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황제의 급여

중은우시 2007. 12. 5. 18:46

글: 이개주(李開周)

 

황제시대때, 황제는 오너이고, 모든 관리는 그의 직원이다. 직원의 급여는 오너가 주는데, 오너의 급여는 누가 주는가?

 

오너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급여는 받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기업에서도 회장은 이익배당을 받는 외에, 급여도 받지 않는가? 황제도 권위외에 "호용(好用)"이 있었다. "호용"은 바로 황제의 급여이다.

 

북송을 예로 들면, 송태종 조광의 이래로, 거의 모든 황제는 1200관(貫)의 "호용"이 있었는데, 매월 같았다. 그래서 거의 월급과 같았다. "거의 모든 황제"라고 한 이유는 중간에 송인종(宋仁宗)이 있는데, 규정대로라면 그도 매월 1200관의 월급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오너의 풍모를 보이면서 스스로 그 돈을 포기했다(송사. 지제132. "인종황제는 좌장고에 매월 1200민이 들어오는 것을 그만두도록 명했다")

 

급여를 포기하지 않은 송태종, 송진종과 같은 사람들은 황제로서, 스스로 급여청구를 하기는 쑥스러웠나보다. 그리하여 매월 지급받는 1200관을 모두 "좌장고(左藏庫)"에서 보내왔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황제는 급여를 "좌장고"에서 수령했다.

 

좌장고는 수나라 당나라때도 있었다. 태부시(太府寺)의 하부기관이다. 태부시는 천하의 재물과 부세(賦稅)를 담당한다. 그리하여 천하의 재물과 부세는 태부시에 저장된다. 송나라초기에는 태부시를 두지 않았고, 오대의 관례에 따라, 염철(鹽鐵), 탁지(度支), 호부(戶部)의 삼사(三司)를 두어 국가의 재정관리를 맡겼다. 좌장고는 바로 삼사의 아래에 있었는데, 우장고(右藏庫), 내장고(內藏庫)와 함께 염철의 전매, 탁지의 잉여자금, 호부의 부세, 황제장원의 조세, 각지방장관의 진공, 각 부속국가의 진공 및 각종 전매사업에 따른 화폐와 실물에 대한 수지관리를 맡았다. 그 중에서 황제장원의 조세, 지방의 진공, 부속국의 진공과 궁중이 주재하는 전매수익은 모두 좌장고가 관리했으며, 이러한 재물은 모두 좌장고에 집중되어 경성의 관리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어전시위들에게 급여을 주거나, 태자/공주/후비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고, 황제에게 급여도 주는 것이다.

 

좌장고에 들어가는 수입원을 보면, 황제장원의 조세와 각종 진공은 금액이 얼마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입은 전매(專賣)를 통해서 발생한다. 황제시대때 자주 나타나는 전매품은 염(鹽, 소금), 철(鐵, 쇠), 차(茶), 주(酒, 술)류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정부재정에 속하고, 궁정재정에 속하지는 않는다. 전매수익이 아무리 많아도, 좌장고에 집어넣지는 못한다. 좌장고에서 이용할 수 있는 전매품은 토지(土地)였다. 송나라이후, 원, 명, 청의 세 황조에는 모두 "누점무(樓店務)"라는 기관이 있었다. 이 기구는 토지전매기구였다. 이 기구는 궁정의 수권을 받아, 도시지역, 특히 도성안의 국유토지에 대하여 임대사업을 하거나, 개발후에 재임대하여, 매년 대량의 임차료를 받았다. 받는 임차료는 지방에 일부를 나눠주고 대부분 좌장고로 들어왔다. 송태종때, 누점무는 "벌어들인 돈으로 황궁의 이런 저런 비용을 댔는데, 매일 수백, 수천이었다"

 

소위 명군으로 이름난 황제들은 모두 자신이 "세금을 늘여서 돈을 거두지 않는다"고 표방했다. 그들이 돈을 모은 방법은 정말 간단했다. 토지를 빼앗아서, 국유라고 하고는 이것을 가지고 임대사업을 벌인 것이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수익창출이겠지만, 백성의 입장에서는 착취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