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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岳飛)신화의 허구

by 중은우시 2007. 3. 4.

<<송사(宋史)>>에 기재된 <<악비전(岳飛傳)>>은 실제로 악비의 손자인 악가(岳珂)가 악비사후 수십년후에 그를 위해서 편찬한 사전(私傳) <<악왕행실편년(鄂王行實編年)>>에 근거한 것이며, 근본적으로 신뢰성이 없다. 이 이치는 얼마전에 모택동의 손자가 미디어에서 자기의 할아버지가 세계2차대전의 승리를 지휘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당하다.

 

이 전기에는 상당히 많은 사실(史實)을 기록하고 있는데, 고증을 해보면 이는 모두 날조하거나 위조한 것이다.

 

예를 들어, 소흥10년(1140년) 7월 14일, 송-금간의 영창대전(潁昌大戰)에 대하여 악비의 부장인 왕귀(王貴)는 <<왕귀영창첩주>>에서 적 "5백여명"을 죽였다고 했는데, 악가는 이를 "적 5천을 살해하였다"고 과장했다. 이는 실제로 악가군이 금나라군대를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였고, 이 전투중에 "적의 통군, 상장군 하금오를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의 하금오(夏金烏)가 포함된 것 역시 악가의 날조이다. 다른 사료에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소위 "올술유회서(兀術遺檜書)"도 악가가 스스로 날조한 것이다. 다른 사료에는 전혀 기재가 없고, 오로지 이곳에만 나온다. 그리고 이는 상리에도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회와 맹약을 맺은 것은 금나라의 주화파대신인 달뢰였고, 올술이 아니었으며, 올술은 골수주전파인데, 바로 그가 주화파인 달뢰를 죽이고 남송과 다시 전투를 개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런 이유없이 유서를 진회에 보내어 화평을 요청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악비가 오백기마로 금나라병사 10만을 무찔렀다"는 "주선진대첩"이라는 것도 사실 숫자만 보더라도 이것은 황당하게 날조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고증을 통해서, 역사학계에서는 근본적으로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며 그저 악가가 스스로 날조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소위 하룻밤에 12개의 금패를 보내여 악비로 하여금 회군하도록 하였다는 것도 극적인 효과를 위한 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소위 "악비가 괴자마(拐子馬)를 대파했다"는 것에 관하여, 여기에 나오는 "괴자마"는 악가가 아무렇게나 날조한 것처럼 쇠줄로 연결시킨 소위 '연환마'가 아니라 그저 '양날개를 담당하는" 측익기병일 뿐이다. 이것은 송나라때 사람들의 속칭이었으며, 고증을 통하여 이미 정설로 굳어졌다. 이와 관련된 사적도 완전히 날조임을 알 수 있다. 청나라때 강희황제도 말한 바 있다. 여진인들은 말에 철갑을 입히는 습관은 없다고 당시 여진인들도 이런 것을 만들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여러 필의 말을 쇠줄로 연결시켰다는 것인데, 말이 달리기 시작하면, 쉽게 쓰러지게 될 것이고, 이것은 도대체 말을 타본 적조차 없는 사람의 날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기병의 장점은 속도와 기동력인데, 말을 쇠줄로 연결시키면 공격력을 발휘할 수도 없고, 오히려 속도가 하강할 것인데, 도저히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악비는 '백전백승'한 장수도 아니다. 예를 들어 <<금사. 왕백룡전>>에는 "군대가 채석을 넘어, 악비를 격파했다. 유립, 노상등의 병사가 획득한 군량이 백만에 달했다"고 되어 있다. <<금사. 완안앙전>>에는 "송나라 장수 악비가 병사 10만으로 100만이라 칭하며 동평을 공격했다. 동평에는 병사 5천이 있었는데, 급히 나가서 막았다. 이때 완안앙은 여러 깃발을 숲에 배치하여 병사가 있는 것처럼 꾸몄고, 곧 정예병사가 도착할 것처럼 보였다. 악비는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며칠을 대치하다가 물러갔다" "완안앙은 병사를 이끌고 지원했다. 악비는 물러갔다". <<금사. 복산혼단전>>에는 "천권2년, 송나라 악비와 대치했다. 혼단은 60기를 이끌고 적의 깊이 들어가 염탐했다. 언릉에 이르러 송나라의 양식보호부대의 군인 700여명을 물리쳤고, 여럿을 포로로 잡았다" <<금사. 완안종수전>>에는 "종필이 다시 하남을 취하였다. 종수와 해릉은 모두 군으로 가서 직위를 맡았다. 송나라 장군 악비의 군대가 호,숙의 사이에 있었다. 종수가 보병,기병 3천을 이끌고 그 핵심지역을 공격했다. 여러 군과 함께 그들을 격패시켰다"

 

그러나, <<송사>>는 송의 입장에 서서, 송나라군사의 전적을 과장했다. 패한 전투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들의 통병이다.

 

이외에 사서에는 악가군이 한번 적을 죽이면 '수천수만'이라고 하고 있고, 심지어 위에 언급한 것처럼 '오백기병으로 금나라 10만병사를 격파했다'고 날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분명한 날조이외에 사실 그 안에는 바꿔치기한 것들도 많다. 실제로 악가군이 대부분의 전투에서 죽인 적군은 사실 진정한 여진의 "금나라병사"가 아니었고, 그저 "제(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킨후 세운 허수아비 정권)"정권의 '한족군대'였다. 그리고, 금나라 병사들에 의하여 징집된 "첨군(簽軍)"이었다. 이 첨군은 그저 일회용의 부대였다. 그저 교전때 전면에서 방패역할을 하며 상대방의 화살과 돌을 소모시키는 부대였다. 이들은 한족 백성들중에서 붙잡아온 장정들이다. 몽고인들은 나중에 자주 이런 수단을 사용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군대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였다. "첨군"이라는 명의조차도 갖지 못했다. 소위 악가군의 혁혁한 전공이라는 것이 많은 것은 이런 아무런 전투력도 없는 한족의 "첨군"이나 "허수아비제나라군대"를 상대로 얻은 것들이다. 모두 기억해야 할 것은 금나라군대에서 악비를 "악할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금나라군대중의 "한족인 제나라군대"이거나 "첨군"이었다. 이는 한족의 구어(口語)이다. 이치로 보면, 여진의 금나라 사람들이 이민족인 적군이고 자기에게 패배한 장수를 "악할아버지"라고 부를 리가 있겠는가.

 

이외에 악비의 군대도 백성을 노략질했다. 이는 많은 사료에 나온다. 예를 들어, 진량의 <<중흥유전>>에도 기록되어 있고, <<삼조북맹회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악비의 부장인 한순부는 조성을 공격할 때, "옷을 벗고 부녀를 잡아와서 술을 따르게 했다"고 되어 있다. 결과는 결국 이렇게 하다가 패배하고, 악비는 화가나서 그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악비의 소위 <<만강홍(滿江紅)>>이라는 송사도 명나라때 사람의 위작이다. 글 쓴연대는 명나라 중엽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이도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일찌감치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이 사는 송나라, 원나라 사람의 어떠한 저술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악가후손들이 수록한 가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관련된 기재도 전혀 없다. 명나라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계가 편찬한 <<악무목유문>>에 나오고, 홍치15년(1502년) 절강제학부사인 조관이 쓴 악분사비에 들어가 있게 된다. 그리고 조관비기에도 악비의 다른 시 <<송자암장선생북벌>>이 있는데 이것도 명나라 사람들의 고증으로 위작임이 밝혀졌다. 사에 나오는 '하란산'이라는 문구가 헛점이었다. 하란산은 이전 살마들이 변방을 가리키던 '옥문' '천산'과 같은 유형인데, 이것이 사서에 기록된 것은 북송때부터이고, 당송사람들은 하란산을 시로 쓰면 모두 실제로 그 곳을 가리킨 것이다. 하란산은 지금의 내몽고 하투의 서쪽인데, 남송때는 서하에 속했고, 금나라의 땅도 아니다. 금나라의 황룡부는 길림성내에 있었다. 악비가 서하경내에 있는 '하란산'을 가지고 금나라의 황룡부를 비유하였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명나라때 북방의 달단족이 자주 하란산을 통해서 감, 량일대를 침입했다. 명나라 홍치11년(1498년)에 명나라의 장수 왕월이 하란산에서 달단을 물리쳤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만강홍>>은 왕월 또는 왕월의 수하문인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악비의 성격도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친근하지 않았다. 그의 외삼촌은 그의 손에 의하여 살해된다. 그리고 그는 친히 그의 심장을 끄집어낸다. 비록 그의 외삼촌이 작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수단이 너무 악독하다. <<삼조북맹회편>>에 의하면 "먼저 악비는 홍주에 있을 때, 강남병마검할 조병연과 술을 마셨는데, 크게 취하여, 병연을 때려 죽을 뻔하였다"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다가, 술에 취하여 때려죽일뻔하다니, 그의 성격이 얼마나 거칠었던지 알 수 있다.

 

악비는 부하에 대하여도 아주 가혹했다. 그의 한 막료가 좋은 뜻에서 그에게 공을 올리자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핑계를 대어 그에게 채찍 5백대를 친다. 그의 수하사병은 다른 사람의 새끼줄 하나를 가져갔다는 것을 이유로 참수당했다. 이런 다른 사람의 머리를 자름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하는 것은 조조가 양식관리의 머리를 자름으로써 군심을 안정시킨 수완과 완전히 일치한다.

 

악비의 수하장수에 부경이 있었는데, 그는 남송의 다른 군대의 수령인 유광세에게 가고자 하였다. 악비가 이를 알고는 부경을 죽여버렸다.

 

악비는 같이 금나라에 항거하는 다른 우군들에게도 자주 악독한 수단을 썼다. 예를 들어, 유경은 악비와 마찬가지로 통제사였는데, 어떤 사람이 악비에게와서 유경이 음모를 써서 악비의 부대를 집어삼키려한다고 하였다. 악비는 먼저 손을 써서 유경을 죽이고 그 부대를 자기 부대에 병합했다.

 

사실 이런 사정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악비가 자기의 실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악비 및 그의 "악가군"은 군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악가군은 거의 사병과도 같았다. 만일 그의 세력에 크도록 놔두었다면, 아마도 당나라의 절도사들처럼 한 자리에 할거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조구(남송황제)의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결국은 피살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악비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모두 섭공호룡이다. 거리를 멀리두면 아름답지만, 진짜 함께 생활한다면, 아마도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