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헌충)

장헌충의 도심술(盜心術)

중은우시 2015. 2. 10. 18:38

글: 호각조(胡覺照)

 

 


사천(四川) 광한(廣漢)의 방호공원(房湖公園)에는 장헌충이 쓴 성유비(聖諭碑)가 하나 있다. 이는 대순(大順)2년(1644년)에 세운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천유만물여인(天有萬物與人) 하늘은 만물을 사람에게 주었다.

인무일물여천(人無一物與天) 사람은 하늘에 한가지도 주지 못했다.

귀신명명(鬼神明明) 귀신이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자사자량(自思自量) 스스로 잘 생각해서 알아서 기어라.


비석의 뒷면에는 원래 염석명(閻錫命)의 성유육언주석(聖諭六言注釋)이 있었다. 아쉬운 점은 주석이 남명의 평구장군, 좌도독 양전이 만인분비기(萬人墳碑記)로 고쳐 새겼다는 것이다.


주석이 없어진 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정문은 의도를 이미 명명백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당시 그의 통치하에 있는 사천민중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희는 하늘에 헤아릴 수 없을 은덕을 입었지만 보답하지 못하고있다. 어떡해야 하는가. 사람이 은혜를 잊고 배신하면 안된다. 하늘은 무형이다.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려면 하늘의 아들 즉 천자에게 보답해라. 내가 바로 천자이다. 너희가 어떻게 해야할지는 스스로 생각해보아라.


이 성유는 아래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간결하고 명료하다. 그것은 길다랗게 무슨 이론을 펼친 것도 아니고, 일부러 꾸며서 우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일부러 신비롭게 경전을 인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통속적이도 알아듣기 쉬운 스무 글자를 써서 자신의 의도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냈다.


둘째, 충분히 이성적이다. 역대통치자들은 비록 수천수만의 글쟁이들을 키웠지만, 최고통치자가 민중을 착취, 노역, 능욕, 도살하는 것을 변호할 때, 논리가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성유비는 다르다. 반박하기 힘든 논리성을 지니고 있다. 보답하기 어려운 은덕을 입었는데, 하늘에 보답할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그저 하늘의 아들에게 그러한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보라. 얼마나 사리에 합당한 말인가. 자고이래로, 최고전제통치자가 백성들을 설복시켜 따르게 하고, 사심없이 헌신하게 하는데, 이 성유비의 내용만큼 이성적인 것은 없었다.


셋째, 보답을 가지고 협박한 것이다. 당시, 거국적으로 미신심리가 있었다. 죽은 후에 십팔층지옥에 떨어질까봐 두려워했고, 자손이 해를 입을까봐 겁을 냈고, 내세에 짐승으로 태어날까봐 겁을 냈다....장헌충은 민중의 이런 미신심리를 이용하여 특별히 지적한 것이다: 너희는 하늘에게 이렇게 많은 은덕을 입었고, 지옥에 있는 귀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장부를 손에 쥐고 있다. 만일 천자에게 사심없이 헌신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것을 따질 것이다. 그때 후회하면 늦는다. 세상에 후회약은 없다. 알아서 해라. 귀신을 가지고 압박하는데 누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헌충이라는 이 무고한 자를 함부로 죽인 악마는 글자도 모르는 무지랭이다. 그러나 민중을 속이는 도심술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성유는 기망의 기량이 뛰어남을 보여준다. 공전절후라고 할 만하다.


사람이 용서해도, 하늘이 용서하지 않는다. 이 공전절후의 마음을 빼앗는 고수는 결국 화살 한 대에 목숨을 잃는다. 대서국은 겨우 2년간 존재했다. 중국역사상 단명왕조의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