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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 역사상의 공처가

by 중은우시 2007. 3. 28.

 

중국최초의 공처가는 누구일까? 원목(袁牧)이 고증한 바에 의하면 전제(專諸)라고 한다. <<월절서(越絶書)>>에는 이런 말이 남아 있다: "전제는 다른 사람과 싸울 때, 만명의 남자라도 못당할 기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처가 부르는 소리만 들리면, 바로 돌아갔다. 이 어찌 구내(懼內, 안사람을 두려워함. 즉 공처가)의 남상(濫觴)이 아니겠는가?"

 

<<월절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자서(伍子胥)는 전제가 많은 사람들과 싸움하는 것을 보았는데, 처가 나와서 그를 부르자, 바로 얌전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오자서는 기이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만부(萬夫)도 당할 수 없는 기운을 가진 사나이가 어찌 한 여인에게 붙잡혀 산단 말인가? 그러자, 전제가 대답했다. "한 여인의 손아래 굴복할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만부(萬夫)의 위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오자서는 전제를 오공자 광(합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전제는 오왕 료를 어장검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전제는 진정으로 철혈유정(鐵血柔情)의 사나이였고, 이후 중국의 많은 공처가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남자들은 왜 부인을 두려워 하는가? 청나라때의 소설인 <<팔동천(八洞天)>>에서는 작가가 재미있게 분류해놓았다. 부인을 두려워 하는 것은 세가지인데, 세력을 두려워하는 것(勢), 이치를 두려워하는 것(理), 정을 두려워하는 것(情)이 그것이다.

 

"세파(勢)"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1) 처의 고귀함을 두려워하는 것, 즉 처의 문벌을 우러러 보는 것, (2) 처의 부유함을 부려워하는 것, 즉, 처의 재물이 많음으로 인한 경우, (3) 처의 사나움으로인한 경우, 처로부터 맞거나 욕먹지 않기 위한 것.

 

"이파(理)"에도 세 가지가 있는데, (1) 처의 현숙함을 공경하는 것, (2) 처의 재주에 굴복하는 것, (3) 처의 힘든 점을 헤아리는 것.

 

"정파(情)"에도 세 가지가 있는데, (1) 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기 때문, (2) 처의 나이어림을 생각하기 때문, (3) 처의 교태를 못이기기 때문이 있다.

 

개괄하자면, 원인은 첫째, 능력이나 지위가 낮은데서 오는 처에 대한 두려움, 스스로 모자란다고 부끄러워하는데서 오는 두려움, 사랑하는데서 오는 두려움이 있다. 아주 재미있는 점은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처지가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쁘거나)에 공처가가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한나라때 황제중에 한성제는 유명한 공처가였다. 이 평범한 황제는 마침 극성인 조비연 자매를 만난다. 이 자매중 유명한 사람은 당연히 언니인 조비연(趙飛燕)이다. "연수(燕瘦, 조비연처럼 마르고 날씬한 것)"은 중국미인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언니는 그저 풍류적인 꽃병에 불과했고, 진정한 '우물'은 바로 동생인 조합덕(趙合德)이었다. 그녀의 "일곡이뇨삼상조(一哭二三上弔, 첫번째는 울고, 그래도 안되면 두번째는 소란을 피우고, 그래도 안되면 세번째는 죽는다고 목을 맨다)"의 수법에 이 성실한 한성제는 그저 굴복하고 그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수당시대에는 공처가가 가장 많았다. 수문제의 독고왕후는 가장 유명한 모사자(母獅子)였다. 역사서에는 독고왕후가 집안도 뛰어나고 글읽기도 좋아하고 말도 잘하여, "제심총탄지(帝甚寵憚之, 황제가 심히 총애하면서도 꺼려하였다)"하였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총애하였다는 말은 이해가 쉬우나 꺼려하였다(憚)는 말은 아주 재미있다. 사랑하면서도 무서워했다는 말이 된다. 그녀는 나중의 무측천과 마찬가지로 황제와 같은 지위를 누렸다. 궁중에서는 "이성(二聖)"이라고 불렀다. 수문제가 조회를 열때면 그녀는 반드시 수문제와 같은 가마를 타고 갔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와 같이 앉아서 정사를 돌보지는 않고, 장막뒤에서 환관을 보내어 한편으로는 감독하며, 수문제가 조금만 잘못하는 것같으면 바로 쪽지를 들여보냈다. 조회를 마친 후에는 함께 침궁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그녀가 내조를 잘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감시하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수문제는 후궁을 두지 못했다. 한번은 수문제가 어떻게 틈을 냈는지 미인으로 소문난 위지형의 손녀와 몰래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 독고황후에게 발각된 후, 수문제가 조회에 들어갔을 때, 독고황후는 바로 그녀를 죽여버린다. 수문제는 돌아와서 이 소식을 듣고 독고황후에게 화를 감히 내지 못하고, 오히려 집을 떠나 나가버린다. 신하들이 급히 쫓아가서 만류하자, 수문제는 울면서, "나는 황제인데도, 아무런 자유도 없다"고 말한다. 신하들이 겨우겨우 설득해서 수문제는 궁중으로 돌아온다. 독고황후도 사건이 너무 커진 것같자, 수문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이미 불쌍한 위지미인은 죽고 없어진 다음이었다.

 

오대시절에는 왕경(王景)과 후소사(侯小師)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후소사는 유명한 기녀였다. 어느 장교 하나가 그녀와 가까이 지냈다. 이 장교를 따라 오던 병사중에 왕경이 있었다. 왕경은 당시 지위가 낮아서 그녀와 가까이 하지 못했다. 이후 왕경은 계속 공을 세우고 승진하여 석경당의 대장으로 승진한다. 석경당이 왕경에게 무엇이든 원하면 하사할테니 얘기하라고 하자, '후소사'를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후소사는 왕경의 부인이 된다. 일반소설같으면 '그리하여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하면 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후소사는 왕경을 무시했고, 왕경이 그에게 가져다 주는 금은보화는 모두 정부에게 주어버렸다. 왕경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계속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송나라때는 소동파가 하동사(河東獅)라는 공처가에 관련된 성어를 만들어낸다. 그는 친구인 진계상을 놀리는 시를 짓는데 다음과 같다.

 

용구거사역가련(龍邱居士亦可憐)

담공설유야불면(談空說有夜不眠)

홀문하동사자후(忽聞河東獅子喉)

주장낙수심망연(柱杖落手心茫然)

 

용구거사(진계상)은 아주 가련하구나.

밤새도록 불교의 진리에 대하여 토론하다가도

하동(진계상의 처 유씨가 사는 곳을 의미함)의 사자후가 들리기만 하면

지팡이도 손에서 떨어뜨리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구나.

 

명나라때 척계광도 유명한 공처가이다. 그는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명성이 혁혁한 장군임에도, 부인이 오기만 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곤 했다. 부하들이 이런 모양을 보고는 모두 불만을 품고, 부인을 한번 혼내주라고 권했다. 척계광도 부하들이 이렇게 자극을 주자 병사를 보내어 부인에게 군영으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고, 군영내에는 부하들로 하여금 갑옷을 다 차려입고 기다리게 하였다. 부인이 도착해서 척계광을 보고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물었다. "날 왜불렀어?" 그러자 척계광은 안색이 변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부인께 열병식을 구경시켜드리려구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