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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200년 동한(東漢) 황조: 황제는 단명, 황후는 장수

by 중은우시 2007. 8. 28.

 

기원전221년 진왕 영정이 육국을 통일하여, 황제제도를 건립한 이래로, "부전자, 가천하(父傳子, 家天下, 부친이 아들에게 물려주고, 천하를 집안 것으로 하다)"의 황위승계제도가 확립되었다. 중국의 이천여년이래의 봉건전제제도중에서 거의 모든 황조에서 어린 황제(幼帝)의 현상이 나타났다. 즉, 약관도 되지 않아서 황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동한시대에 가장 현저했다. 동한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중흥이래, 한헌제(漢獻帝)가 폐위되기까지 12명의 황제, 196년동안 존속했다. 그중 16세 이전에 등극한 황제가 9명으로 전체의 3/4에 이른다. 그리고 화제 아래로 모든 황제는 유년에 즉위했다. 이것은 외척의 득세, 환관의 정치간여와 함께 동한정치의 하나의 변태적인 모습이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진왕 영정은 스스로 "덕고삼황, 공개오제(德高三皇, 功蓋五帝, 덕과 공로가 삼황오제보다 높고 가릴만하다)"고 생각하여, "황제(皇帝)"라는 존칭을 만들었다. 이로써 황제와 관련된 일련의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중 황위계승제도는 가장 핵심중의 하나이다. 이는 만세일계로 자기의 자손들이 황제에 오르게 하는 것이다. 진나라는 비록 2대에 이르러 멸망하였지만, 진시황이 만들어놓은 황위계승제도는 계속 유지되었따. 동한에 이르러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런 황위계승제도는 후계자의 범위를 황제의 자손들로 국한시키게 되어, 선택의 여지가 비교적 좁았다. 일단 황제가 요절하면, 어린 황제가 나타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동한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동한은 광무제(유수), 명제(유장), 헌제(유협)을 제외하고, 나머지 황제는 모두 36세이전에 사망했다. 그중 안제, 질제, 환제의 세 황제가 종친의 신분으로 즉위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아들이 부친으로부터 황제위를 승계했다. 황제들은 후궁이 비교적 많았다. 결혼을 일찍하고 신체발육은 아직 제대로 성숙되지 않았는데도, 지나치게 몸을 내돌리다보니, 건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후대에 허약하고 요절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 특히 궁중암투, 폐위, 거기에 고대의 의료기술수준까지 감안하면 성년이 되는 황자의 숫자도 별로 많지 않았으므로, 후계자의 선택범위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동한은 선제가 일찍 죽으면, 살아남아있는 황자들은 모두 나이가 어리게 되었다. 그러나, 선황에게 아들이 있으면 그를 후계자로 세워야 했으므로, 동한시대에 어린 황제가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봉건제도에서 고칠 수 없는 고질이었다.

 

동한에 이처럼 많은 어린 황제가 나타난 것은 우연적인 요소도 있다. 동한황제가 단명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의 모후나 황후는 모두 장수했다. 이리하여, "주소모장(主小母壯)"의 상태가 나타난 것이다. 한나라는 황후의 지위를 확립하여, 황제가 어리거나, 유약하거나 멍청하거나 후사가 끊기면, 황태후가 보호자의 신분으로 감독하고 후계자를 정하고 임조칭제(臨朝稱制)할 수 있었다. 태후의 임조칭제시 그 권력은 황제와 동일했다. 동한에서 임조칭제한 태후가 모두 6명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태후들이 후계자를 선택할 때 대다수는 "나이어린 자로 골라서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고자 하고, 현명하고 똑똑한 자는 피하여 자기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어떤 태후는 자신의 권력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장자를 폐하고 막내를 세우기도 하였다. 원래 화제(和帝)의 황후였던 등태후(鄧太后)는 장자인 유승이 고질이 있다는 이유로 황제로 세우지 아니하고, 어린 아들인 유륭을 억지로 황제에 앉혔다. 그는 이 때 겨우 백여일 된 어린아이였고, 황제가 된 후 얼마되지 않아 죽어버렸다. 나중에 유곡을 세우는데 나이 겨우 12세였다. 한 태후가 두명의 어린 황제를 세우고, 16년간이나 정치를 농단했다. 동한의 후궁정치간여의 국면은 한나라의 황후제도 및 후궁제도가 성숙하지 못한 일면을 보여준다. 이는 이후 후궁제도를 완비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한정권은 실제로는 호족지주들의 지지하에 건립된 것이다. 광무제는 다른 개국황제들과는 달리, 개국공신을 도살하거나 압박하지 않았고, 그들을 우대했다. 공신들은 대부분 목숨, 대우와 지위를 보전했다. 동한때, 혼인에서는 집안의 격을 중시했고, 이것은 아주 뿌리깊게 박혀버렸다. 그리하여 황제집안과 결혼한 사람은 대부분 장수재상과 명문거족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원래 사회적인 지위가 있던 사람들이고, 그들의 딸이나 자매, 혹은 고모, 이모가 후궁 특히 황후나 태후가 되면, 이런 여인관계를 이용하여 더 많은 은총을 받고 더 높은 권력과 지위를 누렸던 것이다. 여기에 임조칭제하던 태후들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부친과 오라버니를 불러 대권을 맡기고, 군사와 정치의 권력을 장악하게 하였다. 외척중 권력을 잡은 자들은 장기간 권력을 장악하고자, 온갖 방법을 써서 황제를 통제하고 얽어매었다. 어린 황제를 세우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양기(梁冀)는 3명의 어린 황제를 옹립하는데, 충제(유병), 질제(유찬), 환제(유지)였고, 18년간이나 권력을 유지했다. 그는 부친, 형제, 자제가 모두 고관이었고, 사당을 조직하여 부패한 행태를 보였다. 이 때 질제가 양기에게 약간의 불만이 있었는데, 오히려 독살당하고 만다. 양기의 악랄한 수단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욕을 얻어먹을 정도였다. 외척들의 악행은 어린 황제의 불만을 사고, 일단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여 친정을 하게 되면 바로 환관을 이용하여 외척세력을 솎아내곤 했다. 그리하여, 외척과 환관이 교차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비참한 결과가 초리되었다. 

 

동한왕조는 봉건사회가 발전하는 때였고, 여러 어린 황제가 나타나는 현상은 봉건제도를 완비하는데 필연적인 진통이었따.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외척이 득세하고, 환관이 정치관여하는 것은 이러한 진통의 세가지 촛점이었다. 그리고 이후 역대 봉건왕조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끝까지 이 세가지 고질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이 삼대 고질은 봉건군주제도의 멸망과 더불어 없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