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한문제(漢文帝): 명성을 쫓은 인군(仁君)

중은우시 2007. 8. 15. 11:55

글: 사걸붕(史杰鵬)

 

한문제 유항(劉恒)은 서한(西漢)의 일대명군(一代明君)이다. 후세의 사대부들은 그를 언급할 때마다, 얼굴에는 따뜻한 정이 드러났고, 아주 도취된 듯한 모습을 보일 정도이다. 그들은 이러한 군주만이 바로 봉건사회에서 모범이 될만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점은 확실히 인정할 만하다. 한문제는 비교적 현명한 군주였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가소로운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명성을 얻는 것을 좋아했고, 이것이 지나쳐서 허위적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명성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일찌기, 위로는 왕공경상(王公卿相)에서부터 아래로는 판부주졸(販夫走卒)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를 원했다. 그래서 돈있는 사람들은 큰 정(鼎, 세발달린 솥, 권력의 상징)을 주조했고, 거기에 이름을 새겼다. 돈이 없지만 스스로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객(門客)이 되거나 자객(刺客)이 되었다. 만일 노모를 모셔야 했다면 어쩔 수 없이 골목길에 숨어서 돼지나 개를 잡으면서 보냈다.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스스로 오점으로 생각해서 말할 때마다 부끄러워 했다. 왕후들이 정을 주조하는 동기는 비록 불순하지만, 일반 백성들과 큰 관계는 없었다. 아무 힘없는 백성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포청천과 같은 유형으로, 백성들의 억울한 점을 풀어주고, 먹고입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정이나 주조하는 왕후장상의 경우에는 그저 백성들이 부러워할 뿐이고, 자기 스스로 그러한 위치에 있지 못함을 한탄하면 그만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명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사람마다 생각이 달랐다. 폭군인 진시황도 명성을 좋아했다. 그러나 명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는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는 자신이 '천하를 통일하고, 덕과 혜택이 오래 가게 함으로써" "성덕이 널리 미치어 천하에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때" 명성이 만대를 간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구석구석의 돌에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로써 오히려 힘들어 했고,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했다. 그래서, 명성을 좋아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먼저 "깨끗한 명성(好名)"과 "더러운 명성(臭名)"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후대에 더러운 악명을 남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세의 환온(桓溫)과 같은 경우는 개략 알았던 것같다. 그러나 그는 "천고에 깨끗한 이름을 남기지 못할 바에는 만년동안 악명이라도 떨치게 하겠다(不能流芳千古, 寧可遺臭萬年)"이라는 말을 했다. 그의 뜻은 어쨌든 한 세상을 그냥 살지는 않고 본때나게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인과유명, 안과유성(人過留名, 雁過留聲, 사람이 지나가면 이름을 남기고, 기러기가 지나가면 소리를 남긴다)". 나는 후세에 증명해 보이겠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살았었다는 것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문제는 위에서 말한 유형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그는 호명과 악명을 잘 구분할 줄 알았다. 그리고 좋은 명성을 얻는 길을 미친 듯이 달렸다. 그는 아주 지혜로웠고, 당시 궤계가 횡행하는 정치환경에서 황제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고, 국가도 날로 흥성했으니 이는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반포한 일련의 정책은 권신(權臣)들에게 타격을 가했고, 제후의 세력도 약화시켰다. 그러면서도 인자한 군주라는 좋은 명성을 남겼으니, 수완이 실로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좋아한 것은 확실히 지나친 점이 있었다. 어떤 때는 그저 명성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죽어라 체면을 지켰고, 허위적으로 보이는 경우까지 있다.

 

한문제는 원래 유방(劉邦)의 서자(庶子)이다. 대국(代國)이라는 조그마한 나라의 왕에 봉해졌을 뿐이고, 그가 황제가 된 것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래서 장안에서 황제로 모시겠다는 서신이 왔을 때도 처음에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렵계 중위인 송창이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장안으로 가서 황제에 올랐다. 여러 신하들이 그에게 황태자를 세우라고 권했을 때도 그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제후 왕과 공신들의 자제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필 나의 아들을 황태자로 하겠는가?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내가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 챙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천하백성들을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마치 자신이 아주 고상한 도덕수준을 가지고 있고, 거의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천하를 선양한 것을 배우겠다는 취지로 말하였다.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한문제는 황위계승에 있어서 그다지 깔끔하지 못했다. 신하들이 계속 권고하자 즐겁게 자기의 장남인 유계(劉啓)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여씨(呂氏)세력을 몰아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세운 두 종실집안인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과 동모후(東牟侯) 유흥거(劉興居)는 쫓아내고 냉대했다. 그들에게 겨우 제(齊)나라의 두개 군을 떼어내서 각각 성양왕(城陽王)과 제북왕(濟北王)에 봉하고는 입을 씻었다. 원래 공신들은 여씨를 몰아내는 것이 성공하면 유장을 조왕(趙王)에, 유흥거를 양왕(梁王)에 봉하기로 하였었는데, 한문제는 유장과 유흥거가 자기들의 형인 제애왕(齊哀王) 유양(劉襄)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불쾌해서 고의로 그들의 공로를 폄하한 것이다. 제북왕 유흥거는 이로 인하여 계속 마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나중에 한문제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치러간다는 말을 듣고, 장안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다. 한문제는 이 소식을 듣고는 즉시 병사를 돌려 장안으로 돌아오고, 극포후(棘蒲侯) 시무(柴武)를 보내어 난을 진압한다. 유흥거는 전투에서 패하자 자살한다. 한문제가 황제위에 연연하지 않았다면, 어찌 유흥거를 화나게 해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들었을 것인가. 그가 자기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지 않겠다고 사양한 것은 전혀 내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허명을 쫓은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일만으로 한문제가 허명을 추구했다고 말한다면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냐고. 한문제도 당시로서는 시국이 긴장되고, 권신들이 곁에 있어서 부득이 요임금, 순임금같은 자태를 보일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명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래의 사례를 추가로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문제의 "인"은 그저 표면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것은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과의 일이다. 유장은 유방의 막내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여후(呂后, 유방의 처로 유방의 사후 권력을 장악했었음)의 비호를 받아 아주 교만했다. 한문제가 즉위한 후, 그는 스스로 한문제와 혈연관계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여 더욱 무서울 것이 없게 행동했다. 매년 입조할 때마다 한문제는 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하여 함께 마차를 차고 사냥을 했다. 그런데, 유장은 한술 더떴다. 한문제에게 "큰형(大兄)"이라고 부른 것이다. 한문제가 그의 형이기는 하나 어쨌든 황제이다. 일반 백성들이라면 집안의 항렬에 따라 부를 수 있지만, 황실에서는 다르다. 일거일동이 모두 천하와 관련이 있고, 집안일도 모두 공사(公事)가 된다. 비록 형제라고 하더라도, 법도는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어찌 함부로 황제에게 "큰형"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한문제는 아마 이런 막내동생이 귀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저 억지로 불쾌한 것을 참고 동생의 행동을 용인해준다. 유장은 더욱 득의만면하여, 마음대로 유방때의 공신인 심이기(審食其)를 죽여버린다. 그 이유는 심이기가 그의 친모가 죽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 한문제도 심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심이기는 여후의 심복이었고, 나중에 낭중령을 맡아 여후를 대신하여 조서를 전하곤 했었다. 그리하여 조정신하들이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모두 통쾌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한문제는 유장의 죄를 사면해준다.

 

이때부터 유장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었다. 사람을 보내어 흉노(匈奴), 민월(越)과 ㅁ몰래 연락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한문제에게 반역의 증거가 포착되었다. 그리하여 한문제는 유장을 촉군의 공우(郵)로 귀양보냈다. 유장은 비록 잔폭했지만, 성격은 아주 강직했다. 제후왕에서 졸지에 귀양가는 신세가 되자, 신분의 낙차가 너무 컸다. 그리하여 그는 귀양가는 길에서 식사를 거부하고 굶어죽었다. 한문제는 이 소식을 듣자, 졸지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비통하게 통곡했다. 아마도 이것은 한문제의 양심이 작용하여 동생이 죽은데 대하여 상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전에 그에게 간한 적이 있는 대신 애앙(愛)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의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이제 동생을 죽였다는 악명을 남기게 되었구나. 정말 후회막급이다. 아아.." 원래 그가 두려워한 것은 동생을 죽였다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인후"하다는 명성을 가장 큰 자산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명성에 의지한 것이었는데, 어찌 명성을 하루아침에 망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황제앞에서 애앙은 그저 "황상의 명성은 이미 세가지나 높은 것이 있으니, 이번 건으로 하여 명성에 크게 누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문제는 두 눈이 반짝 빛났고, 즉시 물었다. "어떤 세가지냐?" 그러자 애앙은 "예전에 폐하께서 대왕으로 계실 때, 태후께서 오래 병이 들어 자리에서 3년을 일어나지 못했는데, 폐하께서는 눈도 돌리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으셨고, 탕약도 폐하가 직접 맛보지 않으시면 태후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멀리 춘추시대의 큰 효자 증참이라고 하더라도 폐하의 발뒤끝에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제후왕이라는 존귀한 지위에 계시면서도 이렇게 가볍게 하셨으니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입니다. 예전에 여씨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공신들이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폐하가 대국에서 장안으로 왔을 때 형세가 아주 위급했습니다. 고대의 용사인 맹분, 하육이라고 하더라도 겁먹을 상황이었는데, 폐하께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태연자약하게 처리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입니다. 페하가 장안에 오신 후, 대국의 장안사무실에 머물렀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폐하에게 황제위에 오르라고 하였으나, 폐하는 서방을 향하여 세번이나 겸양하였고, 남방을 향하여 두번을 겸양하였습니다. 고대의 허유라는 현인이 요임금이 천하를 넘겨주겠다고 하여도 사양하였는데, 그는 한번 사양하고도 만고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페하는 그러나 5번이나 사양했습니다. 이것이 고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세번째입니다. 더구나 폐하는 회남왕을 정말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가는 길의 관리들이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굶어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와는 아무 상관이 업는 일이오니, 폐하께서 상심하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사실, 애앙의 아부는 그다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이 말도 그저 아무렇게나 지어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가지 중에서 첫번째 사례 정도는 한문제가 제대로 한 것이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사실 별 것도 아니었다. 한문제가 당시 장안으로 온 것은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먼저 중위 송창이 그에게 국면을 분석해 주었다. 즉, 유씨종친이 강하니,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다. 조정바깥에도 종실의 여러 제후왕들이 있고, 조정안에도 주허후 유장과 동모후 유흥거가 있으니 문제가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 한문제는 점을 쳤는데 길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렇게 해놓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다시 외삼촌인 박소(薄昭)를 장안으로 보내어 태위(太尉)인 주발(周勃)과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게 하고는 진심으로 그를 황제로 모시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장안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앙궁에 들어가자 마자 낭중령과 위위(衛尉)를 자기 사람으로 교체했고, 장안의 병권을 꽉 틀어쥐었다. 그러니 무슨 용감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세번째 사례에서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사양한 것을 얘기하는 것은 더욱 웃기는 일이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황제가 되려고 장안을 왔는데, 무슨 겸양인가. 그것은 그저 예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부친인 유방도 예전에 이렇게 한 것이다. 나중에 나오는 조비, 사마염도 모두 이렇게 했었다. 역사서에서 애앙은 "직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는데, 이 내용을 보면 그는 바람이 부는대로 방향을 트는 소인배에 불과하다. 그는 일찌기 오왕 유비(劉)의 재상을 지냈고, 유비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분명히 알아차렸음에도 유비가 몰래 제거할 것이 두려워, 장안에는 유비가 그저 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런 점을 보면 인품에 문제가 있는 것같다. 조착(晁錯)은 황실을 위하여 걱정하던 말그대로 충신이었는데, 애앙과 같은 위선자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하늘의 도리는 어디에 있는가?"

 

한문제는 애앙의 이 교묘한 말을 듣고 난 후 금방 눈물이 흐르는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역사서에서는 "황상의 뜻이 바로 풀렸다"고 썼다. 한문제는 자기의 명성에 손상이 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 금방 괜찮아졌으니, 그가 원래 동생의 죽음 자체에 대하여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애앙에게 다음 단계로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물었고, 애앙은 이렇게 말한다: "귀양길의 회남왕에게 식사를 하도록 권하지 않은 관리들을 참하여 천하에 보여주면 될 것입니다" 한문제는 즉시 그대로 시행한다. 그리하여 회남왕이 지나갔던 길의 관리들은 바로 한문제의 "인후"하다는 명성을 지키기 위하여 대신 죽게 된 것이다. 실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그는 다시 유장의 네 아들을 모두 제후로 봉하여 자기의 인후함을 과시한다. 그의 마음 속에 든 걸리는 점을 이렇게 풀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이렇게 하였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이런 노래가 퍼졌다: "한 치의 베가 있으면 꿰멜 수 있고, 한 말의 쌀이 있으면 빻을 수 있다. 형제 두 사랑미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네" 한문제는 이를 듣고는 한탄해서 말하기를 "설마 천하백성들은 정말 내가 회남왕의 땅을 탐내서 동생을 죽인 것으로 생각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그리고는 성양왕을 회남으로 이주시키고 회남의 원래 땅을 통치하게 했다. 몇년이 지난후 아예 유장의 아직 살아남은 아들을 각각 회남왕, 항산왕, 여강왕으로 봉했다. 그러자 충신인 가의(賈誼)는 글을 올렸다. 한문제에게 허명을 쫓아 후세에 후환을 남기지 말아라고 권했다. 회남왕의 아들은 왕이 되기만하면 크고나서 반드시 복수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며, 천하는 동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문제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회남왕 유안은 결국 반란을 일으켜서 자살한다. 이것은 모두 한문제가 허명을 쫓다가 일어난 결과이다.

 

정치적인 명성이외에 한문제는 문화적인 명성도 좋아했다. 재자 가의는 박학홍사(博學鴻詞)로 유명했다. 한문제는 그를 매우 존경했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그와 경쟁을 했다. 그는 일찌기 가의를 지방의 관리로 좌천시킨 적이 있다. 몇년 후 장안으로 다시 불러서, 선실(宣室)에 앉아 오랫동안 담화를 나누었다. 무슨 변론장처럼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마디를 하고 나자, 스스로 가의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의는 너무나 생동감있게 얘기했기 때문에 듣느라고 시간가는 줄 몰랐다. 부지불식간에 몸까지도 앞으로 굽히게 되었다. 마치 한마디라도 놓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당나라 시인인 이상은은 일찌기 시로써 이 때이 일을 묘사한 적이 있다:

 

선실구현방축신(宣室求賢訪逐臣)

가생재조경무륜(賈生才調更無倫)

가련야반허전석(可憐夜半虛前席)

불원창생문귀신(不問蒼生問鬼神)

 

한문제가 백성을 살릴 문제는 묻지 않고, 귀신의 일이나 물었다는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썩은 유학자(腐儒)들의 말이다. 세상에 정치말고 할 말이 없단 말인가? 한문제가 귀신에 대하여 묻고, 자연세계의 오묘함에 대하여 논의했다고 하여 안될 일이 무엇인가? 중국은 지금까지 이런 순수학문에 대한 정신이 부족하여 지금까지 낙후된 것이 아닌가?

 

변론장처럼 하려고 했는데, 일방적인 강연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한문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재미있게 들었지만, 가의가 돌아간 후에 한문제는 탄식하면서 말했다: "아..내가 오랫동안 가의를 보지 못해서, 내 학문이 그를 넘어선 줄 알았었는데, 아직도 여전히 그를 따라가려면 멀었구나." 비록 그는 아주 실망했지만, 이 점을 보면 그가 시간을 아껴가면서 공부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목표도 가의를 넘어서겠다고 잡았던 것이다. 나중에 가의가 그의 학문을 칭찬하자 그는 금방 득의만면하여, "내가 무슨 천재이겠는가? 그저 연애할 시간까지 공부에 쏟았을 뿐이다"라고 답변한다. 그처럼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는 것은 곁에 미녀가 운집해있는 황제로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원래 스스로 충분히 준비한 후에 가의를 불러들였는데, 이런 결과가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대화가 끝난 후 얼마되지 않아, 다시 가의를 양국의 태부로 보낸다. 그리고 가의는 양국에서 죽고, 다시는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만일 가의가 애앙처럼 한문제에게 아부를 잘 하였고, 자기의 재주를 너무나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두번 세번 지방으로 좌천되어 가지 않고, 조정에서 재능을 펼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한문제가 명성을 추구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다만 그가 어떤 때는 지나친 점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부분을 굳이 언급한 것은 그의 헛점을 들추자는 것은 아니다. 한문제는 상당히 괜찮은 황제이다. 이 점은 필자도 인정한다. 그가 지나치게 명성을 추구한 것이 허위에 가깝게 되었다는 것은 순수히 학문연구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점을 독자는 양해해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