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초근일일(草根一一)
고대의 많은 제왕들은 양자를 거두기 좋아했다. 예를 들어, 이극용(李克用), 주원장(朱元璋)등이 그러했다. 명나라말기 농민정권인 대서정권(大西政權)의 장헌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4명의 양자를 거두었는데, 나중에 이 4명이 운명은 모두 달랐다.
첫째, 진왕(秦王), 의왕(義王) 손가망(孫可望)(?-1660년), 섬서 연장현 사람.
1630년(명 숭정3년), 손가망은 장헌충을 따라 반란에 가담한다. 용맹하고 잘 싸워서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고, 이정국(李定國), 유문수(劉文秀), 애능기(艾能奇)와 함께 장헌충의 양자가 된다. 1646년(순치3년), 청군이 대거 사천으로 쳐들어온다. 장헌충은 봉명산(鳳鳴山)에서 전사하고, 나머지 부대는 손가망과 이정국이 물려받아, 운남, 귀주지구로 진군하여 항청근거지로 삼는다. 준의(遵義), 귀양(貴陽)을 함락시키고, 운남으로 진격한다.
1647년(영력원년, 순치4년), 손가망은 이정국등과 함께 왕을 칭한다. 손가망이 국주(國主)가 되어 연호를 흥조(興朝)라 한다. 그후 대서군의 여러 장수들이 회의를 열어 전략방침을 논의한다. 이정국은 운남으로 서진하여 근거지를 건립하여, 남명과 연합하여 청에 대항하자고 주장한다. 이정국의 건의는 다수 장수들의 찬성을 얻는다. 다만 손가망은 남명과 연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저 이미 얻은 땅만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이정국의 건의에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다. 여러 장수들은 무릎을 꿇고 이정국의 의견을 옹호했다. 손가망은 인심이 이정국에게 기운 것을 보자 할 수 없이 운남으로 진군하여 남명과 연합하여 청과 대항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이정국에 대해 시기심을 품게 된다.
1651년(영력4년, 순치8년) 손가망은 대장 풍쌍례(馮雙禮)등을 보내 보병,기병 수만명, 전상(戰象) 십여마리를 이끌고 귀주에서 호남으로 진격하여 원주(沅州, 지금의 호남 지강)를 공격하게 한다. 풍쌍례는 원주를 점령하고, 청나라장수 정일통(鄭一統), 지부 시궁계(柴宮桂)를 생포한다. 이어서 승리의 기세를 틈타 진주(辰州, 치소는 원릉)를 공격하나, 방어가 엄밀하여 성공하지 못한다. 그후, 이정국이 부대를 이끌고 호남으로 진입하여 풍쌍례와 회합한 후 계속 진격한다. 대서군이 남명과 연합하여 청나라에 대항한 후, 승리를 거두었고, 호남의 대부분 주현을 점령한다.
1652년(영력5년, 순치9년), 이정국은 연이어 수십개의 주현을 수복하며 천하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손가망은 이정국의 전공이 혁혁한 것을 보자 질투심이 일어난다. 1653년(영력7년, 순치10년), 손가망은 군대를 이끌고 원주로 온다. 그리고 즉시 사람을 보내 이정국을 원주로 오도록 부른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이정국을 죽여버리려고 한다. 이정국의 부하는 손가망이 독수를 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사람을 이정국에게 보낸다. 이정국은 그 밀보를 받고 광서로 물러나 계속 북진하기로 결정한다.
1654년(영력8년, 순치11년), 이정국은 신회(新會)에서 청군과 교전을 벌인다. 부대에 전염병이 퍼지고, 청군이 대거 증원온다. 이정국은 손가망에게 지원군을 요청한다. 그러나 손가망은 병사 한명도 보내주지 않고, 이정국이 패전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본다. 이정국이 패퇴할 때, 손가망은 4만여명을 보내어 이정국이 귀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았다.
그후 손가망은 남명조정에 진왕(秦王)에 봉해달라고 청한다. 손가망은 진왕의 작위를 받은 후, 황제로 자처했으며, 영력제에게도 무례했다. 영력제는 비밀조서를 이정국에게 보내어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들통나고, 손가망은 병력을 이끌고 가서 죄를 문책한다. "도보교조(盜寶矯詔), 기군해량(欺君害良)"(보물을 훔치고 조서를 위조하며, 임금을 속이고 좋은 신하를 해치려 했다)는 죄명으로 조정신하 18명을 사사한다. 이것이 바로 "십팔선생지옥(十八先生之獄)"이다. 1656년(영력10년, 순치13년) 정월, 이정국은 영력제를 곤명으로 모셔온다.
손가망은 영력제와 이정국을 핍박하여 떠나보낸 후 10만대군을 이끌고 보경(寶慶, 지금의 호남 소야)으로 진군한다. 청나라의 정원대장군(定遠大將軍) 둔제(屯齊)도 주력을 이끌고 보경으로 북상했다. 쌍방은 교차로에서 만나 결전을 벌인다. 그 결과 손가망의 부대가 패배하고 사상자가 많이 나온다. 청군은 말 7백여필, 코끼리 1마리를 노획하고, 승리한 기세를 몰아 보경을 점령한다.
1657년(영력11년, 순치14년) 팔월, 손가망은 10만대군을 이끌고 운남의 이정국을 공격한다. 이정국은 겨우 3만명을 보유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적군을 깊이 유인하는 계책을 쓴다. 손가망과 이정국은 운남 곡정(曲靖)부근의 교수하(交水河)의 옆에서 대전을 벌인다. 손가망부대의 선봉장인 백문선(白文選)은 내전을 원치 않아, 이정국에 투항한다. 백문선이 이끄는 5천의 철기는 거꾸로 손가망의 부대로 돌진한다. 손가망의 좌군 주장(主將)인 마유흥(馬唯興)도 이정국의 편에 선다. 그리하여 백문선과 함께 손가망이 진영으로 돌진하여 연이어 몇 개의 군영을 격파한다. 많은 사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진왕(이정국)에 귀순하십시오!"를 외친다. 손가망은 이미 군심이 바뀐 것을 알고, 말을 타고 도망친다. 그를 따르는 병사는 겨우 50여기뿐이었다.
손가망은 대패를 당한 후, 청나라에 투항한다. 그리고 청나라의 병사를 가지고 복수하고자 한다. 손가망이 청나라에 투항한 후, 남명군대의 허실을 모두 알려, 이정국과 남명의 서남항청무장은 결국 패전하게 된다. 청나라조정은 그를 의왕에 봉한다. 다만 동시에 그를 경계했다. 1660년(순치17년) 십일월, 사냥을 할 때, 손가망은 화살을 맞고 죽는다. 손가망이 죽은 후, 청나라조정은 그에게 시호를 내린다: "각순(恪順)"
둘째, 진왕(晋王) 이정국(1621-1665) 자는 영우(寧宇). 섬서 유림 사람
이정국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630년(숭정3년), 나이 겨우 10살된 이정국은 장헌충의 농민반란군에 가담한다. 장헌충은 이정국의 용모가 비범한 것을 보고 양자로 거둔다. 1637년(숭정10년), 이정국은 장헌충을 따라 하남과 호북을 공격한다. 1641년(숭정14년) 이월, 이정국은 명군으로 변장하고, 20 경기병을 이끌고 야밤에 기습하여 양양(襄陽)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군자금 십여만을 노획한다. 양양대첩은 장헌충의 반란군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이정국은 군내에서 인자한 것으로 유명했다. 전투때는 용맹하기 그지없어서 사람들은 그를 "만인적(萬人敵)"이라 불렀다.
청군이 입관한 후, 민족갈등이 주요모순이 된다. 1646년(순치3년, 융무2년) 팔월, 장헌충은 대서군 50만을 이끌고 북상하여 청과 싸운다. 이정국은 부대를 거느리고 청군과 전투를 벌였고, 청군의 장수 고랑아(古朗阿), 파양아(把揚阿)를 참한다. 다만, 장헌충은 청군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고, 대서군은 혼란에 빠지며, 사상자가 많이 나온다. 손가망, 이정국, 유문수, 애능기의 4장군은 잔여부대를 수습하여, 급히 남하한다.
1647년(순치4년, 영력원년) 정월, 대서군은 귀주로 진군한다. 귀주서부의 여러 지역은 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투항한다. 그후 대서군은 남명과 연합하여 청나라에 대항하기로 결정하며, 손가망을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4장군이 공동으로 왕을 칭한다. 그후 정북왕 애능기가 전사한다. 팔월, 이정국, 유문수는 사채(沙寨)를 격파하고, 사정주(沙定洲)를 생포하여 운남성의 동부를 완전히 평정한다. 1650년(순치7년, 영력4년), 손가망은 군을 이끌고 귀주로 들어가며, 곧 귀주는 평정된다. 손가망은 자신이 귀주로 가면서, 이정국은 운남을 지키게 남겨둔다. 유문수는 사천남부를 평정한다. 대서군은 다시 운남, 귀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했다.
1649년(순치6년, 영력3년) 청군이 호남을 점령하고, 계림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구식사(瞿式耜)가 피살된다. 영력제는 대서군에 의탁한다. 1651년(순치8년, 영력5년), 영력제는 손가망을 진왕(秦王)에 봉한다. 1652년(순치9년, 영력6년) 봄, 청나라조정은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에게 명하여, 귀주로 진격하게 하고, 오삼계(吳三桂)로 하여금 사천남부로 진격하게 한다. 이정국은 호광(湖廣)으로 출동하여, 청군을 포위소탕하겠다고 청한다. 손가망은 대서군을 둘로 나누어 출격하기로 결정한다. 북로군은 유문수를 주장으로 하여 사천으로 진격하고, 동로군은 이정국을 주장으로 하며, 마진충(馬進忠), 풍쌍례를 부장으로 하여 호남으로 진격하게 한다.
1652년(순치9년, 영력6년) 이정국은 보병,기병 합계 8만과 50두의 전상을 이끌고 출정한다. 원주, 정주, 무강의 여러 주를 연이어 함락시킨다. 그후 직접 보경을 취하고, 청군 5천을 섬멸한다. 육월, 이정국은 출별하여 계림의 공유덕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는 병력을 3로로 나누어, 계림으로 진격한다. 이정국은 3로가 회합한 후 병력을 엄관(嚴關)에 주둔시킨다. 공유덕은 정예병을 이끌고 와서 엄관을 공격한다. 대서군의 전상이 청군으로 돌진하자, 청군의 마필은 놀라서 날뛰고, 공유덕은 대패하여 도망친다. 대서군은 승세를 틈타 밀고 들어간다. 공유덕은 혼자서 계림으로 도망쳐 돌아간다. 대서군은 승세를 잡고 계림까지 추격해서 성을 포위한다. 대서군은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서 공성한다. 공유덕은 이마에 화살을 맞는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고 여겨 불을 질러 자결한다.
계림대첩이후, 광서의 전지역은 금방 수복된다. 팔월, 이정국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호남으로 북상하여, 전주(全州), 영주(永州, 지금의 호남성 영릉)을 취한다. 구월, 이정국은 형주(衡州, 지금의 호남성 형양)을 함락시킨다. 이정국은 다시 마보(馬寶)에게 명하여 광서의 명군을 이끌고 광동서북부를 취하게 한다. 마진충, 풍쌍례에게는 장사(長沙), 상덕(常德), 악주(岳州)를 취하게 한다. 그리고 고문귀(高文貴)에게는 동으로 진격하여 강서(江西)로 가서, 언이어 영신(永新), 안복(安福), 안녕(安寧), 용천(龍泉)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강서서부의 중요도시인 길안(吉安)을 포위공격한다. 이정국은 칠월에 출병한 이후 2개 주, 16개 군을 수복하여, 개략 3천리의 영토를 다시 차지한다. 역사에서 '상계대첩(湘桂大捷)"이라 불리는 승전을 거둔 것이다.
청군이 호광에서 연이어 패번하자, 청나라조정은 깜짝 놀란다. 청나라조정에서는 경근친왕(敬謹親王) 니감(尼堪)으로 하여금 15만 정에병을 이끌고 다시 호남으로 진격하게 한다. 십일월, 니감은 형주에 도착한다. 이정국도 병력을 이끌고 맞이하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정국은 습격전술을 쓰고자 준비한다. 며칠 후, 쌍방이 다시 전투를 개시하는데, 이정국은 거짓으로 패퇴한다. 니감이 죽어라 추격해와서 연무정(演武亭)에 이른다. 그때 대포소리가 나면서 대서군의 복병이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 니감을 포위한다. 이정국은 대도를 들고, 니감을 두동강이낸다. 청군은 주장을 잃자, 대패하여 도망친다. 이정국은 승세를 틈타 주격하고자 했다. 그때 그는 손가망이 그가 전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서, 풍쌍례, 마진충으로 하여금 후퇴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정국은 그제서야 자신은 홀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병력을 거두어 무강으로 옮긴다. 계림, 형주의 두번에 걸친 대첩으로 이정국은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되고, 항청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손가망은 이정국이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질투심이 폭발한다. 1653년(순치10년, 영력7년) 정월, 손가망은 이정국이 나중에 병력을 차지하여 세력이 커지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여겨, 군을 이끌고 원주로 진격한다. 손가망은 이정국에게 원주로 와서 군사를 논의하자고 재촉차며, 이정국을 해칠 계획을 꾸민다. 유문수의 아들이 사람을 시켜 이정국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오지 못하게 한다. 손가망은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수치심이 분노로 변한다.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이정국의 군대를 공격한다. 이정국은 대국을 고려하여, 호남을 떠나 광서 전주로 간다. 이월, 청군은 이미 손가망과 이정국간에 내분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패륵 둔제를 다시 호남으로 보내고, 손가망의 군대와 보경에서 맞부닥친다. 손가망의 군대가 대패하고, 손가망은 급히 패주한다. 청군은 다시 호남의 여러 주와 오주(梧州), 계림을 되찾는다. 좋았던 국면이 손가망때문에 깨져버렸다.
그후 이정국은 양광(兩廣, 광동, 광서)지역을 전전하며, 정성공(鄭成功)과 공동으로 출병하는 것을 상의한다. 다만 손가망이 이정국을 지원해주지 않았고, 군량을 보내주지 않아서, 이정국은 외롭게 혼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신회의 전투에서 이정국은 대패한다. 이정국은 할 수 없이 남녕(南寧)으로 후퇴한다. 그후 손가망은 조정에 진왕에 봉해달라고 청한다. 손가망은 진왕에 봉해진 후, 황제를 자처한다. 영력제에게도 아주 무례했다. 영력제는 밀서를 보내 이정국으로 하여금 보호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들통나서, 손가망은 병력을 이끌고 가서 죄를 묻는다. 18명의 조정대신들이 사사된다. 이것이 바로 '십팔선생지옥'이다. 1656년(영력10년, 순치13년) 정월, 이정국은 영력제를 곤명으로 모셔온다. 영력제는 곤명을 '전도(滇都)'로 개칭하고 이정국을 진왕(晋王)에 봉하고, 유문수는 촉왕(蜀王)에 백문선은 공국공(鞏國公)에 봉한다.
1657년(영력11년, 순치14년) 손가망은 14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정국을 공격한다. 구월, 손가망의 부대가 교수(운남 고익)에 도착한다. 이정국, 유문수는 5만을 이끌고 막았다. 이때 백문선이 이정국에게 투항하고, 쌍방은 교수의 가에서 회전을 벌인다. 백문선이 철기를 이끌고 손가망의 진영으로 돌진하자, 손가망 휘하의 여러 장수들에 모두 손가망을 배신하고 이정국에게 의탁한다. 손가망은 황급히 도망친다. 이정국은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고, 손가망의 각 군영의 장병들은 "진왕(晋王)을 맞이합니다!"고 외쳤다. 손가망은 대패한 것이다. 손가망은 군심을 잃었고, 겨우 수십기의 부하를 이끌고 청군에 투항한다.
손가망이 투항한 후, 청나라조정에 남명군대의 허실을 모조리 알린다. 청군은 대거 운남으로 진격했고, 그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1659년(순치16년, 영력13년) 청군이 곤명에 모인다. 영력제가 버마로 도망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이정국은 정예병 6천을 이끌고 청군을 막는다. 마반산(磨盤山)에서 청군과 교전을 벌인다. 마반산전투에서 2/3의 명군이 전사한다. 청군도 사상자가 절반은 나온다. 1661년(영력15년, 순치18년), 청군의 오삼계부대 10만대군이 버마로 진입한다. 버마왕에게 영력제를 내놓으라고 압박한다. 다음 해, 오삼계는 곤명에서 영력제를 목졸라 죽여버린다. 이렇게 남명이 멸망했다. 이 때 이정국은 여전히 서남변경에서 항거하고 있었다. 이정국은 영력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병석에 눕는다. 1662년(강희원년, 영력16년) 육월, 이정국은 맹랍(勐臘)에서 병사하니, 향년 42세이다.
셋째, 촉왕 유문수(?-1658), 섬서 연안 사람
유문수는 일찌감치 장헌충을 따른다. 대서국이 건립된 후, 무남장군(撫南將軍)이 된다. 융무2년(1646년), 청군이 사천북부로 진격한다. 십일월, 청군은 태양계(太陽溪)에서 대서군과 조우한다. 유문수는 청군의 장수 서특고(西特庫), 대장 오파십(烏巴什)을 베어 죽인다. 그러나, 청군의 화살에 장헌충이 맞아 죽는다. 대서군은 크게 혼란에 빠진다. 청군은 그 기회를 틈타 대서군을 대파한다. 유문수는 손가망등과 잔여부대 수만을 이끌고 중경으로 도망친다. 유문수는 수영을 잘했다. 그는 명군의 선박을 탈취한다. 명군의 총병 증영(曾英)이 병력을 이끌고 공격했지만, 대서군은 명군을 대파한다. 대서군은 포위망을 뚫고 귀주까지 성공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후, 대서군은 남명과 연합하여 청에 대항하는 방침을 정한다.
영력4년(1650년) 구월, 손가망은 유문수에게 사천으로 진격할 것을 명한다. 유문수는 병력을 이끌고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건창(建昌)을 공격한다. 원도(袁韜), 무대정(武大定)을 대파한 후, 두 사람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후 가정(嘉定)을 탈취하고, 부주(涪州)에서 우대해(于大海), 이점춘(李占春)을 격파한다. 영력6년(1652년) 청나라 장수 오삼계가 사천으로 들어와 성도, 중경, 가정, 서주(敍州)를 함락시킨다. 백문선은 귀주로 패퇴한다. 손가망은 유문수로 하여금 보병,기병 5만을 이끌고 노주(瀘州)등지에서 전면적인 반격을 전개하여 사천남부로 진격하도록 명한다. 칠월, 유문수는 서주에서 청나라장수 노광조(盧光祖)를 격패하고, 총병 남일괴(南一魁)를 죽였으며, 다시 중경을 공격하고, 성도를 포위하여, 청나라의 지부 주기창(周基昌)을 죽인다. 오삼계가 병력을 이끌고 맞이한다. 유문수의 군대는 도통 백함정(白含貞), 백광생(白廣生)등을 참한다. 팔월 오삼계를 포위한다. 청군은 죽어라 싸워서 포위망을 뚫고 면주(綿州)로 도망친다. 이 전투에서 청군 만명이 참살되고, 오삼계로 하여금 보녕(保寧)으로 패퇴하게 만들었다. 이때 청나라는 사천에서 겨우 성 한개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십월, 명군은 보녕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문수는 계속 이기다보니 적을 무시하고, 경솔하게 공성전을 벌인다. 그리하여 오삼계에게 헛점을 드러낸다. 얼마 후, 오삼계는 병력을 이끌고 출병하여 일거에 명군의 선봉을 격파하여, 명군은 혼란에 빠지고 대패한다. 청군은 그러나 추격하지는 못하고, 한중(漢中)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한다. 유문수는 부하를 시켜 사천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귀주로 돌아간다. 손가망은 그 틈을 타서 유문수의 직위를 박탈한다. 유문수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영력7년(1653년), 당시 손가망과 이정국의 사이에는 갈등이 비교적 깊었다. 손가망은 그리하여 유문수를 다시 기용하기로 결정한다.
영력9년(1655년) 봄, 유문수는 노명신(盧明臣), 풍쌍례등의 기병, 보명 6만, 전상 40여마리를 이끌고, 동으로 호남, 광서를 공격하는 길에 나선다. 유문수는 상덕으로 진격하면서 수륙합동작전을 펼친다. 노명신으로 하여금 강을 배를 타고 완강으로 진격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육로로 출발했다. 노명신의 부대는 100여척의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유문수가 이끄는 주력부대는 매일 비가 와서, 도로가 진흙탕이었다. 그래서 행군이 순조롭지 못했다. 노명신이 이끄는 수군과 협동하여 작전을 펼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후 노명신의 부대가 상덕성의 아래에 도착하여, 청군의 기습에 당한다. 육로로 오는 명군의 협력을 받지 못해서, 다음 날까지 싸우다가 노명신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수로군은 거의 전멸한다. 유문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상덕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취소하고, 군대를 이끌고 귀주로 되돌아온다. 손가망은 유문수의 직위를 다시 박탈하고, 그를 곤명으로 돌려보낸다.
영력10년(1656년) 삼월, 이정국은 영력제를 호위하여 곤명에 도착한다. 유문수는 촉왕에 봉해진다. 그후 유문수는 사천으로 진군할 준비를 한다. 다만 손가망이 운남으로 쳐들어오려고 하고 있어, 유문수는 부득이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영력11년(1657년) 구월, 손가망이 거병하여 이정국을 공격한다. 유문수와 이정국은 교수에서 손가망과 싸운다.
그후, 유문수는 영력제에게 주청을 올려 운남을 떠나 귀양으로 가자고 한다. 사천, 호남등지의 반청복명세력들을 모으기 편하도록 그렇게 하려는 것이다. 영력제는 그의 말이 맞다고 여겨 귀양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다만 이정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친다. 이정국은 유문수가 손가망에게 배워서, 영력제를 통제하여 한 지방에 할거하려 한다고 여긴 것이다. 영력12년(1658년) 삼월, 이정국은 다시 영력제에게 유문수를 불러들이도록 청한다. 유문수는 불려온 후 군권을 박탈당한다. 영력12년(1658년) 사월, 유문수는 병사한다.
넷째, 정북왕 애능기(?-1647)
애능기는 어려서부터 용맹하기로 유명했다. 장헌충을 따라서 의거에 참가했으며, 양자로 거두어진다. 손가망, 이정국, 유문수와 나란히 "4장군"으로 불렸다. 장헌충이 황제를 칭한 후, 정북왕에 봉해진다. 애능기는 19영의 병마를 지휘했으며 수하병력은 7만에 달했다.
순치3년(1646년), 대서군의 장수 유진충(劉進忠)이 배신하고 청군의 총사령과 하오거(豪格)에 투항한다. 청군은 유진충을 향도로 삼아, 청군을 이끌고 사천북부로 쳐들어온다. 십일월, 하오거는 호군통령 아오바이(鰲拜)등 장수들로 하여금 팔기병사들을 나누어 이끌고 진격하게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대서군을 기습한다. 청군은 태양계를 사이에 두고 대서군과 조우한다. 돌연한 기습에 장헌충은 급히 응전하게 되고, 애능기는 병력을 이끌고 우익으로 지원하며, 정남기 청군을 공격했고, 청군의 참령 격포고(格布庫)를 사살한다. 한창 싸움이 진행중일 때, 장헌충이 화살에 맞아 사망한다. 대서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청군은 그 틈을 타서 승리를 거둔다.
4장군은 잔여부대를 수습하여 중경으로 간다. 명군총병 증영이 부대를 이끌고 막았으나, 유문수가 선봉이 되고, 손가망이 뒤이어 출격하여 이점춘을 격패시킨다. 증영이 큰 배 수십척을 이끌고 손가망을 강 한가운데에서 포위했다. 애능기를 화살을 쏘아 증영을 사살한다. 그리하여 명군은 궤멸한다. 대서군은 다시 한번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한 것이다. 순치4년(1647년) 애능기는 동천(東川, 지금의 운남성 회택)을 공격한다. 그때 현지 토사(土司) 녹만종(祿萬鍾)의 매복에 당해 독화살을 맞고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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