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岳飛)는 어떻게 민족영웅으로 조작되었는가? (1)

by 중은우시 2006. 4. 11.

악비의 인품은 존경할 만하다. 그는 확실히 영웅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를 민족영웅의 지위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역사적인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은 많은 측면에서 역대 왕조들이 정치적인 필요에 의하여 조작한 결과이다. 악비의 이런 상황은 역사상의 또 하나의 유명한 장수와 매우 비슷하다. 바로 관우이다. 당연히 관우는 민족영웅으로 조작되어 자리매김하지는 않았고, 충의의 화신으로 조작되었다. 아래에서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악비는 그가 살았던 시절에는 사람들로부터의 평가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송사>>에 비록 그를 미화하는 부분이 있지는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다. 악비의 당시의 지위는 소위 4대장수의 한 명이었고, 다른 한세충, 장준, 유기, 유광세등의 금나라에 대한 항전의 공적도 그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종택(宗澤, 금나라 사람들은 그를 宗爺爺라고 불렀다), 나중의 우윤문등의 사람도 있다. 우윤문이 문사이면서 그가 세운 전공은 심지어 사대장수의 하나인 유기마저도 "조정이 우리 무장을 수십년간 먹여살려왔는데, 누구도 대단한 실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오히려 너와 같은 문관이 큰 공을 세웠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악비를 민족영웅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민족영웅인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 사전적으로는 "외족의 침략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영웅적으로 용감하였던 인물"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24사에서 민족영웅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수천명일 것이다.

 

현재 악비가 금나라에 항전한 것이 도대체 외족의 침입에 항거한 것이냐 아니면 내전이냐고도 다툼이 있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스스로 속이든 말든, 중화민족이든 중국인이든, 중국에서 떠드는 소위 중국인의 역사관이라는 것은 사실은 한족의 역사관이라는 것을.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상 한인들도 여러차례 주변의 소수민족을 침략했으나, 그러나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그 소수민족이 한족의 침략에 항거한 "민족영웅"은 받들지 않는다. 감히 받들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신강독립, 티벳독립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단지 한족이 소수민족(주로는 북방유목민족)의 침약에 항거한 경우만 민족영웅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위 "민족영웅을 평가하는 것은 역사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현재의 중화민족은 간단하게 고대의 특정 민족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우리가 민족영웅을 기념하는 것은 주로 침략에 항거하는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위 민족영웅이라는 것은 사실상 한족의 민족영웅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 이것을 감추려고 하는가. 소수민족들이 듣기에 좀 거슬려도 어쩌겠는가? 원래 그들도 중국인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솔직하게 서로 말하는 것이 서로 편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기준에 의하더라도, 한족은 수천년간 소수민족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공적이 현저한 자, 영웅적인 행동을 보인 자를 악비를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서 민족영웅으로 불러준다면, 아마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중의 대부분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이 없으면서, 유독 악비만이 홀로 뛰어나게 기려지고 있는 것이고, 거의 성인의 정도에까지 부풀려진 것일까? 관우처럼 원래는 삼국시대의 매우 평범한 무장이었고, 촉의 5대장수에 이름을 넣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으며, 문무에서 모두 가장 뛰어난 자도 아니었다. 무에서는 여포가 있고, 문에서는 여몽, 강유(무장들 중에서)가 있다. 명장들이 구름처럼 모여있던 위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강남에 치우쳐있던 오나라의 장수들 중에도 관우를 안중에 두지는 않았었다. 감녕은 여러차례 관우에게는 경멸감을 표시한 바 있으나, 장료는 경시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는 오나라군대에 패배하고 체포되어 목이 잘린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무성"에까지 부풀려진 용기는 있으나 재주는 없었던 무부에 불과하고, 죽을 때도 어처구니없게 죽었다.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무장들이 후세인들에게 그가 이토록 대스타로 존경받는 것을 알게 되면 이빨이 빠질 정도로 웃을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사람은 허풍으로 부풀려지지 않으면 뜰 수가 없는 것이다. 악비도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악비에 대한 조작은 관우에 대한 조작과 거의 동일한 유형의 사람들의 숨은 뜻에 의하여 진행된 듯하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조작에 유리하다는 점이다. 즉, 극적인 인생경력이 풍부하고, 두 사람은 모두 억울하게 죽어서 매우 아깝게 되어, 쉽게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아낼 수 있으며, 그들은 모두 독특한 개인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관우는 아름다운 수염을 지닌 미남자였고, 또 개성이 강했다. 악비 또한 흰 얼굴의 멋장이로서, 사람이 친화력이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쇼를 잘했다. 악비가 쇼를 잘했다고 하면 약간은 폄하하는 느낌이기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는 진정으로 쇼를 했으며, 단지 명성을 낚는 가짜군자들과는 달랐다. 관우의 경우에는  <<좌씨전>>을 때때로 읽었다고 하여, 후세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매우 학문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 그는 글자를 겨우 알았고, 책같은 것을 읽는 사람은 아니었다. 악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등에 글자를 문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 했다. 등에다 문신을 새겼다는 것은 자기가 보고 스스로를 면려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처럼 쇼를 하는 것은 현재에 보더라도 매우 현대적이다. 그리고, 어디를 가더라도 시를 한 수 읊었는데, 아쉽게도 그가 쓴 시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썼다는 유명한 <<만강홍>>은 고증에 따르면 위작으로 밝혀졌으며, 이것도 후세의 문인들이 조작한 것이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을 포장하기 위하여 후세인들이 조작한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관우와 악비는 현대에 태어났더라도 티비의 스타가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재질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한족으로서 소수민족에 항거한 전쟁은 몽염때부터 시작해서, 그 동안 영웅호걸들이 많이 나타났고,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가장 번성했을 때는 한무제 휘하에 여러 장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을 때이다. 위청, 곽거병, 이광 등등. 이 사람들은 군사적인 공적은 물론이고, 민족주의의 각도에서 보더라도 모두 악비보다는 민족영웅으로 불릴만한 자격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민족영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들은 확실히 한족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악비는 그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인물이며, 그는 비록 역사에 전설적인 색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 기여한 바도 별로 없다.

 

다른 사람들 장건, 소무, 반초, 마원과 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현재는 겨우 기억하고 있는 인물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무명의 영웅들이 더욱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삼국내전시기에 흉노에 항거한 민족영웅응 계속 출현했다. 삼국이야기중에서 조역으로 나오는 장료가 있는데, 그는 일찌기 막북에 출정하여 "태조에게 전쟁을 권했고, 선우(흉토의 수장)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조조의 아들중에 조창이 있는데, 그는 친히 흉노를 정벌하여 "스스로 육박전을 벌이고, 오랑캐의 말을 쏘았으며, 화살에 쓰러지는 자가 계속 이어졌다" 북방의 조조정권은 남방을 통일하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북방의 흉노족의 위협으로부터도 방어를 해야했다. 당시의 민족주의 정신의 면모는 조조 부자가 쓴 애국적인 시가를 통하여도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 날 누가 이런 영웅들을 기억하는가? 왜냐하면 아무도 그들을 부풀리고 조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치적인 이유로 그들은 계속 추화(醜化)되었다.

 

역사적인 공적을 놓고 보면, 유유, 조손, 사안 등의 사람은 한민족이 생존하도록 하는데 대하여 악비보다 훨씬 더 공헌했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그들을 민족영웅으로 떠받드는가?

 

민족주의를 얘기하자면, 중국 고대에는 이러한 개념이 없었다. 만일 그럭저럭 있었다고 한다면 "다섯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힌" 오호십육국시대였다. 후조의 염민은 갈족의 수하에서 20년을 은인자중하다가 한꺼번에 갈족 20여만을 죽여버렸다. 이것은 이미 민족주의가 아니다. 종족말살주의이다. 유명한 악비의 이런 싯구는 어떤까?

 

장지기찬호로육(壯志飢餐胡虜肉) 배고프면 오랑캐의 살로써 밥을 삼을 큰 뜻을 세우고

소담갈음흉노혈(笑淡渴飮匈奴血)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는 것을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악비의 충군사상과 조금 다른 점은 염민의 다른 민족에 대한 살육은 강렬한 민족보복의식의 발로라는 점이다. 염민은 동진왕조에 대하여 오랑캐를 토벌하자는요청을 보냈으나, 아무런 답변이 없자. 머나먼 북방에서 각 호족세력들에 대항하여 홀로 싸우면서 수많은 오랑캐족을 죽여버렸다. 나중에 포로가 되어서도 "너희들 오랑캐 개 돼지들도 왕이니 황제이니 하는데, 나와 같은 중화영웅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결국은 용감하게 죽었다. 악비에 대하여 숭배해 마지 않는 사람들도 역사상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서로 비교할 때, 악비가 더욱 영웅의 기개가 있는가? 아니면 더욱 민족적인 기개가 있는가?

 

중국인은 왕왕 쇼를 잘하는 스타와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열심히 힘들게 일한 영웅은 기억하지 못한다. 중국의 역사는 너무 길고, 보통 사람들이 역사를 전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역사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다. 많은 심심한 문장가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비극적인 인물에 대한 동정심리를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선동하고 부풀리며 조작하는 것이다. 역사의 원래의 면모에 검은 연기를 뿌리며, 이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송시기에 양업과 반미가 있는데, 사실 반미는 요나라에 항거하는 주요장수였고, 양업은 단지 그의 휘하의 부장에 불과했다. 영업의 죽음도 반미의 잘못이 아니었다. 단지 양업과 감군인 왕선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후인들은 양업에 대하여 부풀리고 조작하여, 반미를 매국노로 추화하였다. 마찬가지로, 악비와 같이 4대장수의 하나였던 장준은 그와 악비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악비사건에 참여하였음으로 이후에 악비를 받들기 위하여 고의로 그를 폄하하고, 그가 금나라에 항거하여 이룬 공적들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왕왕 악비가 죽지 않았더라면, 대송왕조는 중원을 회복하였고, 직접 금나라의 수도로 쳐들어가 금나라를 멸망시켰을 것이라고도 한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이것은 모두 무지의 환상이다. 하나의 왕조의 흥망성쇠는 한 두사람으로 인하여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악비가 아무리 대단하고, 그가 이루었던 영창대첩등등의 승리가 있었지만, 그것이 적벽대전이나 비수대전보다 대단한가? 이것은 모두 남방정권이 북방정권에 대항하여 취득한 역사적인 승리들이다. 그러나, 언제, 승리후의 남방이 역량을 모아 계속 진공하여 북방정권을 이긴 적이 있던가? 더구나 북방의 유목민족정권은 계속하여 남방의 한족 정권에 비하여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중국의 수천년의 역사상 모두 북방정권이 남방정권을 공격하여 진공하는 태세였고, 몇번에 걸쳐 철저하게 남방정권을 소멸시키는 것이었지, 남방정권이 북방정권을 공격하여 소멸시킨 것은 없다. 비록 위청, 곽거병, 당태종등 한족정권이 강성하였을 때도 한족들은 북방민족을 좀 더 멀리 쫓아내었을 뿐이고, 그들을 철저하게 소멸시킨 것은 아니었다. 악비가 이러한 역사의 철칙을 깨뜨릴 수 있었을까? 그 한 사람의 힘만으로 삼국시대 오나라 촉나라 두 나라의 연합작전에 참여했던 수 많은 영웅엘리트들의 힘을 넘어설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래의 것들일 것이다. 첫째, 그가 죽은 후에 남송은 그가 없음으로 인하여 멸망할 위험에 처해지지 않았고, 계속 100여년을 존속했으며, 금나라는 오히려 남송보다 먼저 멸망한다. 둘째, 나중에 우윤문이 취득한 채석기대첩은 적벽대전, 비수대전과 비견할만한 대승리로 평가되나, 남송군대는 계속 진공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킬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남방이 북방에 대하여 약세에 처해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셋째, 나중의 한주, 장준등의 사람들이 계속 북벌을 진행하나, 실패로 끝난다. 결과적으로 남송은 금나라에 잘 보이기 위하여 한주를 죽여버리고, 그의 머리를 금나라에 보내어 강화의 예물로 삼는다. 그러자 금나라도 전쟁을 중지하고 강화하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금나라의 누구도 한주를 동정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