에 각급장병의 급여수당표를 요구해서, 중국점령군의 장병 급여수당표를 초안하는데 참고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대견은 일찌기 중국의 외환상의 곤란을 들어 연합군에 중국점령군비용을 부담해줄 것을 요청했고, 맥아더는 고려해보겠다고 하였다. 둘째는 자동차문제를 계속 연락해보라는 것이었다. 부대를 완전한 기계화사단으로 개편하려는 것이었다.

 

제67사단은 모두 14500명이고, 관할하여 3개 보명연대, 1개 포병연대, 1개 운수연대, 1개 전차대대, 1개 공병대대, 1개 통신대대, 1개 특수임무중대, 그리고 1개의 야전군병원과 200여명의 의무대, 100여명의 선전대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전체 사단의 급여수당은 괜찮은 편이었고, 비용도 많이 썼다. 당시 달러를 단위로 계산했는데, 미군기준보다 장교는 30-50%가 낮고, 사병은 약 20%가 낮았다. 최저급인 이등병의 매월 급여는 20달러였다. 가장 높은 소장인 사단장은 매월 430달러였다. 이렇게 계산하면, 전체 사단의 고정된 급여수당으로 매월 50만달러가량이 소요되었다. 여기에 출장비, 교육연습비, 교통유류비, 판공비와 기타 잡비를 포함하면 매월 적어도 200여만달러가 필요했다.

 

중국점령군의 사전파견부대가 일본에 도착한 후 약 1주일이 지나서, 연합군총사령부 참모처는 중국측인원과 첫번째 회의를 개최했다. 첫번째 문제는 점령군의 편제문제였다. 주로 67사단은 건제산 미군과 약간 달러서 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두번째 문제는 장비였다. 67사단은 3가지 중화기가 있었는데, 자동차가 끄는 것도 있고, 말이나 당나귀에 싣고 가는 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속도가 서로 달랐다.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 중국측은 이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세번째 문제는 말과 당나귀 문제였다. 동물이 전염병을 일본에 전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연합군총사령부는 말과 당나귀는 반드시 해안에서 검역을 받아야 된다고 했다. 이 과정이 개략 3-6개월이 걸렸다.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측은 자동차를 보충해주도록 요청했고, 그렇게 하면 말과 당나귀는 필요없다고 했다. 네번째 문제는 중국군대가 사용하는 연료는 나무장작이었는데, 연합군총사령부는 일본점령규정에 따라 나무장작을 이론에서 징용하거나 구매할 수 없다고 하였고, 반드시 중국내에서 운송해와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운송계획이 하나 만들어졌다. 중국측은 나무장작을 사용하게 되면 매월 전사단은 합계 450톤을 써야 했고, 운송량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 상황을 국내에 보고하고, 부대에서 석탄, 가솔린을 쓰는 것으로 바꾸자고 건의했다.

 

이후, 미군측은 연합군이 점령한 일본의 일부 법규를 중요한 것만 추려서 알려주었다.  첫재는 미군의 일본에 대한 통제권이고, 둘째는 각국점령군의 소요비용, 물자는 모두 본국이 부담한다는 것이며, 일본에서 나무하나 풀하나 가져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측은 중국측에 중국점령군을 상해에서 나고야로 선박운송하는 계획을 제출했다. 주로 67사단의 전체부대의 해상운동에 몇톤이 필요한지, 그리고 이후 부대의 매월 보급계획에는 몇톤의 선박이 필요한지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회담에서는 중국측이 중국점령군의 운송에 필요한 톤수통계표를 제공했다. 연합군총사령부는 검토후 결정했고, 점령군의 군비는 미국측이 지급할 수 있으며, 나중에 미국정부와 중국정부간에 정산하면 된다고 했다. 이외에 소요되는 각종 자동차에 대하여는 잉여물자를 모아서 중국측에 주기로 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가격을 계산하여 공급하고 장부에 남겨놓기로 했다.

 

그후, 중국점령군의 사전파견인원은 요코하마에서 7월중순까지 기다렸는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 7월 하순의 어느 날, 중국주일대표단이 전보를 보내서, 점령군사전파견인원을 동경으로 오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중국점령군이 일본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국민당당국의 계산 때문이었다. 점령군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드는 1개사단의 비용이면, 중국내에서 10개사단을 운영할 수 있었다. 장개석이 보기에 이것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절박한 문제는 공산당과의 내전이었고, 모든 병력을 내전에 투입하여야 했다. 장개석의 계산으로는, 노남(산동남부)과 강소태흥지구를 얻기만 하면, 바로 사단을 빼내서 원래 계획대로 일본에 진주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해안, 여고에 도착한 후 얼마되지 않아, 공산군 화동야전군의 속유, 담진림이 이끄는 부대에 완전히 전멸당하고 만다.

 

당연히 당초 미국이 장개석에게 부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다른 속셈이 있었다. 즉, 소련으로부터 미국혼자 일본을 점령하였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합국에서도 일본점령에 부대를 파견할 권한이 있었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독패'하려는 정책을 썼다. 이것은 소련에게 아주 불만이었다. 나중에 소련은 일본점령문제에서 미국과 합의를 이루게 되는데, 미국의 이런 패권을 묵인하는 것이었다. 이제 소련과 합의를 이루게 되었으니, 더이상 장개석에게 부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할 이유도 없어졌다.

 

중국군대가 전승국의 입장에서 일본에 파견되는 것은 원래 얻기 힘든 기회였는게, 결국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