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지명(馮知明)
1. 미인을 얻는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미모로 이름난 여자는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리고, 남자로서 이러한 아름다운 여인을 얻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도 아니다.
먼저 식후(息侯)를 얘기해보자. 그는 식부인이 채후에 의하여 희롱당한 일을 가지고, 작은 일을 크게 만들어, 초나라까지 끌어들여 채나라를 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일어나고, 결국은 부인도 잃고 나라도 잃어버렸으며, 우울하게 죽게 된다. 이것은 식부인을 처음 얻은 대가였다.
주나라 천자의 혈통을 순수하게 이어온 채애후(蔡哀侯)는 식부인을 희롱한 것으로 인하여, 두번에 걸친 전쟁을 겪게 되고, 처음에는 거의 산채로 삶길 뻔했고, 두번째는 나라가 멸망했다.
초문왕(楚文王)을 보면, 그는 강제로 식부인을 취했으나, <<좌전>>의 기재에 의하면, "식부인을 처로 삼았고, 도오(堵敖)를 낳아 후에 성왕(成王)이 되었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아, 초왕이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여인으로써 두 남편을 섬겼으니 죽지는 않더라도 어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녀는 삼년간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초문왕도 식부인과 만나면 거의 벽을 대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초문왕이 죽고나서, 초나라의 역사에는 새로운 보좌대신인 영윤(令尹)이 등장했다. 바로 초문왕의 동생인 초자원(楚子元)이다. 그는 초나라의 영윤인데, 영윤의 직무범위는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비슷하다. 바로 이 영윤이 다시 한번 식부인의 명성을 떨치게 만들었다. 그녀의 미모는 초나라의 역사를 다시 좌지우지한 것이다. 초자원이라는 초나라의 유명한 영윤은 식부인의 미모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을 뿐아니라, 악명을 후대에 멀리 남기게 되었다.
초나라의 영윤인 초자원의 출생년도는 불명확하다. 초문왕이 즉위한때는 중년이었고, 15년간 왕위에 있었으므로, 초자원이 보좌대신이 된 때는 아마도 장년기였을 것이고, 나이는 50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키가 큰지, 작은지, 몸이 뚱뚱한지 말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동경에 자기의 수염모습을 비춰보았다는 기록으로 보면, 이 사람은 자신의 몸을 아꼈고, 미색을 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용모는 괜찮은 인물이었을 것이고, 풍모가 뛰어난 플레이보이였을 것이다. 미(?)씨성을 가졌는데, 이는 초나라 왕실의 성이었다. 자(字)는 자선(子善)이며 기원전 664년에 사망했다.
2. 과부형수인 왕후에 반한 시동생 재상
초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능력있는 군주였지만, 성장기가 필요했다. 초자원이 초왕을 보좌하던 초기에, 주요 정사의 결정권은 영윤인 그와 모후인 식부인의 손에 달려있어 부득이 그들간의 접촉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식부인의 시동생과 형수는 어느 정도 금도를 지켰다. 아마도 식부인의 미모에 위압감을 느껴서인지, 감히 딴짓을 하지는 못했다. 아니면, 식부인이 금방 남편이 죽어 애통해하는 중이어서 시동생이 그녀에게 느낀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초문왕은 임종시에 초자원에게 중임을 맡겼으므로, 그도 한동안은 일에 열중하느라 딴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다.
시간이 좀 흐르고, 자주 정무를 논의하는 일이 많아졌다. 궁에 들어가서 정사를 논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속이기 힘들어졌고, 점점 하루라도 식부인을 보지 않으면 무언가 잃은듯한 느낌이 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나라의 제2인자인 초자원은 짝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때의 식부인은 예전의 식부인이 아니었다. 문왕을 따라 십수년간 함께 하면서, 문왕으로부터 여러가지 들은 바가 있어, 이미 풍부한 정치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정무를 결정함에 있어서 반응이 기민했을 뿐아니라 아주 총명했다. 이리하여 자원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여러번 그녀를 칭찬하는 말을 하게 된다.
점점 정치가인 영윤은 남자인 자원으로 바뀌어갔다. 식부인을 대할 때, 궁녀들까지도 그가 "눈을 빛내는 것이 도적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식부인을 점점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도 함부로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때의 초자원은 이미 사랑의 늪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오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시경>>에 나오는 "구지부득, 전전반측(求之不得, 輾轉反側)"이라는 문구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삼년은 못만난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감정을 절제하려는 둑은 미친듯한 홍수에 떠밀려 무너지고 말았다. 일단 감정의 둑이 터지자, 그저 흐르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감정으로 인하여, 그의 식부인을 정복하려는 일정을 가속화시키게 된다.
그가 품고 있는 마음은 초나라의 궁중내외에 모두 알려지게 되었고, 심지어 외국의 정보요원들까지도 이런 사실을 알아내서 본국에 보고했다. 이후 초나라에 대책을 세울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때의 초나라는 초무왕, 초문왕의 두 임금이 천하를 경략하여, 남방강국의 지위를 확고히 했을 뿐아니라, 중원을 노릴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초나라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도검을 창고에 박아두고, 말을 남산에 풀어놓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궁중내외의 각파세력들은 이 영윤과 왕후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주시했다.
식부인이 어떤 사람인가? 비록 정치적인 훈련을 체계있게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초문왕의 도도한 감정도 받았다. 어찌 수염이 멋진 플레이보이에게 신경쓰겠는가. 자원이라는 초무왕의 아들은 어려서 상당히 똑똑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녀를 쫓아다니는 것으로 더 유명했다.
식부인은 정치적인 고려를 해서, 그에게 예의있게 대했다. 그러나, 이것이 계속 초자원에 대하여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식부인도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식부인은 이런 상황이 되어, 조정내외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간의 일을 입에 담게 되자 체통이 서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전남편인 초문왕의 호기, 패기, 협의의 기세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식부인은 정치가로서의 권력균형은 일단 고려대상에서 제외하고, 여러해동안 보이지 않던 미녀의 고집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예 초자원이 오더라도 피하고 만나주지 않게 된 것이다.
3. 수단의 하나: 행관(行館)과 후궁(后宮)을 이웃하게 짓다.
초자원은 식부인이 자기를 만나주지 않자, 더욱 그녀에 대한 정복욕을 자극했다. 심지어 일종의 인생목표로까지 삼았다.
어떻게 교묘하게 그녀에게 접근할 것인가가 초자원의 가장 고민거리가 되었다. 식부인이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가무음곡이 있더라도, 그는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악사들이 애끓는 노래를 부르면, 마치 그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더욱 슬퍼졌고, 식부인을 더욱 그리워했다.
그는 명령을 하나 내렸는데, 이유는 충분했다. 현재 초나라의 국제적인 지위가 날로 상승하고, 국제적인 명성이 날로 커지니, 각국의 군주나 사신들이 자주 찾아오게 되는데, 초나라에는 적절한 접대시설이 부족하므로, 국가의 이미지를 흐릴 우려가 있다. 그래서, 초나라의 영윤이 이러한 거창한 이유를 들어 건물을 높이 짓겟다고 하니, 초왕도 허가하지 않기 어려웠다.
그러나, 초자원은 다른 속셈이 있어다. 식부인의 후궁옆에다가 부지를 마련해서 국빈관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낙성식때, 그는 거대한 행사를 준비했다.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불원천리하고 진(秦), 제(齊), 진(晋)등의 악사를 초청하여 반주하게 하였고, 대규모의 춤-만무(萬舞)도 선보였다. 소위 만무라는 것은 두가지 서로 다른 춤을 부르는 것인데, 하나는 무무(武舞)로서 방패와 도끼를 들고 남성의 양강지기를 표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문무(文舞)로서 깃을 가지고 봉(鳳)이 황(凰)에게 구애하는 것을 그린 것이다.
이런 성대한 구애장면은 그가 식부인을 위하여 정성들여 준비한 것이었다. 식부인과 영윤이 함께 즐기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식부인은 전혀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노래와 웃음소리가 하늘에 닿고, 밤을 새워 새벽까지 이어지는데도, 이 영윤의 얼굴에서는 짝사랑의 적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만무를 추는 밤에, 식부인은 아주 귀찮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좌전>>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초나라의 영윤인 자원이 문부인(文夫人, 문왕의 부인 즉 식부인)을 유혹하고자 하였고, 관(館)을 궁의 옆에 지어서 '만무'를 추었다. 부인이 이를 듣고는 울면서 말하기를, '전 군주께서는 춤으로써 전투를 준비하였는데, 지금의 영윤은 복수를 하려고는 생각지 않고, 그저 미망인의 곁에 있으니, 어찌 다르지 않은가?'라고 하였다"라는 기재가 있다. 식부인이 울면서 말한 뜻은 명확하다. 초문왕은 방패와 도끼를 들고 만무를 추어 이를 무술연습기회로 삼았고 그 목적은 인근국가를 정벌하려고 하는 것이어서 조공이 끊이지 않았는데, 지금 영윤의 지위에 있는 무왕의 아들이며, 문왕의 동생인 초자원은 두 선왕의 패주로서의 영웅스러움은 잃어버리고, 더이상 국토를 늘이려고 하지 않고, 그저 신하들과 할일없는 자들과 어울려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다. 지금 초나라는 태평세월을 몇년 보냈는데,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한다)하지 않고, 중원을 정벌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면서 과부인 나의 곁에 있으려고 한다. 이것은 너무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녀는 자신의 뜻이 영윤에게 전달되지 못했을까 걱정하여 특별히 초자원이 궁중에 심어둔 궁녀에게 이 뜻을 전했다.
궁녀는 영윤이 식부인의 일거일동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 급히 이를 영윤에게 보고했다. 초자원은 다 듣고나서 한참을 말을 못했다. 그는 마치 확연히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자고로 영웅은 미인을 짝으로 얻고, 미인은 영웅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는 부친과 형의 그늘에 쌓여서 지위는 높으나 아직 혁혁한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니, 미인의 사랑을 얻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혼잣말을 하면서 깊은 궁궐에 있는 부녀도 국토를 넓히려는 생각을 잊지 않았는데, 당당한 영윤으로써 오히려 그 책무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깊이 반성했다. 그는 여인의 지적을 받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스스로 맹서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급하게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바로 정(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식부인에게 사나이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영윤의 머리에서 정해진 이러한 황당한 결단으로 인하여 황당한 침략전쟁이 초나라의 역사에 기록되게 된다.
4. 수단의 둘: 외적과 전투에서의 한 전투
얼마되지 않아, 초나라의 영윤이 총사령관이 되어, 친히 정예병사를 이끌고, 전차 600승(乘)을 가지고 정나라를 토벌하러 간다. 그는 두어강(斗御强), 두오(斗梧, 若敖의 자손들)등의 대장을 전군주사령관으로 하고, 두반(斗班), 왕손유(王孫遊)등의 대장을 전후로 하여, 보무도 당당하게 정나라로 쳐들어갔다.
정탐요원이 초나라의 군대가 물밀듯이 밀려온다고 보고하였다. 전차소리가 수십리까지 울리며, 초나라의 대군이 함성이 하늘을 찌르고, 살기등등하게 정나라를 부숴버릴 것처럼 왔으며, 지구의 자전을 멈출 기세로 밀려왔다.
정나라의 군주인 정문공(鄭文公)은 긴급군사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정나라 대부(大夫) 도숙(堵叔)은 초나라의 병사가 강하므로, 승패를 가름하기 힘드니 강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매국노의 혐의를 받는 자들은 항상 강화를 거론한다. 사실 이것도 생존전략중의 하나이다.
또 다른 대장인 사숙(師叔)은 초나라가 강하기는 하나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나라는 마침 제나라와 연맹을 맺었는데,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면 제나라가 반드시 도와줄 것이며, 초나라가 침입하면 정나라는 견벽청야(堅壁淸野, 들판에 먹을 것을 남기지 않음)하고 기다리면 된다고 하였다.
정나라의 세자인 화(華)는 나이가 적고 혈기방장하여, 호기발랄하게 전쟁을 하자고 주장한다. 초나라군대가 오면 자신이 앞장서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말한다.
정나라의 재상인 정숙첨(鄭叔詹)은 이 세 사람의 의견을 들은 후, 대장 사숙의 의견을 따른다. 그는 아주 자신있게 말했다. 신의 견해로는 초나라병사가 얼마되지 않아 스스로 물러날 것입니다.
정문공은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영윤인 자원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오는데 어찌 가볍게 군사를 되돌릴 것이냐고.
정숙첨은 이렇게 분석했다. 초나라는 병사를 일으킨 이래, 600승이상의 전차를 동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이번에 영윤인 초자원이 대군을 친히 이끈 것으로 보이고, 정나라를 반드시 멸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은 스스로 마음이 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초나라의 대군을 동원한 것이고 이것은 절대 실패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을 보여준다. 그 목적은 모두 식부인에게 잘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숙첨은 정나라의 얼마되지 않은 부대로 하여금 내성의 양측에 매복하도록 시킨다. 그리고 내성의 성문을 열게 하였다. 성안의 백성들은 예전처럼 왕래하였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첫번째로 사용된 공성계(空城計)이다.
초나라군대가 쳐들어와서 600승의 전차를 이끌고 정나라의 수도까지 밀려왔는데, 조그만큼의 저지도 받지 않았다.
초나라의 선봉부대가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런 군사작전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 아주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무슨 속임수가 있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바로 최고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영윤인 초자원은 이를 듣고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친히 높은 곳에 올라서 내성을 둘러보았다. 성내에는 깃발이 많이 솟아 있고, 매복한 병사들이 은연중에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그는 등줄기가 서늘했다. 마침 선봉부대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앞장서서 뛰어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대에게 명을 내려 5리를 물러나서, 병영을 설치했다.
초자원은 그날 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정국의 토지에서 초나라 말을 사용해서 정나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마지막으로 기세가 충천한 초나라의 영윤은 중요한 지시를 하나 내린다. 정나라의 군주는 멍청이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정숙첨이 지모를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와 싸워볼 만하다. 그리고, 정나라군주는 정숙첨에게 모든 것을 맡겼으므로, 실제는 나와 숙첨의 싸움이다. 이번 정나라토벌은 원래 왕후에게 잘보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만의 하나라도 실패하면 식부인을 볼 면목이 없게 된다. 그래서 각군사지휘관들은 반드시 세번 생각하고 행동하고 절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준비없이 행동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여러 장수는 총사령관이 이렇게 말하자 더 이상 할말이 없게 되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정탐요원이 왔다. 정나라와 제나라의 연합군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초나라군대에는 불리한 내용이었다. 초나라 영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초나라군대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생긴 것이다. 그는 전체 군대에 명령을 내려서 몰래 철수하도록 한다. 만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일률적으로 죽여버리겠다고 한다. 여러 장수들은 불만스러웠다. 정나라까지 와서 화살하나 쏘지 않고, 창한번 내지르지 않고 철수하다니, 이것은 초나라 역사상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영윤은 더이상 반발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명을 내렸다. 전쟁도 정치이다. 우리의 대군이 정나라에 들어오면서 무인지경이었는데, 이는 정나라가 전혀 반격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우리 군대가 인의의 군대여서 약국에 대하여는 겁을 주고 그 마음을 얻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설명했다.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철수하는 길에, 600승의 전차는 가급적 소리내지 않으면서 물러났다. 정나라 국경선을 넘어서자, 그때부터 북을 치고 장구를 치면서 개선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초나라 수도에서 얼마남지 않게 되자, 영윤은 친히 칼을 들고 사람을 보내어 식부인에게 정나라에서의 승전을 고하게 하였다. 전황보고는 아주 대단했고, 글도 화려하였다. 특히 정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킨 대목에서는 더욱 대단하게 표현하였다. 사실 식부인은 이 플레이보이의 전쟁터에서의 행적을 다른 루트를 통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엇다. 그녀는 이런 역겨운 전황보고에 대하여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감사하다고만 말했다. <<동주열국지, 초성왕평란상자문>>을 보면, "영윤이 만일 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웠다면 마땅히 국민들에게 알리고, 태묘에 고해서 선조들의 영혼을 위로해야지, 하필 먼저 과부인 나에게 알게 하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플레이보이는 다시 한번 강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벽에 부딛쳤다. 그의 모든 행동은 식부인에게 잘보이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크게 일을 벌였는데도, 식부인은 조금도 이를 받아주지 않았으니, 번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5. 수단의 셋: 무뢰한의 진면목을 드러내다.
초무왕시절의 군정중신인 두백비(斗伯比)가 아직 살아 있었다. 두백비는 정직하고 공명정대한 사람이었으며, 지혜와 재주가 뛰어났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斗)씨집안이 초나라에게 아주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영윤의 지위에 있던 자원도 감히 지나치게 방종하지는 못했다. 초성왕6년(기원전666년)의 봄에 두백비가 병으로 사망했다. 자원은 그의 머리에 놓여 있던 올가미가 풀린 것같았다. 초성왕은 아직 어렸고, 초자원은 더욱 방약무인해졌다.
두번이나 자기가 잘 계획했던 일이 전부 식부인에게 먹혀들지 않게 되자, 호승심에 그 스스로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의 정복욕은 더욱 커져갔다. 그는 후궁밖의 국빈관에 자기의 행관을 만들었고, 식부인과 담장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지만, 식부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를 괴롭게 했다.
기회는 마침내 찾아왔다. 그는 식부인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들었다. 아마도 감기같은 작은 병에 걸린 것이었을 것이다. 이미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거리낄 것이 없었던 그는 무뢰한과 같은 행위를 하게 된다. 스스로는 낭만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병세를 살핀다는 핑계로, 후궁으로 들어가서, 3일간이나 머물고 나오지를 않는다. 더욱 웃기는 일은 가솔 수백명으로 후궁을 둘러싸고 물샐틈없이 방비했다는 점이다.
이때 어떤 대신이 이를 뚤고 궁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바로 대부인 두렴(斗廉)이었다.
초나라의 두(斗)씨가족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하기로 하자. 이 가족도 역시 왕족의 한 갈래이다. 초나라의 군주는 죽고난 후 시호(諡號)를 받지는 않고, 통상 오(敖)를 붙인다. 예를 들면, 초성왕 웅운(熊?)의 형인 3년간 재위했던 초은(楚垠)은 죽은 후에 시호는 없고, "도오(堵敖)"로 불리게 된다. "도(堵)"는 그가 묻힌 곳의 지명이고, "오"는 바로 추장수령이라는 뜻이다. "약오(若敖)"는 초나라의 첫번째 임금인데, 바로 초무왕의 먼 조상이다. 약오의 후손은 두씨(斗氏)와 성씨(成氏)로 나뉘었다. 두씨가족은 초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명문세가이고, 거의 초나라의 군사력을 장악했었다. 왕권이 쇠약할 때는, 어떤 때는 군권보다 강하기도 하였고, 거의 초왕과 다툴 정도가 되었다. 예를 들어, 초무왕때, 두민(斗緡)의 전횡을 다른 제후를 본받을 정도가 되었다. 바로 두씨가족의 배경이 있으므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 무왕,문왕시대에 두백비, 두렴, 두단(斗丹), 두기(斗祁)등의 약오의 후손들이 초나라의 크고작은 군사업무에 참여했다. 이번 자원 영윤이 정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도 두씨가족들이 선봉에 섰었다.
이 가족에는 무장을 많이 배출했고, 그 관직도 사사(射師)가 많았다. 이 관직은 원래 후예(后?)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후예는 바로 유명한 궁수이다. 주나라때 이미 정식관직이 되었고, 청나라에까지 이어졌다.
두렴은 후궁으로 뚫고 들어가 후궁의 침상에까지 이르렀다.
영윤이 식부인의 침대곁에서 동경에 수염을 가다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렴은 화를 삭이지 못하였으나, 억지로 참고 그와 다투었다. <<동주열국지. 초성왕평란상자문>>에는 두렴이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 있다. "왕후의 존귀함은 동생이나 형이라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영윤은 비록 동생이지만 역시 신하입니다. 신하가 궁궐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야 하고, 신하가 묘를 지날 때도 역시 공손해야 하며, 그 땅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경이 될 것인데, 하물며 그 침소야 어떠하겠습니까" 이 말은 아무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평민의 가에도 남녀유별하고, 신하에게는 신하의 도리가 있는데, 어찌 과부가 된 형수를 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영윤으로써 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건물을 짓고 이로써 식부인에게 잘보이려 하는 것은 그래도 아직 문명적이다. 그리고, 대군을 이끌고 정나라를 친 것도 남자로서 여인에게 사랑을 나타내려 한 것이지만 아직은 귀여운 측면이 있다. 이 두번의 행동으로도 전혀 식부인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식부인의 미색을 탐하여, 더 이상은 핑계를 만들지 않고 천하인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바로 후궁으로 뛰어들어 과부와 동거한 것이니, 이는 완전히 천하의 무뢰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두렴의 말은 바로 영윤인 초자원의 약하고 아픈 곳을 찔렀다. 그는 소리쳤다. "이것은 집안 일이다. 너와 관계없고, 두사사께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가솔을 불러, 두렴을 묶게 하였다.
이 사건은 마침 초성왕 6년에 발생한다. 만일 초성왕이 11살 내지 12살에 등극하였다고 한다면 나이가 이미 17,18세가 된 것이다. 6년간의 정치적인 훈련을 받아, 어느 정도 경험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물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가 생겼을 것이다. 영윤이 후궁을 포위하고, 모후와 동침하려는 것에 대하여 그는 즉시 보고받았을 것이다. 3일간이나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는 아마도 집안의 추한 일을 외부에 드러내기 싫어서가 아닐까? 아니면 영윤의 세력이 너무 커서, 금방 뒤집기 힘들어서 일 수도 있다. 조금만 잘못하면 이 숙부가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3일동안 젊은 초왕은 은인자중하면서 여러가지 대책을 세운 것같다. 두사사가 왜 3일이 지나서 후궁을 뚫고 들어갔을까? 누가 시킨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일시적인 충동적행위일까? 만일 초왕이 약오씨가족의 세력을 이용하여 영윤의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면, 약오씨가족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겁내지는 않았을까? 영윤과 약오씨가족중 젊은 왕은 누구를 택하여야 했을까?
영윤이 두렴을 묶은 후에 사건은 질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두씨가족은 영윤의 일당의 눈을 벗어나서 차기 영윤이되는 두곡우도(斗谷于?)와 비밀리에 초왕을 만난다. 젊은 왕을 핍박하여 빠른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한다.
역사가들은 이 삼일을 기록하면서 그저 두렴은 영윤이 식부인의 침상옆에서 수염을 가다듬는 것을 보았다고만 적고 있다. 이 우아한 모습은 회의감이 들게 만든다. 두렴이 후궁으로 뚫고 들어갔고, 후궁은 원래 초자원에 의하여 물샐틈없이 포위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 영윤은 한가하게 수염이나 가다듬으면서 두렴을 기다릴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가?
초자원이 식부인의 후궁에서 식부인과 함께 침상위에 있던 것은 아닐까? 역사가들은 고의로 애매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만일 식부인이 영윤을 좋아했다면, 이후에 발생한 혈안은 성립되기 힘들다. 만일 영윤에게 협박당하여 그의 뜻에 따른 것이라면 3일이나 지나서 행동을 취할 이유도 없다. 식부인은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이 돌발사건을 초왕에게 보고했었던 것같고, 아마도 문제해결방안을 건의했던 것같고, 이것은 초왕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초왕은 묵인을 했다. 초왕은 묵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 자기가 후사를 처리하는데 되돌아올 여지가 생긴다. 약오씨가족은 초나라에서 아주 위망이 대단한 가족이었고, 초자원은 어쨌든 여러해동안 영윤의 직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왕은 암암리에 진땀을 흘렸을 것이고, 두 정치세력이 서로 부딛치는 것을 보았고, 그는 이기는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두씨가족은 재빨리 움직였다. 영윤이 정나라를 토벌할 때의 주력선봉부대인 두오, 두어강등은 바로 영윤의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사사의 아들인 두반 역시 두씨가족의 사가부대를 이끌고 방패와 보검을 들고 후궁을 침입했다. 이때 궁녀를 끼고 잠을 자고 있던 영윤은 후궁이 소란스럽자 눈을 뜨게 된다. 느긋하게 차를 마셔서 정신을 가다듬는다. 바로 꿈에서 깨어날 때, 두반이 쳐들어왔다. 영윤은 이 상황을 보고 대경실색했을 것이며, 쳐들어온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두반이 보기에 이 자는 부친을 묶은 원수이며, 원수를 만났으므로 두 눈은 더 붉어졌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 명분을 필요로 했고,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았다. 두반은 이때, 영윤과 다시 한번 논쟁을 벌여야 했다. 난신적자라고 욕하고 상대방은 반박했다. 네가 오히려 난신적자라고. 두반은 준비되지 않은 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윤은 일찌감치 가슴에서 피를 쏟고 있었을 것이다.
영윤은 황급히 초나라의 관복을 입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수염도 가다듬었다. 그리고 보검을 꺼내서 두반과 후궁의 광장에서 싸웠다. 칼바람이 여러번 소리난 후, 나이든 영윤의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가솔들은 주공이 이렇게 죽자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랑에 눈멀었던 초나라의 영윤은 이렇게 종전의 식부인, 지금의 문부인의 미모에 홀려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6. 역사는 승리자에 의하여 쓰여진다.
역사는 승리자의 몫이다.
식부인의 나이를 우선 계산해보자면, 초문왕은 문왕6년에 식부인을 차지했다. 이전에 그녀는 일찌기 식후와 3년간 생활했다. 그녀와 식후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옛사람들의 시집가는 나이를 계산해보자면 식부인이 시집간 것은 대체로 13-15세사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식부인이 초문왕의 부인이 된 것은 개략 16-18세경일 것이다. 초문왕은 15년가량 재위했으므로 그녀의 나이는 30-33세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초나라의 영윤을 빠져들게 한 것은 아마도 그녀의 미모자체는 소녀시대보다 못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기품은 용모의 아름다움보다 더욱 흡인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의 이전의 명성때문에 초자원은 더욱 정복욕을 가졌을 것이고, 얻으려고 하나 가질 수 없게 되자, 더욱 깊은 늪으로 빠져들게 된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초나라의 영윤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그렇게 이상한 행동들을 나타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처럼 고위직에 있던 사람도 중년부인에게 눈이 팔려서 통상인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는 점은 아무래도 이상하기는 하다.
기원전 675년부터 기원전 672년까지, 식부인은 남편(초문왕)의 죽음, 장남 웅은(도오)의 죽음을 겪었다. 기원전671년에는 초성왕이 왕위를 승계했는데, 식부인은 다시 한번 궁중음모에 말려들게 된다.
가장 유명한 것은 두 아들간의 왕위경쟁이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해진다. 장남 웅은이 즉위하였는데, 역사서에서는 그를 개말과 같은 존재라고 적고 있다. 하루종일 놀기만 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동생인 웅운의 사람됨에 대한 평가가 괜찮았으므로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웅운을 죽이려 했다고 한다. 한번은 내란이 일어나서 웅운을 대신이 추살된 적도 있다. 3년후 웅은이 피살된다. 웅은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게 되자 임금의 예로서 장사지내지 않고 그저 "도오"가 된다.
초문왕이 죽을 때, 그의 장남이 즉위했을 때는 겨우 11,12살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웅운도 겨우 10살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명성이랄 것이 있겠는가. 초성왕이 즉위할 때도 겨우 13살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웅은에 대한 여러가지 나쁜 말들은 사실과는 다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일단 임의로 고쳐지게 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뭐라고 적게 된다. 이를 바로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영윤이던 초자원은 이 일과 절대 관련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도오를 무너뜨리고 웅운을 세우는데 핵심적인 인물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사변후에 그는 초나라의 국정을 한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이런 정치인물도 세력을 잃은 후에는 그의 모습이 백치중의 백치처럼 역사서에 그려지게 되었다.
초자원이 죽은 후 초나라에는 가장 강력한 영윤인 자문(子文)이 등장한다. 그는 약오씨가족의 자손이며, 제나라의 관중에 비견할 만하다. 이런 강력한 인물은 전임자를 깍아내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나쁜 내용을 덮어씌우게 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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