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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중국대륙의 간체자(簡體字)에 관한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7. 7. 13.

글: 이여주(李汝舟)

 

요즘은 무슨 기담괴론(奇談怪論)이 다 있다. 여기에 하나를 소개할 까 한다. 어떤 사람은 중국대륙의 경제기복은 모두 한자의 번체(繁體), 간체(簡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웃기는 소리가 아닌가?

 

우스개소리를 먼저 두 가지 소개한다:

 

개혁개방초기에 대만의 한 노인이 중국대륙으로 친척방문을 왔다가 돌아간 이후에 집안 사람들에게 대륙이 어떠냐고 물으니, 그는 탄식을 하면서 12글자를 얘기했다고 한다.

 

친불견, 산불생, 애무심, 창공공(親不見, 産不生, 愛無心, 廠空空)

[문언해석] 친척은 보이지 않고,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고, 사랑에 마음이 없고, 공장은 비어있다.

[숨은의미] 친(親)의 간체자는 친(亲)이어서 견(見)자가 빠졌다. 산(産)의 간체자는 산(产)으로 생(生)을 빼버렸다. 애(愛)의 간체자는 애(爱)이어서 심(心)이 빠졌다. 창(廠)의 간체자는 창(厂)으로 안을 비워버렸다.

 

유문군(遊文君)이라는 사람은 "친"과 "이"라는 두 글자에 대하여 대련을 만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지친불견신중국(至親不見新中國)

심애근존구중화(心愛僅存舊中華)

 

신중국에는 가까운 친척이 보이지 않고,

구중화에만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구나.

 

당연히 대륙에는 간체자를 쓰므로 "친"에는 "견"이 없고, 대만은 번체자를 쓰므로 "심"이 "애"에 들어있다.

 

나중에, 번체자를 쓰는 대만, 홍콩과 해외자본가들이 대륙에 와서 투자를 하게 되면서, 대륙의 지도자들도 번체자로 글을 써주고 서명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륙은 금방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했다. "산(産)"에는 "생(生)"이 있고, "창(廠)"의 안에도 더이상 비어있지 않게 되었다. 외환보유고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친"은 아직도 보이지(견) 않고, 사랑(애)에는 아직도 마음(심)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천천히 해야할 것이다.

 

원래는 우스개소리였는데, 좀 그럴듯하기도 하다.

 

오랫동안 편집인을 하다보니, 정부에서 규정한 간체자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러해동안 습관이 되다보니, 원래의 반감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그다지 강렬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들어 대만, 홍콩의 사람들과 해외화교들을 접촉하게 되면서 한담하는 중에 이런 말들을 하곤 했다. 간체자의 병폐는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특히 최근들어 특별히 "중화문화의 홍양"을 강조하는데, 관방에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원래 좋았던 전통문화를 다 망쳐놓고서, 지금은 한편으로 파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양시키자고 하고 있으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화문화를 얘기하자면, 필자는 한자처럼 선명한 민족적 특색을 지닌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자는 형상이 아름답고 과학적이며 역사적인 함의가 있다. 간체화시켜버리자 원래의 방정(方正), 평형(平衡), 조화(調和)적인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렸다. 예를 들어 "화(華, 간체자는 华)"자를 보면, 번체자는 꽃이 무성하게 피어있는 나무와 같이 느껴지고, 대칭적이고 평온하며 보기에 좋다. 그러나, 간체자는 대칭이나 평형이 없다. 육서(六書)의 규칙에도 맞지 않는다. 보기에 정도가 아니라 사마외도같은 느낌이 든다. "애(愛, 간체자 爱)"는 더욱 그렇다. 마음(心)도 없는데 무슨 사랑(愛)인가.

 

간체자는 전통적인 심미관에 대한 일종의 전복이고, 그 해악은 무형중에 아주 크다. 우리가 한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용하는 측면이외에 한자의 평정, 조화, 협조의 아름다움때문이다. 보기에 편안하고, 1필, 1획이 모두 내력이 있으며,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간체자는 한자의 이런 미학원칙과 형성의 과학적인 원칙을 모두 뒤집어엎어버렸다. 이것은 민족문화의 심리상의 전복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왜 아름다운 것인지, 추한 것이 왜 추한 것인지 모르게 되었다. 전통관념은 문자를 신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었고, 마음대로 망쳐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이런 신성한 것을 손쉽게 뒤집어버리다니 또 무엇을 쉽게 뒤집지 못하겠는가.

 

한자의 서예는 하나의 독립한 예술이다. 이는 한자의 풍부한 미학적인 특징때문이다. 이런 특징을 망쳐버리고나서 또 무슨 예술을 논하겠는가. 그래서, 평형수직마저도 잘 모르는 관리들이 관청에서 연 서법학회안에서 무슨 "서법가"로 행세하게 되는 것이다. 가는데마다 붓을 들어 글을 써주고, 닭다리, 개꼬리처럼 커다랗게 아무렇게나 휘갈겨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금박을 입혀서 써가지고 부끄럼도 없이 대교(大橋)나 대가(大街)에 걸어놓는다. 한 관리가 삼협대교에 글을 써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서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 이게 뭐라고 쓴 거지?" 그러면 다른 사람이 "왜 대교위에 삼협화과(三峽火鍋, 삼협샤부샤부)라고 쓰여있지?" 그러면 다른 사람은 "아냐. 삼협대교(三峽大橋)잖아."라고 하면, 또 다른 사람은 "뭐라고 썼는지, 쓴 넘이나 알지. 원."이라고 하게 된다. 한자를 이처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다니 다른 아름다운 것들도 어찌 엉망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이것은 정말 중국문화의 비애이다.

 

그렇다. 고인들고 간체자를 썼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근거로 얘기하기도 한다. 간체자에도 이치가 있다고. 맞다. 고인들도 간략화한 글자를 썼다. 그러나, 정식의 서적, 문건, 엄숙한 문서에도 간략화된 글로 썼던가? 없다. 간략화된 글자는 응급조치였지, 정식의 경우에 쓰이지는 않았다. 민간에는 간화자가 유행하고, 시시때때로 바뀌고, 관청에서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 잘못은 있지만, 범람의 재난까지 겪지는 않았었다. 관청에서 이와 같이 미학원칙에 위배되고 과학적인 조자(造字)원칙에 위배되는 간체자를 법정화하다니, 그 결과는 바로 아름다운 민족의 심미전통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뒤집어엎기는 편한데, 회복하려면 정말 어렵다.

 

어떤 사람은 번체자가 쓰기 어렵다고 한다. 간체자는 쓰기 쉬운가? 필획이 많은 글자를 잘 쓴다면, 그 자체가 일종의 심리와 기술의 훈련이 아닌가.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다면, 쉬운 일이야 못할 것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