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간북경(明淸看北京)
선진간서안(先秦看西安)
양한간서주(兩漢看徐州)
명나라 청나라를 보려면 북경으로 가고
진나라와 그 이전을 보려면 서안으로 가고
동한, 서한을 보려면 서주로 가라.
1981년에 강소성 서주에서 귀산한묘가 발굴된 이래,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 묘와 관련해서는 연구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서주는 이미 25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이며, 서주가 양한시대에 중요한 도시였던 이유는 바로 이 곳에서 개국황제 유방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기 서주에 금의환향하여 고향어른들 앞에서 "대풍가(大風歌)"를 부른 적이 있다. 대풍가의 내용은 "대풍기혜운비양, 위가해내혜귀고향, 안득맹사혜수사방(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올라간다. 위엄이 천하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훌륭한 선비를 얻어 사방을 지킬 것인가)"이다. 유방은 자신의 고향인 서주에 대하여 깊이 고려한 끝에 동생인 유교(劉交)에게 넘겼고, 초왕(楚王)에 봉했다. 서주의 몇대에 걸친 초왕은 모두 서주의 사방에 있는 산에 묻혀 있다. 서주의 한묘는 흙을 덮어 능을 만들었던 제왕의 능침과는 달리, 서주의 사방에 있는 산 속에 묻었다. 그리하여,외관으로 보면 이들은 그저 하나의 산일 뿐이다.
귀산한묘는 서주 구리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나라묘지의 여러가지 특징을 구비하고 있으면서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건축에 있어서도 절묘한 부분이 있다. 이 묘은 두 개의 병렬하게 놓여서 서로 통해진 부부의 합장묘로 되어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이 초양왕(楚襄王) 유주(劉注)의 묘이고, 북쪽에 있는 것이 그의 부인묘이다. 두 개의 묘는 모두 횡혈애동식(橫穴崖洞式)으로 되어 있다. 동서길이가 모두 83미터, 남북으로 가장 넓은 곳이 33미터에 이른다. 모두 15칸의 묘실로 구성되어 있고, 총면적은 700여평방미터에 이른다. 전체 산을 거의 파헤쳤으며, 하나의 커대한 궁전과 같다. 그리고 산을 판 기술을 아주 정교하고, 공사도 컸으며, 기세도 웅위하다.
첫번째 수수께끼.
귀산한묘는 묘도(墓道), 용도(甬道), 묘실(墓室)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묘도는 모두 두 개인데 각각 24미터이고 모두 바깥에서 파기 시작했다. 용도는 마찬가지로 2개인데, 평행되게 만들었으며, 터널식이고, 높이는 1.78미터, 너비는 1.06미터이며 길이는 56미터이다. 용도는 매우 좁아서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다. 직선인 용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자면 손에 닿는 석벽이 이상하리만치 매끄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용도의 석벽은 모두 인공으로 정교하게 갈아서 거울처럼 매끄럽다.
용도의 아래의 양측에는 물길을 파두었다. 묘실에서 용도를 거쳐 직접 묘바깥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전체 용도의 지면은 안이 높고 바깥이 낮은 구조이며 약1도의 자연스런 경사를 지니고 있다. 묘실에서 쌓이는 물은 이 물길을 통하여 묘밖으로 흘러나가게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완벽한 배수시스템이며, 2천년전의 고인들이 이렇게 설계한 점에 대하여는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56미터 길의의 용도는 정확도가 1/16000에 달한다. 이 길을 도끼등을 가지고 하나하나 파들어갔고, 현대적인 기기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너무나 정확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처럼 고도로 정확성을 요하는 용도를 판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뿐이 아니다. 산중간의 한 지점에는 완전히 평행한 또 하나의 용도가 있다. 이 두 개의 용도는 평행으로 아주 아름답게 팠는데, 당시의 공사기술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위있는 기관이 측정한 바에 의하면, 남용도는 길이가 55.665미터, 북용도는 55.784미터이다. 남북의 두 용도의 길이차이는 겨우 11.9센티미터에 불과하다. 두 개의 용도의 평행도 오차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만일 두 용도의 끝부분을 직선이라고 생각하고 잇는다면 남북 두 용도의 평생도차는 5"에 불과하다. 이 평행도차이가 이렇게 적은 점은 서안까지 선을 이어가서야 비로소 만날 정도이다.
2천년전에 고대의 측량기구라는 것이 있어야 아주 간단한 것이고, 장인들은 모두 단단한 화강암을 파면서 일했는데, 이렇게 정교하게 팠다는 것은 놀랍다. 그들은 도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이런 공사를 완성하였고, 그것도 이렇게 고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완성했는가?
두번째 수수께끼,
제6묘실의 북벽의 가장 서쪽에 있는 벽에는 아주 분명하게 진짜사람정도 크기의 그림자가 있는데, 마치 한 노인이 화려한 옷을 입고, 높은 관과 허리띠를 메고 얼굴은 동쪽을 향하고 서서 발걸음을 앞으로 나가면서 읍을 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현상은 현재 초왕 유주의 묘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일반적으로 "초왕영빈(楚王迎賓)"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예로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귀산한묘가 발굴되어 정리할 때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1994년 6월전후에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먼저 여름에 비가 많이 모면서 묘내에 금이 생겨 물이 새들어왔고, 벽위에 마치 그림자 같은 것이 나타났다. 점점 겨울에 공기가 마르면서 자주 그림자가 나타났다. 지금은 아주 분명하게 벽위에 나타나 있다.
"초왕영접"은 도대체 누구의 걸작인가? "초왕"은 왜 하필 유주의 관실에 나타나는가. 어떤 사람은 이것이 묘에서 오랫동안 물이 스며들어와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귀산한묘은 지금 여러군데 물이 새고 있는데, 하필 이곳에만 초왕영접의 모습이 나타났는가?
어떤 사람은 북쪽벽의 돌이 성분이 달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면, 제6실의 북벽암에 단층등 지형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그저 하나의 돌을 파낸 것이며 금이간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초왕"은 아주 군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고, 왕후장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매일 이 곳에 참관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두 손을 모으고 영접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이 왜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세번째 수수께끼
형상이 특이한 호문(壺門)을 통과하면 유주의 부인묘실이다. 면적이나 샐내공관의 변화나 장식으로 볼 때, 부인의 묘실은 초왕의 묘실보다 작고, 공간변화나 실내장식은 더욱 풍부하다. 묘실의 경천주(擎天柱)도 크기에서 차이가 난다. 이 곳의 기둥에는 아주 부드러운 곡선으로 팠다. 유조 묘에 있는 네모난 기둥보다는 훨씬 여성미가 넘친다. 유주부인묘의 가장 큰 특징은 차마실(車馬室)과 관실(棺室)외에 나머지 3칸의 묘실에서 22개의 유두(乳頭) 모양의 석포(石包, 일반적으로 乳釘이라고 부름)이 발견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초왕인 유주의 묘 10칸에는 단 하나의 유정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점을 보면 이러한 유정은 아무 묘실에나 다 둔 것은 아님에 분명하다. 이 것이 분포된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무슨 공사기법적인 것도 아니고, 시공중에 아무렇게나 남긴 하자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황후묘실내에 박혀 있는 것이다.
이 유정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하늘의 별모양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묘실은 원래 나무구조의 방이 있었다는 것이므로, 이런 별모양은 분명히 나무로 가리워졌을 것이고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것은 초양왕 유주가 하늘의 별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왜 그 자신의 묘실에 두지 않고 부인의 묘실에 두었는가? 그리고 이 22개의 유정이 묘실공사에 반드시 필요한 어떤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부인묘실보다 두배는 크고 10칸을 가진 유주의 묘실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네번째 수수께끼
귀산한묘는 전형적인 애동묘(崖洞墓)이다. 15칸의 묘실과 두 개의 묘도의 총면적은 700여평방미터에 달하고, 용적은 2600입방미터에 달한다. 권위있는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유조묘의 원래 관실의 천정은 바로 귀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유주묘의 어용부고에 있는 대석주는 남북용도의 중축선상에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귀산한묘의 공사인원은 무슨 측정기술을 이용하여 귀산의 산모양을 알아냈단 말인가?
수수께끼외의 수수께끼
색석(塞石, 막는 돌)은 귀산묘의 바깥에 놓여진 대량의 장방형의 거석이다. 이들은 두 개의 용도를 틀어막아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로 둔 것이다. 이 거석은 한 개당 7톤씩의 무게이고 옮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2천여년전에 당시의 장인들은 어떻게 이 몇톤이나 되는 거석을 용도 안으로 밀어넣었을까? 게다가 어떻게 두 층으로 나누어 차곡차곡 쌓았을까? 1992년, 일하는 사람들이 남쪽 용도에 놓인 색석을 묘밖으로 끌어내면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용도내에 상하 2층으로 겹쳐진 색석으니 아주 엄밀하게 놓여 있어서 두 돌 사이에 5푼짜리 동전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유주부부묘는 이 색석으로 묘실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 거석은 클 뿐아니라 수량도 26개에 달한다. 이처럼 큰 돌을 캐는데, 자그마한 귀산에서 충분했을 것인가? 지하궁전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이렇게 볼 때 이러한 색석들은 귀산에서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색석은 귀산의 돌과 동일한 성질이며, 모두 석회석이다. 더욱 설득력있는 것은 서주 사자산의 초왕릉을 발구할 때 고고학자들은 외묘도의 앞부분에서 "잔석이 비교적 많았다. 중간에는 하나의 '색석'의 초보모양을 볼 수 있었는데, 장방형이고 위는 이미 매끄럽게 갈았다. 그리고 하나의 색석 원석을 발견했는데, 가공중에 갈라지는 바람에 묘도의 서측에 버려두었다" 사자산 초왕릉의 색석은 그 자리에서 채취한 것인데, 귀산의 색석도 현지에서 얻은 것일까? 아쉽게도 만족할만한 답안은 나오지 않았다.
두 부부의 묘실은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호문이라고 부른다. 이 호문은 아주 특별하게 팠다. 동쪽 벽은 직선이고, 서쪽 벽은 곡선이다. 그리하여 북쪽이 크고 남쪽으로 가면서 좁아진다.
전체 묘실의 건축수준은 아주 정교한데, 이처럼 규칙에 맞지 않는 점은 사람의 관심을 끌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건축한 사람이 호문의 변화를 통하여 사용자의 성별이 다름을 암시하려 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호문이 연결하는 것은 두 묘실의 주인들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저명한 고고전문가인 장약시(蔣若是) 선생은 이 문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잘못 파서 그렇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것은 전체 묘에서 유일하게 굴착이 불규칙인 통로이다. 호문의 또 다른 측은 전체 묘에서 가장 신경써서 판 장식이 있다. 이것은 호문이 유주묘실에서 특별히 부인을 위하여 마련해둔 통로라고 보인다. 그런데 이 통로의 북쪽입구는 이처럼 큰 것은 유부인묘실으리 팔 때 잘못 판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남겨놓은 입구와 잘못 연결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보정하기 위하여 나중에처럼 곡척형이 된 것이다."
전체 묘장은 통로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전혀 잘못 판 흔적이 없다. 특히 용도를 팔 때의 정확도는 놀랄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 깊이 겨우 1.9미터의 통로에서만 왜 잘못파는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비록 잘못 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크게 되었을까?
비록 사전에 남겨둔 통로라고 하더라도, 미리 기호라도 남겨서 파기 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시공인원이 정교하게 용도를 설계했고, 부인묘에서 남편묘까지 통로를 만들기로 했다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어찌 이처럼 큰 오차가 생긴 것일까? 그리고, 석벽의 두께는 2미터에 지나지 않으므로 파기 전에라도 어찌 잘못판다는 것을 모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잘못판다는 것을 알았다면 즉시 중지하고 고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잘못파는줄 알았더라도 계속 파들어갔으면 결국은 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 팠다는 설은 성립되기 힘들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쓰고 보니, 귀산한묘에는 수수께끼가 너무나 많다.
초왕 유주와 동시대에 동등한 작위를 받았던 다른 왕들의 묘장제도를 유추하면, 유주를 매장할 때, 몸에는 은루옥의(銀縷玉衣)를 입혔을 것이고, 상옥칠관을 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정말 없었던 것인가? 그리고 제도에 따르면 유주의 관인은 반드시 타뉴금인(駝鈕金印)이어야 한다. 그러나 묘실에서는 겨우 2개의 귀인(龜印)이 발견되었고, 모두 사인(私印)이다. 그렇다면 타뉴금인은 그와 함께 묻히지 않았단 말인가? 도굴등의 이유로 이런 것들도 영원히 수수께끼로 묻힐 것같다.
수수께끼 이외의 일화
유주의 관목(棺木) 주위에는 화장실, 주방, 마굿간등의 실용적인 거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중국문화발전은 갈수록 추상화되었는데, 왕릉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적으로 몇 개의 방을 마련하였다. 단지 한나라때, 사람들은 죽음도 삶의 연속으로 보았고, 묘실에는 이렇게 복잡한 배치를 했던 것이다. 유주의 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주인집을 찾아가는 것같은 느낌이고, 북경의 황릉처럼 음산하지는 않다.
유주의 화장실이 아주 선진적이었다는 것은 놀랍다. 평지에 두 개의 장방형의 돌을 놓고, 두 돌의 사이에는 하나의 구덩이가 있다. 사람은 돌맹이를 밟고 앉기에 편하고, 현재의 앉는 화장실과 별 차이가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른쪽 벽이 있는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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