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농민반란의 수령들중에서 가장 논쟁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사람으로는 장헌충을 꼽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악마"라고 부르면서 그가 사천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며, 그는 단지 탐관오리와 지주들만 죽였지, 일반 백성은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1980년에 사천사회과학원이 주재하여 소집한 전국 역사학자들이 장헌충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는 했지만, 이 세미나의 전파력이 미약하여서인지, 지금까지도 장헌충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견해가 만연하고 있고, 사람들의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 사천에 사람이 없어져서 호남,호북, 광동,광서에서 사람을 사천에 채웠다는 말)"의 배경에 대하여도 불확실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무고한 자는 황천에서도 억울해 하고 있을 것이고, 뒤집어씌운 자는 지옥에서 몰래 웃고 있으리라.
장헌충은 1606년에 태어났고, 섬서성 연안 사람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포도청의 포쾌(捕快), 변경을 지키는 변병(邊兵)을 지냈다. 숭정3년, 미지현 18채의 가난한 자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켰고, 팔대왕(八大王)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그는 황릉을 불태우고, 봉건통치를 무너뜨리는 피바람속을 계속 달렸고, 이자성(李自成)과 반란군을 나누어 (하나는 동북으로 하나는 서남으로), 명나라를 철저하게 궤멸시키는데 일조했다. 장헌충은 성도에서 2년여간 존속한 농민정권인 대서국(大西國)을 건립한다. 1646년말, 청나라의 철기군이 사천북부의 조천관(朝天關)을 넘어오고, 반도인 유진충(劉進忠)의 배반을 당해, 장헌충은 서충(西充) 봉황산(鳳凰山)에서 한을 품고 일생을 마감한다. 그의 의자(義子)인 이정국(李定國)은 그의 유업을 이어서, 대서군을 이끌고 끝까지 청나라에 항거하며 다시 16년간 혈전을 벌이다가 결국 전장터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장헌충은 중국역사에서 3가지의 "제일"을 창조했다.
첫번째 제일:
장헌충은 중국역대 농민반란중에서 유일하게 명확한 정치강령을 보유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저 "탐관을 죽일 뿐, 순민(順民)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기치하에 가장 피비린내나고 가장 평민적인 농민영웅이 되었다.
"장헌충은 중경을 함락시키자, 서왕(瑞王)은 해를 입었다. 구원(舊院)의 진사기(陳士奇)는 고문끝에 죽었고, 지방호족(紳)들은 모두 죽였다", "의관을 차려입은 자는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성도를 함락시킨 후, 촉왕의 궁궐내의 사람들은 모두 난을 당했다. 순무 용문광과 여러 관리들은 모두 죽였다. 여러 지방호족(紳)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성도로 오게 한 후, 다 죽여버렸다"
장헌충은 백성에 대하여는 아주 잘 돌봐 주었다. 관청이나 지방호족이 빼앗은 땅은 모두 소민(小民)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조세와 부역을 3년간 면제"해주기도 하였다. 장헌충이 60만대군으로 사천으로 쳐들어갈 때, 파죽지세였던 것과, 수개월내에 명나라관부를 무너뜨리고 대서국을 건립한 것들도 이처럼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장헌충의 부친은 원래 지방호족들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그의 형수도 호족인 종씨에게 강간당하였다. 장헌충은 천하의 압제자들을 모두 죽이고자 하였다.
장헌충은 전장터를 20년간 누비면서, 9군데 칼에 찔린 상처를 입고, 여러번을 죽었다 살아났다. 그는 일체의 권력자들, 일체의 부호들에게는 극성이었다. 그는 모든 가난한 자들의 자유를 향한 부유를 향한 깃발이었다.
장헌충이 창조한 두번째 제일:
장헌충은 역대봉건통치자들이 가장 미워하고, 가장 욕하는 사람이었고, 가장 억울한 누명을 많이 썼다.
역대 통치자들이 그와 같의 반란을 일으키고, 양손에 가득 피를 묻힌 '도살자'를 영웅으로 모실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청나라의 '문자옥'은 강희 50년에 유명한 <<남산집>>사건부터 시작하여, 100여년간 지속되었다. 사대부와 백성들은 잔혹한 법령에 겁을 먹고, 감히 장헌충에 관한 진실된 사료를 보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장헌충에 관한 사료들은 모두 봉건통치계급에 의하여 몰수되었고, 고쳐지거나 불태워졌다. 장헌충을 "악마" "역적"으로 보는데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명사. 장헌충전>>이다. 바로 역대 청나라황제의 의도에 따라 <<수구기략(綏寇紀略)>>의 사료에 근거하여 작성했다. 그러나, <<수구기략>>의 작자인 오위업은 당시 성도지현을 역임했다가 장헌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오계선의 집안사람이다. 이로써 <<수구기략>>의 진실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후대인들을 미혹시키고, 역사를 날조하기 위하여, 통치자들은 어용의 문인들을 이용하여 속속 관련자료를 만들어 냈다.
- 명나라의 "전소"독사 양사창의 아들인 양산송이 쓴 <<고아호천록>>
- 명나라 화양현령 심운조(대서군에 피살당함)의 아들인 심순위가 쓴 <<촉난서략>>
- 명나라 관리집안에서 태어나서 대서정권을 전복시키는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는 비밀이 쓴 <<황서>>
- 구양직이 쓴 <<촉란>>
- 팽준사가 쓴 <<촉벽>>
이런 책에서는 장헌충의 죄행을 전무후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죽이기를 좋아하는 것이 천성이다" "1일이라도 피가 흐르는 것을 보지 못하면, 찡그리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산도 도살하고, 들도 도살하여, 1성을 모두 도살하니, 천리에 사람이 밥하는 연기가 오르지 않고, 사막처럼 비어있게 되었다" "모두 남녀 6억이상을 죽였다"....
당시 중국의 총인구가 6천만인데, 6억을 죽였다는 것은 너무나 심한 과장이 아닐 수 없고, 졸렬한 붓놀림이었다.
장헌충이 창조한 세번째 제일:
중국에서 농민반란군 영웅의 전설이 고압적인 봉쇄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널리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것은 장헌충이 처음이다.
장헌충이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사천 재동현(梓潼縣)의 인민들은 칠곡산대묘(七曲山大廟)의 풍동루(風洞樓)에 장헌충의 소상(塑像)을 세운다. 이후 3백여년간 관청에서 부수면, 인민들이 다시 세우고를 반복했고, 해마다 향불이 끊이지 않았다. 1986년 재동현인민정부는 장헌충 서거 340주년을 맞이하여 장헌충가묘를 다시 짓고, 기념석비를 세웠다.
1980년 3월, 사천성사회과학원은 <<사회과학연구>> 편집부가 전국의 관련 사학자, 전문가를 모아서, "사천의 장헌충"이라는 제목으로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장헌충이 사천인들을 도살한 사건에 대한 진상을 논의했고, 그에게 지워진 사실과 다른 누명을 벗겨주고자 했다.
사천에서는 지금까지도, 장헌충과 대서군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를 들면, "열마평(烈馬坪)", "애구(艾狗)", "백마묘(白馬廟)", "살금석(撒金石)", "나과산(羅鍋山)" 등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특히 300년동안 전해져 내려온 "양류가(楊柳街)"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장헌충이 중경을 함락시킬 때, 도중에서 한 젊은 여자가 선량하면서도 대의늠름한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이 여자에게 집에 돌아가면 문앞에 버드나무가지를 꽂아두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집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다. 이 여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이웃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고, 집집마다 버드나무가지를 꽂아두었다. 이리하여 중경시민들은 환란을 비켜갈 수 있었다.
오늘 날, "양류가이야기"를 제재로 삼은 장편역사소설 <<장헌충정단파국>>이 시나닷컴의 "독서", 야후의 "독서", 중국극본망, 중국블로그망등에서 인기리에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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