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헌충)

장헌충의 짧았던 "대서왕(大西王)" 시절

중은우시 2007. 6. 29. 19:18

명희종 천계7년(1627)년부터 중국역사상 가장 거대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주도적 인물인 이자성은 북경을 치고 들어갔고, 또 다른 주도인물인 장헌충은 무창(武昌)에서 대서정권을 세우고, 3개월간의 짧은 "대서왕"을 지냈다.

 

명숭정15년(1642년), 오명이 자자한 "평적장군(平賊將軍)" 좌량옥(左良玉)은 무창, 한구의 두 도시에서 노략질을 한 후 황급히 도망쳤다. 조금 있다, 이자성이 부하를 이끌고 한양부(漢陽府)를 점령했고, 크고작은 선박 4,5천척을 몰수했다. 그러나, 강의 물살이 거셌고, 농민군이 수전에 익숙치 않아서, 이자성의 부대는 무창을 공격하는 것은 포기하고, 운몽을 거쳐 양양으로 되돌아갔다.

 

이전에, 안휘경내에서 활약하던 장헌충의 부대는 조금 생각한 후에 늠름하게 부대를 이끌고 무창으로 다가갔다. 그는 군사(軍師) 반독오(潘獨鰲)를 무창에 잠입해서 내응하게 하였고, 자신은 대군을 통솔하고 안휘,호북의 경계에 있는 대별산지구로 들어갔다. 황매를 함락시킨 후, 호북성으로 대거 밀고 들어갔다. 명나라조정은 대군을 보내어 막았고, 장헌충의 서진은 실패했다. 무창성에 잠복해 있던 반독오는 심회림(沈會霖)이 고발하여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이 때 마침 이자성의 부대가 무창을 공격하려 하였으므로, 좌량옥은 부대를 이끌고 강물을 따라 배를 타고 도망쳐버렸다. 장헌충은 이 틈을 타서, 무창으로 다가갔고, 무창성은 함락위기에 놓였다.

 

당시 지방관리들은 무창에 있던 초왕(楚王) 주화규(朱華奎)가 돈과 물자를 내놓아서 수비병사를 격려해주기를 바랐다. 호광삼사의 관리들은 초왕부에 모여들어가, 초왕에게 무릎을 꿇고 군자금으로 쓸 수 있게 은수십만냥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초왕부에서 근무하던 원 대학사인 강하 사람 하봉성(夏逢聖)까지 참여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주화규는 한푼도 내놓지 않았다. 대신, 하인을 시켜서 원래 주원장이 아들들을 왕에 봉할 때 초왕 주정에게 주었던 도금의자 하나를 내놓으면서, "이것이면 군대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고 하였다. 장헌충이 성을 함락시키기 직전이 되어서야, 주화규는 금은을 내놓고 병사를 모집했다. 이렇게 모인 자들은 이자성의 부대에 궤멸당했던 패잔병들이었다. 이들로 "초부신병(楚府新兵)"을 구성해서, 초부장사(楚府長史)인 서학안(徐學顔)이 이끌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초왕부의 사병이었고, 실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이들로서 장헌충의 농민군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1643년 5월 29일, 장헌충은 무창을 함락시켰다.

 

장헌충은 무창을 함락시키는데, 그다지 격전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저 앉아서 먹은 것이다. 농민군이 성안으로 들어간 후에, 악행이 심하지 않은 관리들은 여전히 예우해주었다. 당시 성안에 있던 하봉성은 일찌기 동각대학사, 예부상서를 지내고 무창성에서 농민군에 대항하는 부대를 조직한 바 있었지만, 장헌충은 여전히 그를 "선생"으로 모셔서 예우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봉성은 충신의 이름을 얻기 위하여 가솔을 이끌고 돈자호(墩子湖, 자금의 무창 자양호)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당시 하봉성의 뒤를 따른 명나라 관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숫자는 아주 미미했다. 그래서, 청나라초기의 문인들이 일찌기 "초(楚)지방이 전부 함락되었는데, 죽은 자는 몇 되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성안의 명나라관리들중에서 약간의 재주를 지니고 있는 자들은 장헌충이 모두 등용했다. 자기의 군사인 반독오를 죽인 적이 있는 심회림까지도 여전히 한양지부로 남겨두었으니, 그의 흉금을 알 만하다.

 

장헌충은 전후에 파괴된 무한삼진을 보고, 신속히 사후처리를 시작했다. 초왕부에 있던 돈과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동시에 스스로 "대서왕"이 되어, 무창에 대서정권을 건립했다. 그리고, 호광회성을 경성으로 고치고, 서왕지보를 주조하며, 무창부는 천수부(天授府)로 고쳤다. 그리고 주종문(周綜文)을 천수지부로 삼았다. 강하현은 상강현으로 고쳤다. 대서정권의 중앙에는 육부오부(六部五府)를 두었는데, 경성에 오성병마사(五城兵馬使)를 두었다. 장헌충은 원래의 초왕부를 신왕궁으로 삼았고, 궁궐의 앞에는 큰 깃발을 두 개 세웠다. 그 위에는 "천여인귀(天與人歸, 하늘이 내리고 인심도 돌아왔다)", "초현납사(招賢納士, 현명한 선비를 모신다)"라고 썼다. 무창성의 아홉 성문에도 두 개의 큰 깃발을 내걸었는데, 그 위에는 "천하안정(天下安靜, 천하가 안정되다)", "위진팔방(威振八方, 위엄이 팔방으로 떨치다)"라고 적었다.

 

현명한 선비들을 모시고, 인재를 끌어모으기 위해, 장헌충은 무창에서 과거를 실시하고, 학당을 열었다. 대서정권은 짧은 시간내에 과거시험을 계속 실시했고, 무창에서 감군 이시화를 파견하여 과거시험을 주재하게 했고, 20명을 진사로 합격시켰고, 주, 현의 책임자로 내보냈다. 이외에 48명을 추가로 뽑아서 각각 부, 주, 현에서 보좌진으로 썼다. 당히 60세이던 한양 사람 진각환(陳珏還)이 장원을 했다. 당시 과거시험장은 아주 열기가 있었다. 과거시험에 참여한 선비들을 앞다투어 들어갔고, 조금만 글을 아는 사람이면 모두 참여했다.

 

장헌충은 학도등 전문직을 임명하여 학당을 관리하고, 친히 부학(府學)에 가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격려했다. 그리고 그들중에 수십명을 선발하여, 지방정부로 보냈다. 당시, 대서정권에서 교수를 지낸 용관사(龍貫士)는 이런 고시를 내보내서, 장헌충이 부학을 시찰한 광경을 기록하고 있다: "서왕은 7월 15일 부학을 다녀갔다. 여러 학생들은 먼저 기록을 모아서, 천자가 왕림했을 때의 의식에 대하여 연구해서, 선왕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했다. 문덕을 발양하는 것이 대서국의 큰 뜻이다. 잊어서는 안된다" 장헌충은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부자들에게 타격을 가하는 정책을 썼다. 당시 부자들은 선박을 강 중앙에 세워서 전란을 피하였고, 때때로 강이나 호수에 숨겨두곤 하였다. 장헌충은 병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이를 찾아서 막았고, 부자들의 배 1000여척을 몰수했는데, 그 안에는 양식과 물자가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을 군대에 제공했다.

 

장헌충은 또한 무창 및 주변지역에서 15-20세의 청년들을 의군에 참가하도록 모집했다. 이 청년들은 체력이 뛰어나고, 걸리적거리는 가족도 없어, 훈련을 받은 후에 대서군이 남하하여 장사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사천에 들어갈 때 주력군이 되었다.

 

장헌충의 일련의 조치와 정비를 거친 후, 당시 무한삼진은 질서를 되찾았고, 생기가 되살아났다. 호광포정사의 모두 21개주현이 장헌충의 대서정권에 귀순했다.

 

이 해 8월, 좌량옥은 명사종의 독촉을 못이겨, 군대를 이끌고 강서쪽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명나라의 대군이 무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장헌충은 부득이 무창을 포기했고, 그의 짧은 "대서왕"생애를 마감했으며, 군대를 이끌고 호남으로 남하했다. 1646년, 장헌충은 사천성의 서충 봉황산에서 화살을 맞고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