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동한왕조내부의 피비린내나는 투쟁: 외척과 환관

중은우시 2007. 10. 12. 21:38

글: wangruochuan

 

동한왕조의 황제는 두번째인 유장(劉庄)부터 시작하여, 죽을 때 모두 청장년이었다. 황위를 계승한 황제의 나이는 많아야 십여세이고 가장 어린 경우는 100일이 안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통치계층에는 외척(外戚)과 환관(宦官)이라는 두 개의 괴물이 나타났고, 이는 동한왕조의 멸망을 재촉하게 된다.

 

황제가 어렸으므로, 모친인 황태후가 자연히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봉건적인 유가학파의 의식에서 황후는 정치를 하거나 다른 남자와 접촉해서는 안되는데, 제국의 최고권력이 홀연 그녀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황후는 이를 악물고 아주 낯선 정치를 하여야 했고, 순식간에 그녀는 심리적인 면과 능력의 면에서 모두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된다. 마치 옷을 모두 벗기고 세상 사람들 앞에 서있는 것처럼 공황을 느끼고 고립무원을 느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잘 알지도 못하는 조정대신들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같이 지내던 친가의 친척들이었다. 그녀는 이런 사람들이 도와주어야 비로소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네번째 황제인 유조(劉肇)는 즉위때 나이가 겨우 10세였다. 그의 모친인 두태후(竇太后)도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빠인 두헌(竇憲)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황제인 유륭(劉隆)은 즉위시에 막 3개월인 영아였다. 그의 모친인 등태후(鄧太后)도 그녀의 오빠인 등즐(鄧)에 의지하여 조정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계속되는 어린이황제가 줄을 이어 나타났고, 외척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바짝 들고 활보하기 시작했으며 조정을 장악했다.

 

외척중 세력이 가장 컸고, 권력을 장악한 시간이 가장 길었던 것은 등황후의 등씨척족들이다. 이들은 30년간 권력을 잡았으며, 후작에 봉해진 사람이 29명이나 되었고, 2명이 재상에 올랐고, 13명이 대원수를 지냈고, 상서(尙書)급의 관리가 14명이나 되었고, 자사(刺史), 태수(太守)는 근 50명에 달하였다. 이로써 방대하고 견고한 권력집단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부에서의 위치는 워낙 공고하여 동요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가 점차 성장하면서, 황권을 외척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을 두고보지만은 않았다. 그리하여 외척의 수중에서 권력을 자기가 되찾아오고 싶어했다. 이리하여 정권과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외척과의 사이에 대립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열번째 황제인 유찬(劉纘)은 9세였는데, 외척의 거두인 양기(梁驥)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견디지 못하고, 당시 아주 유행한 말인 "발호장군(跋扈將軍)"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양기는 두말도 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서 이 외조카인 황제 유찬을 독살해 버린다.

 

황제가 외척과 투쟁을 벌이려면 먼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이러자면 반드시 외부힘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다. 조정의 사대부관리들과 연합하거나 궁중의 환관과 연합해야 했다. 이 두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사대부와 연합할 가능성은 아주 적다. 왜냐하면 황제와 그들의 관계가 그다지 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의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 그들은 얼굴을 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 중 누가 외척세력에 꼬리를 흔드는 자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어릴때부터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환관들이었다.

 

환관은 사람들이 보통 태감(太監)이라고도 부르는 자들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기원은 기원전11세기의 서주왕조때부터이다. 그때 돈있는 귀족남자나 추장 및 군왕들은 모두 상당한 수에 이르는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다른 남자와 바람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들을 죄수처럼 경비가 삼엄한 정원과 후궁에 가둬두는 것이다. 문제는 후궁내의 일들 예를 들어, 시장에서 물건사는 것같은 일은 모두 자기의 여자가 가서 해야 하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외부의 남자들과 접촉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이기적인 남자에 있어서 안심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서주왕조의 희(姬)씨성의 군주들은 아주 잔인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바로, 금전의 유혹과 강박의 수단으로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시킨 후에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환관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짐승같은 잔혹한 제도는 삼천여년간 지속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황제제도가 사라지면서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10세기전에, 환관은 아주 보편적이었다. 돈있는 사람은 집집마다 매매할 수 있었다. 이는 송나라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가 민간에서 엄노(奴)를 두는 것을 금지하게 된다. 이리하여 환관은 황제의 전유물이 된다.

 

그러나, 환관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다. 세계에서 어느 남자도 기꺼이 스스로 환관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쩔 수 없이 환관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심리는 어느 정도 왜곡되게 된다. 그들은 자식을 낳을 수 없으므로, 스스로 비하하게 되고, 동시에 그들은 보통사람에 대하여 원한과 복수의 심리를 갖게 되며, 오로지 황제에게 잘보여 총애받는 것만 신경쓴다. 그래서 그들이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그들은 보통 통상적이지 않은 일들을 벌이게 된다.

 

동한의 황제중 외척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네번째 황제인 유조였다. 그는 하루종일 같이 놀던 환관인 정중(鄭衆)과 연합하여 그의 외삼촌가족에 돌연 칼을 빼들게 된다. 일세를 풍미하던 두헌은 어쩔 수 없이 자살하게 된다. 이어서 여섯째 황제인 유우(劉祐)도 환관 이윤(李閏), 강경(江京)과 연합하여 외삼촌인 등즐을 자살하게 한다. 이후 한 무리의 용감한 새로운 외척세력이 등장하나, 다시 환관에 의하여 하나하나 제거된다. 마치 풀이 어느 정도 자라면 하나하나 잘려나가듯이 새로 성장하고 다시 잘려나갔다.

 

외척은 장렬하게 참패했는데, 원래 권력의 지팡이를 되찾으려고 생각했던 황제는 이 권력의 지팡이가 어느 순간 환관의 손에 떨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최고권력을 장악한 환관은 마치 영원히 실패하지 않는 땅을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이어, 환관은 정부관리의 신분으로 기세등등하게 등장한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은 외척과 마찬가지로 줄줄이 지방행정관리로 임명받아, 환관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죽어라 뇌물을 받고 권력을 농단하는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몰랐다. 심지어 외척이 권력을 잡았을 때 보여준 악랄한 행동보다 배는 심했다. 그리하여, 환관으로부터 해를 입은 외척집단은 환관을 언급하기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고 불공대천의 원수였다. 2세기말, 외척인 하진(何進)이 사대부관리와 연합하여, 환관그룹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하진은 여동생이 열한번째 황제인 유굉(劉宏)의 처였다. 그는 아주 민감하게 역대 환관과 외척의 다툼에서 환관은 황제의 지지를 받고, 외척은 고립무원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관과 싸우려 들었으니 이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생명을 댓가로 얻은 교훈을 되살려 사대부와 연합체를 결성해야만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89년, 한영제 유굉이 병사하고, 태자인 유변(劉辯)이 즉위한다. 하태후(何太后, 하진의 여동생)이 조정을 장악한다. 하씨가족은 비록 외척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이전의 "발호장군" 양기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많다. 환관집단은 정부의 중앙에 우뚝서서 궁정내외, 조야상하에 뿌리를 틀고 있었으며 세력도 크고 네트워크도 넓은 환관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외척집단으로서는 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하씨오누이는 이에 대하여 불만이었고, 사대부 거두중의 하나인 금위군관(禁衛軍官) 원소(袁紹)와 연맹을 맺게 되며, 이로써 환관을 뿌리뽑고자 한다.

 

원소는 이렇게 건의한다: "병주목 동탁(董卓)에게 밀지를 내려 병사를 이끌고 수도로 들어오게 하십시오, 청군측(淸君側, 황제 곁의 간신을 제거한다)을 명분으로 삼아 환관을 토벌하십시오" 하진은 그의 말에 따른다. 그러나 또 다른 금의군관인 조조(曹操)가 반대를 한다. 그는 환관을 상대하는데는 법관 한 명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반란을 유도하면, 나중에 수습하기 힘들 뿐아니라 천하가 어지러워 질 것이라고 보았다. 주부인 진림도 맹목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하진에게 "속담에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잘한 것 하나 잡으려는데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물며 국가대사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장군은 황제의 인척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환관을 제거하려면 불에 발갛게 달구워진 화로에 머리카락을 태우는 것처럼 쉬운 일입니다."  이것은 조조가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주면 공을 세울 수 없을 뿐아니라 나중에 후환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의 명석한 분석은 채택되지 않았고, 머리에 쓸데없는 생각만 있던 하진은 어리석은 계획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환관은 이목이 많고, 계획이 나오자 마자 그들도 알아버렸고, 그들은 먼저 상대방을 제압하는 수법을 써서 하진을 궁중으로 유인해 죽여버린다.

 

원소는 밀모가 들통난 것을 보고, 환관들이 자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금위군으로 하여금 궁문을 불태우게 하고, 황궁으로 밀고 들어갔으며, 환관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나이가 많건 어리근, 평상시의 행위가 어떠했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도륙한다. 당시 나이가 조금 있는 낙양시민중에서 수염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환관으로 몰려 횡액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환관중 큰손격인 장양(張讓)과 단계(段桂)가 새로 막 즉위한 황제 유변를 끼고 포위를 돌파하여 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의 운은 정말 좋지 않았다. 나중에 뒤에서는 낙양에서 추격병이 추격해오고, 앞에는 청군측의 명분을 걸고 온 동탁이 이끄는 양주군단이 길을 막고 있었다.  두사람은 어쩔 수 없이 황하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 유사이래 사대부와 환관간에 발생한 첫번째 결투였다. 궁중의 환관은 거의 모두 죽여버렸다. 모두 3천여명의 환관이 죽임을 당한다. 여기에는 물론 수염이 없어서 환관으로 오인되어 불쌍하게 당한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사대부들도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왜냐하면 이때 동탁의 칼이 이미 그들의 목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