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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고대 중국 양대 극비기술의 해외유출경위

by 중은우시 2007. 12. 7.

글: 장계합(張繼合)

 

자기(瓷器)와 비단(絲綢)은 중국의 이대 발명품이다. 이 두 물건은 고대중국의 무역에서 '독문절학'이었다. 이것으로 벌어들인 황금과 백은이 상자를 이루었고, 이로 인하여 '자기의 나라', '비단의 나라'라는 명칭을 얻었다. 천하의 그 누가 '비단길(The Silk Road)'와 '자기길(The China Road)'를 모르겠는가? 당연히 이 두 길은 중국인들이 자화자찬하는 것이 아니고, 서방의 학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비단길'은 육지교통로이다. 독일지질학자인 Ferninad von Richthofen이 1877년에 제안한 것이다. 그는 7차례에 걸쳐 이 길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왔고, 3권짜리 <<중국>>이라는 책도 썼다. '자기길'은 해상항해로이다. 기원은 당나라 중후기이며, 당시 중국과 외국의 통상은 이 해상노선을 주로 이용했다. 자기는 비단과는 달리 서로 부딛치면 깨지기 쉽기 때문에 해상운송이 더욱 적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길'은 '해상비단길'이라는 명칭도 붙어 있다.

 

산업혁명이 도래하기 전에, 중국은 무역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입장에 놓여 있었고,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이는 모두 비단과 자기라는 두 가지 명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쉽게도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비단과 자기라는 국보급인 극비기밀이 차례로 해외에 유출된 것이다. 중국은 기술강국, 제조강국 및 경제강국의 지위에서 신속히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극비기술은 어떻게 하여 유출되게 된 것일까?

 

비단.

 

먼저 비단을 얘기해보자.고대중국은 세계에서 최초로 양잠(養蠶), 실을 뽑는 기술, 비단을 직조하는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은 중국을 "사이리스"라고 불렀는데 이는 "비단의 나라"라는 의미였다. 사실 양잠과 실을 뽑는 것은 비단을 만드는 핵심기술이다. 역대정권은 비단제작기술, 특히 양잠기술에 대하여 아주 엄밀하게 극비로 유지했다. 서한(西漢)때, 뽕나무와 누에는 외국으로 가져나갈 수 없도록 했다. 비록 귀족이나 고관이라고 하더라도 몸수색을 자세히 하고 내보냈다. 조그만치도 해외로 운반해나가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고대로마의 대노예주들은 중국에서 수출한 비단을 무상의 보물로 여겼다. 5세기까지, 그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빛나며 부드러운 가는 실이 누에의 입에서 뽑아져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비단제품에 대하여, 역대조정은 아주 엄격하게 단속했다. 심지어 청왕조는 수출을 엄격하게 제한하기도 하였다. 건륭황제는 일찌기 명확하게 규정한 바 있다: 서양상인이 사갈 수 있는 수량도 제한을 하고, 등급이 낮은 '호사(湖絲)'만 거래하며, 고급의 호사나 비단제품은 해외수출을 금지시켰다. 한마디로 하면 상급제품은 중국내에서만 쓴다는 말이다.

 

이 기술을 노리는 외국인은 수천수만이었다. 그중에서 성과를 거둔 사람들은 서역사람들이다.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의 기록에 의하면, 쿠스타나국의 국왕은 자기 나라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기르기를 아주 희망했다. 그리하여 "동국(東國)"에 뽕나무와 누에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동국"국왕은 누에를 밀반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국경초소마다 출국하는 사람을 엄격하게 검사하도록 하였다. <<대당서역기>>에는 "동국"이 어느 곳을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쿠스타나국의 동쪽에 있는 작은 나라 혹은 북위(北魏)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목적달성을 위하여, 쿠스타나국의 국왕은 "동국"과 혼인을 제안한다. 허락을 받은 후, 신부를 데려오는 사신을 보내면서 비밀리에 공주에게 알려서 몰래 뽕나무종자와 누에종자를 가져오도록 부탁한다. 결국 공주는 뽕나무종자와 누에종자를 모자에 넣어서 온다. 출국시 공주까지는 자세히 수색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비단제작의 핵심기술이 몰래 국경을 넘어 서역에 전파된 것이다. <<대당서역기>>에는 또한 "현재 마나사좌 잠신묘안에 몇 그루의 옛날 뽕나무가 있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바로 동국의 왕녀가 가져온 종자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자기

 

자기는 네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첫째, 재료는 반드시 자토(瓷土)여야 한다. 고온으로 구운 후에 하얀 색이나 투명 혹은 반투명색이 나야 하며, 자기는 물을 흡수하지 않는다. 둘째, 재료는 반드시 섭씨 1200-1300도의 고온으로 구워서 만든다. 셋째, 표면의 '유약'은 반드시 고온하에 자기와 함게 구워지는 유리질흙이어야 한다. 넷째, 완성품의 재질은 반드시 단단하고, 세밀하며, 맑은 금속성이 나야 한다. 중국은 이 신비의 기술을 죽어라 천년이상 비밀로 유지하고 있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러 중국자기는 서방으로 건너간다. 가장 인기를 끌었던 것은 용천(龍泉)의 청자가 프랑스에 등장한 일이었다. 용천청자는 맑고 깨끗한 색채와 질감으로 프랑스인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처럼 맑고 깨끗한 보배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자기는 시종 유럽인들의 사치품이었다. 일찌기 수당시기에, 중국자기가 국외로 흘러들어간 일이 있다. 옛날 유럽사람들은 침을 흘리면서 자기를 가지고 싶어했다. 중국자기는 황금보다 비쌌다. 그리하여 재산, 지위, 품격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독일에서 아우구스투스2세는 일지기 "자기장사'를 한 적이 있다. 1717년, 그는 600명의 완전무장한 색슨기병을 주고 프로이센 빌헬름2세의 127개의 중국자기와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럽 각국은 모두 '자기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인 디비스가 쓴 <<유럽자기사>>를 보면, "거의 모든 18세기동안 진정한 자기제작기술은 여전히 비밀로 엄수되어 왔다"고 적고 있다. 당시 전세계에서 이 선진기술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단지 중국뿐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일찌감치 동한시대부터 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에까지 왔던 베니스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득의만면하여 돌아갔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책을 써서 동방국가의 강대함, 번영 그리고 재산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는 1298년에 세상에 나온다. 이 책은 비교적 상세하게 중국자기의 가장 기본적인 제작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바로 눈이 벌개져서 소매를 걷어부치고, 모방해보기 시작한다. 아쉽게도 기술은 기술이다.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생고생하면서 400년을 연구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자기제작의 비결을 알게 되었다. 1708년 1월 15일, 베트거라는 독일인이 마침내 진정한 백자를 구워낼 수 있었다. 이날이 유럽자기의 탄생일이다.

 

중국은 비단과 자기라는 두 가지 국가극비기술을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 경제강국, 문화강국은 점차로 역사의 낙조속으로 걸어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