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반옥량(潘玉良) : 기녀에서 화가로

by 중은우시 2007. 8. 17.

글: 중화유산

 

2007년 8월 16일, 북경수도박물관은 화가 반옥량의 200폭의 멋진 작품을 전시하여, 적지 않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다. 반옥량을 잘 아는 문인묵객들이 앞다투어 와서 감상하고 있고, 그림 앞에서 서로 평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반옥량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약간 안다고 하더라도, 그저 홍콩배우인 이가흔(李嘉欣)이 연기한 드라마 <<화혼(畵魂)>>에 나온 반옥량에 대한 약간의 내용일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반옥량은 도대체 어떤 여인인가?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갔는가? 왜 그녀가 사망한지 여러해가 지난 이후에야 그녀의 그림이 이처럼 주목을 받는가?

 

필자는 도서관에서 반옥량의 일생을 소개한 글을 보았다. 아주 자세하게 쓰여 있었는데 비참했다. 반옥량의 원래 이름은 진옥청(陳玉淸)이라고 하는데, 장옥량(張玉良)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녀가 장옥량이라고 불리울 때 그녀는 청루(靑樓)의 기녀였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녀를 구해내주었고, 그녀는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당시에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다. 기녀가 자유롭게 풀려나는 일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워가 그다지 특별한가. 이 장옥량이라는 청루기녀는 지분을 물감으로 바꾸어 다시 한번 자신의 생명을 색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이 과정은 마치 소설과도 같다.

 

장옥량은 양주(揚州) 사람이다. 양주는 원래 미녀가 많이 나는 곳이다. 그러나, 장옥량은 그다지 아름답게 생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1살때 부친이 죽었고, 두 살때 그녀의 언니가 죽었다. 8살이 되었을 때 모친이 죽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고아가 되었다. 그녀가 고아가 되자, 외삼촌이 그녀를 거두어 주었다. 이 외삼촌은 그녀의 친외삼촌이다. 그러나, 이 친외삼촌은 약간 나쁜 사람이었고, 장옥량이 14살이 되자, 더 이상 그녀를 기르지 않고, 그녀를 안휘(安徽) 무호(蕪湖)의 한 기원에 팔아넘겼다. 기원에 들어가면 모두 새로 이름을 얻게 된다. 장옥량은 바로 그녀가 기원에 들어가면서 얻은 화명(花名)이다.

 

[자화상]

 

17살이 되던 해의 어느날 밤은 반옥량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그녀는 기원대청에서 <<복산자>>를 부르고 있었다. "이 풍진 세상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도 전생의 인연이 잘못되었나보다. 꽃이 지고 꽃이 피는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고, 모두 조물주에 의지하는 것이다. 가려면 어차피 가야 하는 것이고, 머물려면 또 어떻게 머물 것인가. 산의 들꽃을 머리에 가득 꽂았으면, 돌아갈 건지 묻지를 말아라" 그녀의 맑은 강한 목소리는 기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기원의 여인은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가지는데, 그녀의 노랫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거칠고 컸다. 이런 목소리는 화목란이 부친을 따라 군대에 나갈 때의 비분강개하는 유형에나 어울렸다. 이 노래, 즉 당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던 이 노래는 한 열혈청년의 눈길을 끌었고, 이 여인은 다른 기녀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청년은 세관감독을 지내던 반찬화(潘贊化)였다. 당시 그는 막 안휘 무호의 세관감독으로 부임하는 참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기루의 기녀들은 두 가지에는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는 악세사리로, 많이 보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남자로 역시 기원에 남자는 수도 없이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녀들이 보는 남자는 아주 정확하다. 반옥량은 청루에서 무수한 남자를 만나보았다. 그녀가 반찬화를 만났을 때, 그녀는 어떤 예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마도 이 남자가 자신을 구해줄 것같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위험을 무릎쓰고 반찬화에게 부탁을 했고, 역시 반찬화는 돈을 주고 그녀를 구해내 주었다. 반찬화와 같은 관료가 측은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그 자신의 명예와 관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찬화는 결국 장옥량을 기원에서 풀려나게 해준다.

 

원래 그녀를 구해내 주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여인 즉 17살의 여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기원에서 사회로 나와봐야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많은 여자들은 그래서 다시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반찬화는 다시 한번 자신의 선량함을 보여주어, 장옥량을 첩으로 삽믄다. 이때 증혼인은 진독수(陳獨秀)이다.

 

결혼한 후 부부는 상해에서 살았다. 반옥량은 학구적인 열망이 강했고, 진취심이 강했다. 반찬화는 따로 스승을 모셔서 그녀를 가르쳤다. 그녀는 천성이 색채에 민감했고,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1918년,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그녀는 이 힘들게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교수들과 교장인 유해속(劉海粟)으로부터 격려를 많이 받는다. 반옥량은 스스로 "부지불식간에 자다가도 몇번씩 웃다가 깨곤 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그녀를 질투하는 사람이 생기고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그래도 반찬화는 그녀를 믿고 계속 적극 지원해 주었다. 결국 반옥량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완성한다. 1921년에는 프랑스에 유학하여 근공검학(勤功儉學,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반옥량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먼저 프랑스 리용의 "중법대학"에서 프랑스어를 배운다. 2달후에는 리용국립미술전문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2년후 졸업한다. 그 후에 파리국립미술학원에 입학하여, 다얀, 시몬을 스승으로 모신다. 이후 그녀는 다시 로마로 가서 이탈리아국립미술전문학교에 들어가서 유화와 조소를 전공한다. 그녀는 결심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로마, 파리의 대가들과는 인연이 없었고,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반옥량의 일생에서 반찬화외에 또 다른 남자가 하나 있다. 왕수의(王守義)라는 사람이다. 그는 그녀를 도와 작품전을 열게 도와주었고, 그녀를 데리고 친구의 예술살롱에 드나들 수 있게 해주어 화가들과 교류하게 해주었다. 반옥량은 예술살롱내에서 지위가 점점 올라갔다. 왕수의는 반옥량을 데리고 베르사이유궁, 루브르궁, 노트르담등의 예술진품을 구경시켜 주었고, 그녀를 데리고, 개선문, 에펠탑의 철탑아래와 세느강, 루르강변에서 그림을 그렸다. 왕수의는 여러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반옥량을 위하여 작품전을 열어주었다. 파리뿐아니라,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벨기에등의 국가에서도 전시회를 열었고, 반옥량의 미술계에서의 명성도 갈수록 올라갔다.

 

반옥량은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을 목숨처럼 생각했다. 그림 하나하나는 모두 반옥량의 심혈이 깃들어 있다. 1940년대부터 반옥량은 여인의 여체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는 선으로 나녀의 곡선을 그렸다. 나중에 인상파풍격의 피부처리도 나타난다. 그녀는 붓을 대담하게 놀렸고, 자신감에 넘쳤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녀가 인체를 그리기 시작할 때, 여러번 좌절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반옥량이 다니던 학교에는 누드모델사건이 있어서, 사회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폐교의 위험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학교안에서 인체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면 반옥량은 어찌했는가? 한번은 상해의 목욕탕을 갔다. 그리고는 노트를 꺼내서 욕실안에서 인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인체소묘를 보고 다른 학생들은 모두 놀랐다. 도대체 어떻게 그린 것인가? 그녀의 대답은 하나는 목욕탕에 가서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찬화가 집에 없을 때 스스로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그렸다고 했다.

 

 

 

1984년에 반옥량의 유작이 프랑스 파리에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린 2000여점의 작품가운데 대부분이 나체화라는 것을 알았다. 왜 반옥량은 사람의 누드에 이처럼 관심이 많았던 것일까?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녀의 신세내력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전에 기원에서 기녀를 할 때, 그녀의 몸, 육체는 욕망을 배설하는 도구이지 영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예술학교에 들어간 이후에 인체는 예술이 되어 버렸고, 인체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대상으로,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력이 있던 그녀는 누드를 대할 때, 감각이나 깨달음이 남달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반옥량의 전설적인 일생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녀의 평탄하지 않은 인생과 호방한 사람됨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은 그녀의 예술품격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천성적인 예술가였다.

 

반옥량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모두 그녀의 개성이 아주 강하였다고 말한다. "삼불여사(三不女士)"라는 별명도 있다고 한다. 일생동안 외국국적을 가지지 않았고, 연애하지 않았고, 어떤 화상과도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립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반옥량이 화상과 계약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파리에서의 수익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2차대전후에 예술가와 화랑은 더욱 밀접하게 되었다. 화상과 협력을 거절한다는 것은 성공의 기회를 그만큼 놓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품을 팔 수도 없었으며, 생활은 힘들어졌다. 반옥량만이 이런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프랑스에 살던 마지막 20년간, 창작의 자유를 위하여 시종 화랑과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고, 일생동안 독립계술가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처음에는 반옥량의 그림이 시장에서 그다지 높은 가격을 받지 못하였다. 일찌기 한번 경매에서, 반옥량의 그림이 90여만인민폐에 낙찰된 적이 있다. 업계내 사람들에 의하면 이것은 반옥량의 작품에서 아주 높게 받은 경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높은 가격이 나왔는가? 반 고호를 보자. 고호의 작품은 경매에서 아주 높은 가격을 받는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불행한 인생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을까? 현재 그림경매에서 반옥량의 작품이 높은 가격을 받는 것은 아마도 이런 그녀의 고난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 여성으로서 특히 구시대의 여성으로서, 기원안에서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와, 기녀, 소첩, 미술학교학생, 유학생, 대학교수, 그리고 스스로 40여년을 해외에서 유랑한다. 이런 과정에서 반옥량의 인생변신은 아주 훌륭했다.

 

파리현대미술관에서 구입한 첫번째 중국예술가의 조소작품은 바로 그녀의 것이다. 그녀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강하게 불행한 인생과 싸웠으며, 그녀의 생명과 모든 재능을 인류의 예술에 바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