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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China의 유래

by 중은우시 2007. 3. 22.

글: 유앙(劉仰)

 

영문에서 도자기(china)와 중국(China)이 같은 단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서방문자에서 "China"라는 말은 "도자기"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아주 널리 퍼져 있고, 거의 생각할 필요도 없는 정설인 것처럼도 얘기되어 진다. 어떤 사람은 고증을 통하여, 당시 경덕진(景德鎭,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한 곳. 강서성에 있음)의 곁에 'china'와 발음이 비슷한 지명이 있다고 하며, 그래서 이 지명이 바로 도자기를 가리키는 명사화하였고, 나아가 중국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그저 바램일 뿐이고, 아름다운 오해라고.

 

서방국가의 중국에 대한 이해는 오랜 기간동안 중국이 서방을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모호했다. 문자로 기록된 초기역사에서 서방의 중국에 대한 칭호는 모두 비단과 관련이 있고, 도자기와는 관련이 없다.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벌할 때도 중국의 존재를 알지 못했었다. 당시 그들은 아주 먼 동쪽에 '비단'을 생산하는 나라가 있는데, 당시 그들은 이 나라를 "새리사국(塞里斯國, Seres)"이라고 불렀다. 알렉산더대왕이 아프간에 도착한 후, 동으로 길게 뻗은 설산을 보고서는 더 이상 진격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남하하여 인도로 갔다. 동서방은 이 때 한번 직접 교류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쌍방은 모두 각자의 상상속에서 존재했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서방이 중국에 대하여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비단으로부터라는 점이다. 서방은 "새리사국"에 대한 모든 묘사에서 비단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서방의 "새리사국"의 비단에 대한 묘사는 모두 잘못된 것들이었다. 기원전 37년, 로마의 저명한 시인인 버질(Vergil)은 <<농사시>>에서 비단을 생산하는 "새리사국"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비단이 부드러운 양털이 나는 나무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로마의 또 다른 유명한 시인인 호라티우스(Horatius)도 시반의 부드러움과 정교함을 노래했다. 당시 잘 모르던 시절에 서방은 비단의 고향에 대하여 여러가지 떠도는 유언비어가 많았고, 와전되었다. 예를 들어, "새리사국"의 사람들은 140세, 200세까지 살 수 있다든지,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수명이 300세에 이른다든지 했다. 그들은 그저 "새리사국"이 인도보다 동쪽에 있다는 것만 알았다.

 

현재, 서방이 중국을 부를 때 사용하는 "지나(支那)"라는 칭호가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1세기이후이다. 1세기중엽, 그리스어로 쓰여진 <<에리투리아해항해기>>에서 처음으로 "지나(支那)"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의 작자는 누구인지 미상이다. 이 책에서는 "지나인(支那人, Thinae)을 언급하고 있는데, 명백하게 비단이 여기서 온다고 설명했다. 소위 "에르투리아해"는 지금의 인도양을 말한다. 이 책에서 소개한 "지나"는 서방의 이전의 소개와는 달랐다. 처음으로 해로를 통하여 "지나"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예전에는 육로를 통하여 "새리사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하였었다. 그러나, 육로든 해로이든, 최종목적지는 모두 비단의 고향이었다. <<에르투리아해항해기>>의 저자는 "지나"에 이르는 항해노선을 소개하는데, 그다지 상세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작자가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을 썼을 것이라고 보고, 자신이 직접 항해한 기록은 아니라고 본다. 이 서방역사상 첫번째로 출현한 "지나"는 도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저 비단과 관계있을 뿐이다.

 

일찌기 어떤 사람은 "신랑(新浪)"의 영문이름 "Sina"에 대하여 비판한 바 있다. 이 단어는 "지나"를 대표하는 것이고, 모욕적인 단어라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부분적으로 정확하다. "Sina"는 확실히 "지나"를 대표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탄생할 때 및 그 이후 장기간동안, 전혀 모욕적인 색채는 없었다. "Sina"라는 칭호는 2세기에 탄생하였다. 당시 서방세게는 '천동설'의 주창자인 프톨레미가 세계지도를 만들었는데, 이 지도에는 "지나"가 있었다. 서방문자로는 "Sina" 또는 "Thina"였다.

 

프톨레미의 이 지도는 아주 재미있는 국면을 조성한다. 이후 서방은 오랫동안 두 개의 "중국"으로 이해한다. 하나는 육지를 통해서 도착할 수 있는 "새리사국", 또 하나는 해로를 통해서 도착할 수 있는 "지나". 비록 두 곳이 모두 비단을 생산하는 곳이지만, 서방의 지리관념에서는 두 지방이 자신들과 동일한 유라시아대륙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원나라때,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오고, 그는 자기가 이미 "지나"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리사국"에 도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오해는 계속되다가 나중에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오면서부터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2세기에 프톨레미의 지도에서 나온 "지나"는 도자기와 관련이 있을까? 관계없었다. 먼저, 프톨레미의 "Sina"는 비단이 나는 곳이었다. 우리는 발음상으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2세기때, 중국은 동한시기였고, 전문가들에 의하면 자기(瓷器)가 중국에서 막 생산되기 시작한 때였다. 이전까지는 도기(陶器)였다.  현재 중국에서 발견되는 한나라때의 자기는 많지 않다. 그러므로, 비록 그 때 해외에서 중국을 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비단이었지, 도자기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셋째, 프톨레미는 "Sina"에 대한 묘술은 이전의 역사기록에서 빌린 것이고, 2세기의 현실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넷째, 중국의 도자기가 정식으로 형성된 시대에 대하여 중국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중국공예미술대사전>>에서는 중국의 도자기는 진(晋)나라때 생산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종합하면, 서방문자에 처음 출현한 "지나"는 도자기와는 무곤하다는 것이다.

 

현재 영문의 "China"라는 단어는 아주 늦게 나타난다. 영어라는 것이 라틴어에서 분화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영문의 "China"라는 단어의 어원은 당연히 "Sina"일 것이고, 영문으로 만들어낸 단어는 아닌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지나"라는 칭호는 도자기보다 먼저 출현했다. 먼저 "지나"가 있고 나중에 도자기가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두 단어가 나중에 하나의 단어로 되었다면, '도자기'가 '지나'를 빌린 것이지, '지나'가 도자기의 이름을 빌린 것은 아니다. '지나'라는 말의 더욱 적합한 해석은 당연히 비단에서 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