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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岳飛)의 등에 누가 "진충보국(盡忠報國)" 4글자를 새겼는가?

by 중은우시 2007. 8. 10.

 

 

 

남송의 항금영웅 악비는 등에 "진충보국"의 네 글자를 새겨서 애국심을 드러냈었다. 그러나, 악비의 등에 있는 글자는 누가 새겼는지에 대하여 <<송사>>에서 구체적으로 기재하지 않고 있다. 민간에서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 한가지 설은 악비의 모친이 새겨서 악비에게 국가를 위하여 충성하라고 격려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설은 원래 송나라때 병사제도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악비의 등에 새겨진 "진충보국"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이것은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송사. 악비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악비가 감옥에 갇혔을 때, 진회가 하주로 하여금 재판하게 하였는데, 악비는 늠름하게 금나라에 대항한 전공을 내세우면서 "애국이 무슨 죄냐"고 따지고, 하주의 얼굴 앞에 웃옷을 찢어서 '진충보국'이라는 네 글자를 하주에게 보여주었다"

 

북경사범대학의 유표(遊彪) 교수에 의하면, 악비의 모친인 요씨(姚氏)는 농사짓는 여인이었고, 글자를 알았을 가능성이 낮다. 그러므로, 친히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주었을 가능성은 적다. 아마도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의 모친이 사람을 불러서 악비의 등에 네 글자를 새기게 하였을 것이다.

 

악비의 등에 새겨진 글자에 대하여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송나라때는 모병제(募兵制)를 시행했는데, 사병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글자를 문신으로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북송말년까지 이 제도는 여전히 시행되었으므로 악비의 등에 새겨진 네글자도 이렇게 새겨진 것일 거라는 것이다.

 

유표 교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송나라의 병사제도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악비의 등에 새겨진 글자는 그가 병사가 되면서 새겨진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송나라때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국가정규군을 모조리 모병에 의지했던 시대이다. 한당원명청은 모두 징병제였다. 징병은 바로 병역을 의미하고, 국가의 공민이라면 누구나 강제적으로 병역의무를 부담해야 했다.

 

송나라의 모병제는 국가가 백성들 중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국가가 돈을 내서 이들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송나라의 군대는 모두 국가가 돈을 들여 기른 고용병이었다. 인원들은 여러 유형이었고, 난민, 기민, 범죄자들도 군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송태조 조광윤때부터, 군대의 관리와 통제를 위하여, "병사에게 글자를 문신으로 새기는"것은 하나의 제도로 되었다. 모병에 응하여 군대에 들어오면 모두 글자를 몸에 새겨서 표시로 삼았다. 조광윤은 병(兵)과 민(民)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병과 민은 별도로 관리,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국가의 안정에 도움이 되고, 황제의 통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남송사람인 우변이 쓴 <<곡유구문>>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예조(송태조)가 천하를 평정한 후, 사방의 무뢰한들을 모아서 글자를 몸에 새기고 병사로 만들었다" 고서에 나오는 조각조각의 기록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송연묵(松煙墨)"을 사용하여, 관침(管針)으로 몸에 글자를 그렸고, 피부를 직접 찔렀으며 약주등을 발라서 완성했다고 한다.

 

송나라때는 두 종류의 군대하여 글자를 새겼다. 하나는 금군(禁軍)인데 바로 국가의 작전부대이다. 또 하나는 상군(軍)인데 지금의 공병(工兵)으로 국가의 대형공공공사 즉, 도로, 다리공사등을 맡았다. 금군과 상군은 모두 고정된 번호가 있었고, 식별과 관리를 위하여 사병들의 몸에 새긴 글자는 기본적으로 각자 소속한 부대의 번호였지, 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여 병사들이 아무렇게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뇌성병(牢城兵), 즉 수호전에 나오는 임충과 같은 경우 범죄를 저지를 후에 창주로 가서 병사가 되는데 이런 병사들은 강제노역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역시 노성제X지휘등과 같은 표지를 몸에 새기게 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악비의 등에 새겨졌다는 "진충보국"의 네 글자는 그가 병사가 될 때 새겨진 글자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자를 새긴 부위도 송나라때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송나라때 사병들에게 글자를 새길 때는 얼굴에 새겼다. 인위적으로 사병과 백성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며, 이것은 사병에 대한 차별대우였다.

 

송나라는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한 시대였다. 무장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다. 문관, 특히 진사출신의 사람들은 사회지위가 매우 높았다. 무관은 사회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다. 문관을 중시하던 시대이므로 장교들까지도 차별을 받았으니, 일반사병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당시 개명된 사대부들도 이처럼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너무 차별적이라고 느껴서 나중에는 팔뚝, 손바닥, 손등 또는 호구(虎口)에 새기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사병들에게 글자를 새기는 목적은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관리와 통제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얼굴이나 손바닥, 손등처럼 잘 보이는 곳을 선택한 것이다. 만일 악비처럼 등에 새긴다면 이것은 숨어있는 것이므로 표식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가 없다. 이 점은 악비의 등에 새긴 "진충보국"은 모병제도의 병사들에게 글자를 새기던 것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많은 자료들에 의하면, 진충보국(盡忠報國)은 정충보국(精忠報國)으로 쓰고 있다. 왜 그렇게 바뀐 것일까?

 

악비는 금나라에 항전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데, 악비를 표창하기 위하여 당시 황제인 송고종은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네 글자를 써서 악비에게 내린다. 그리고 부하들로 하여금 "정충악비"라고 쓴 깃발을 들고 출정하게 한다. 이후 악비가 출정하는 경우에는 모두 "정충악비"라는 깃발이 따라갔다. 명청이후에 "진충보국"은 "정충보국"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은 명청시대 사람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청시기에 "진충보국"이 "정충보국"으로 바뀌는것은 황제의 권한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정충"이라는 두 글자는 송고종이 직접 내린 글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성들에게 국가가 위급한 시기에는 이러한 "정충보국"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나라때, 몽고인이 통치계급이었고, 한족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 명나라때, 비록 주원장이 한족통치정권을 세웠지만, 실제로 명나라때, 외환은 아주 심각했고, 북방의 몽고세력은 여전히 강성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하에서는 전체 백성들이 이런 "정충보국"의 정신으로 한족통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충보국"은 점점 "정충보국"으로 바뀌어 갔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