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족"이라는 용어는 지금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지만, 자세히 계산해보면 겨우 105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이다.
양계초가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기 이전에 중국인들은 기본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민족개념이 없었다. 심지어 "민족"이라는 용어도 사용해본 적이 없다. 습관적으로 말하던 "화하(華夏)", "한인(漢人)", "당인(唐人)", "염황자손(炎黃子孫)"이나, 외국인들이 중국을 칭하면서 쓰던 "대진(大秦)", "진단(震旦)", "지나(支那)"등은 모두 현대적인 의미에서 민족국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화이지변(華夷之辨)", "이하지방(夷夏之防)"이라는데서 소박하고 편협한 종족의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 특히 1894년 청일전쟁이후, 망해가는 나라를 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사상가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문제에 대하여 새로 사고하게 만들었다. "보국(保國)", "보종(保種)"의 호소아래에서 엄복(嚴復)의 <<천연론(天演論)>>은 세계민족간의 일종의 상호경쟁이라는 족군이념을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다른 종족의 단결(合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복은 서방의 민족주의이념을 더 구체적으로 전하지는 않았다. 양계초는 엄복의 "보종" "합군"이라는 생각의 노선을 따라, 점점 현대민족주의이론으로 문제를 사고하기 시작했다. 1898년 가을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간 후에 비교적 시스템적으로 유럽의 민족주의서적을 공부하고, 중국의 현실에 맞추어, 민족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1899년, 양계초는 <<동적월단(東籍月旦)>>이라는 글에서, 유럽세계사저작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 아주 새롭게 "민족(民族)"이라는 용어를 내놓는다. 이후, 그는 다시 민족진화와 경쟁이라는 이념에서 출발하여, 대담하게 민족주의는 근대역사학의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는 <<신사학(新史學)>>이라는 책에서 명확하게 이렇게 말한다: "역사라는 것은 사람들 무리의 진화의 현상을 서술함으로써 공정한 도리 공정한 사례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 무리의 진화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민족진화이다. 양계초의 민족관념은 이론적으로 승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1901년, 양계초는 <<중국사서론(中國史敍論)>>를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중국민족(中國民族)"이라는 개념은 내놓는다. 그리고 중국민족의 변화를 세 시대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첫째, 상고사(上古史). 황제로부터 진나라의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중국의 중국이었다. 즉, 중국민족이 발달, 경쟁, 단결하는 시대였다.
둘째, 중세사(中世史). 진나라의 통일로부터 청나라 건륭말년까지는 아시아의 중국이었다. 즉 중국민족이 아시아 각 민족과 교류, 경쟁, 전쟁을 하던 시기이다.
셋째, 근세사(近世史). 건륭말년으로부터 지금까지로, 세계의 중국이다. 즉, 중국민족이 전아시아민족과 함계 서방과 교류, 경쟁하는 시기이다.
양계초는 여기에서 세번이나 중복하여 "중국민족(中國民族)"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거시적으로 3개시기의 서로 다른 특징을 끄집어냈다. 이것은 분명히 오랜 시간동안의 사고를 거쳐 얻은 결론이다. "중국민족"의 기초위에서 1902년 양계초는 정식으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중국학술사상변천의 대세를 논함>>이라는 글에서 먼저 "중화(中華)"라는 용어를 설명한다. 거기에서 "오대주중에서 가장 큰 주에 있고, 그 주에서 가장 큰 나라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이다. 인구가 전세계인구의 삼분의 일을 점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이다. 4천여년동안 역사가 중단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이다."라고 적었다.
이어서, 양계초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학술사상지위를 논술하면서, 정식으로 "중화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거기에서, "제(齊)는 해국(海國)이다. 상고시대에 우리 중화민족가운데 해권사상을 가진 사람은 모두 제나라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두 가지 관념이 나왔다. 하나는 국가관이고 하나는 세계관이다"
"보종", "민족"에서 "중국민족, 다시 "중화"에서 "중화민족"까지, 양계초는 기본적으로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중화민족"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경우이고, 이 단어는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양계초가 이 말을 처음 쓸 때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어떤 때는 한족을 가리키고, 어떤 때는 중국의 모든 민족을 가리켰다. 1903년에 <<정치학 대가 블룬칠리(Bluntschli)의 학설>>이라는 글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과학적인 의미를 밝혔다: "우리 중국에서 민족을 언급할 때에는 소민족주의 이외에 대민족주의를 더욱 제창하여야 한다. 소민족주의자는 한족을 국내의 다른 민족에 상대하여 보는 것이다. 대민족주의자는 국내의 여러 민족을 합쳐서 다른 국외의 민족들과 상대하여 보는 것이다. 한, 만, 몽, 회, 묘, 장을 다 합쳐 대민족을 구성해야 한다"
1905년, 양계초는 다시 <<역사상 중국민족의 관찰>>이라는 글에서, 역사변화의 각도에서 중국민족의 다원성과 혼합성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중화민족은 처음에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었고, 실제로는 다민족이 혼합하여 이루어졌다" 이로써 양계초는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를 형식뿐 아니라 내용까지 혁명적으로 창조해냈다. 이것이 바로 중화민족이라는 중국내의 모든 민족을 가르키고, 한만몽장회의 모든 민족을 하나로 묶고 다원적으로 통합한 단어인 것이다.
양계초의 지위와 영향력으로 인하여, "중화민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유학중국학생회가 발간한 간행물, <<절강조(浙江潮)>>, <<강소(江蘇)>>, <<이십세기지지나(二十世紀之支那)>>이건 <<민보(民報)>>, <<국민보(國民報)>>, <<동자세계(童子世界)>>이건간에 모두 민족주의 및 중화민족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토론을 전개했다. 양도(楊度)라는 아주 수준높은 사상이론가도 토론에 참여했고,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밝혔다. 양도는 1907년에 발표한 <<금철주의론(金鐵主義論)>>이라는 글에서 중화민족의 의미에 대하여 상세하게 해설하였다. 양도의 뛰어난 점은 민족의 혈통의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그는 중화민족은 사실 하나의 종족융합체이며 차라이 문화공동체(文化共同體)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의 일체성, 응집력 및 불가분성은 중화민족이라는 대가정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손중산, 장태염(章太炎)과 같은 혁명당 인사들은 "혁명을 통하여 만주족 정권을 타도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원래 민족융합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양계초, 양도와 같은 대학자들의 영향하에 부득이 민족단결과 민족평등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중화민국이 수립되었고, 손중산은 "오족공화(五族共和)"의 이론을 내세우는데, 이것은 현대민족주의를 실질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중화민족이라는 다민족공동체이념은 점차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들었고, 중국인들의 컨센서스를 이루게 되었다.
'중국의 역사분석 > 중국역사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 중국 양대 극비기술의 해외유출경위 (0) | 2007.12.07 |
---|---|
황제의 급여 (0) | 2007.12.05 |
중국역사상의 벽(癖) (0) | 2007.03.30 |
중국 역사상의 공처가 (0) | 2007.03.28 |
역사상 10대 전쟁상패국(戰爭常敗國) (0) | 2007.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