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헌충)

장헌충(張獻忠)은 사천사람들을 도살하였는가?

중은우시 2006. 10. 31. 19:21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역사기록상의 장헌충은 살인마이다. 그것도, 중국역사상 가장 악독하고 철저한 살인마이다. 그러나, 최근들어서 장헌충이 진짜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것과 같은 살인마인지에 대하여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장헌충

 

명사(明史): 강희, 옹정, 건륭의 삼조중신인 장정옥이 편수한 명사에는 장헌충이 사천과 성도에서 도살한 사건에 대하여 상세히 기재하고 있다.  글에서 장헌충은 1644년 음력 8월 성도를 함락시킨 후 대서정권(大西政權)을 수립하고, 성도를 서경(西京)으로 변경한다. 장헌충은 성격이 교활하고 살인을 좋아하였으며, 하루라도 살인하지 않으면 기본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과거를 통해 관리를 선발한다고 하고는 사천의 선비들을 청양궁에 모아놓고 모두 죽여버린 적이 있다. 사천의 선비들뿐아니라 중원에서는 무수한 시민들도 죽여서 묻었다. 이뿐아니라 장헌충은 자기의 군대와 수하들도 죽여서 그의 군대에서만 98만명을 죽였다. 그는 또한 군대를 사방으로 보내어 도살하게 하였는데 이를 초살(草殺)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무백관이 조회를 할 때 사나운 개를 풀어 개가 무는 자는 데리고 나가 죽였는데 이는 천살(天殺)이라고 하였다. 누가 많이 죽이느냐를 병사들에게 시험하게 하여 무고한 남녀6만을 죽였다. 성도에는 사람이 남지 않아 천리에 밥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고, 성도성은 그저 기왓장만 남았고, 호랑이와 표범이 낮에도 출몰하는 황량한 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성도에 겨우 20호의 인구밖에 남지 않아 호남 광서등에서 사람을 데려와 사천을 채웠다는 것이다.

 

후감록(後鑑錄): 청나라때 모기령이 지은 후감록에서도 장헌축이 위병위 영병중 15세이상인자들을 모두 죽였는데, 위군에서 75만, 영병에서 23만을 죽였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선비, 시민, 승려, 도사, 의사등 30여만을 죽였다고 한다. 그 후에는 집집이 찾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죽였다고 한다. 성도성의 70여리에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죄유록(罪惟錄) : 청나라때의 사계좌가 지은 죄유록에도 장헌충이 2차에 걸쳐 도살하였는데, 1차는 중경을 도살한 것이고, 2차는 성도를 도살한 것이라고 한다.

 

성교입천기(聖敎入川記) : 장헌충에 의하여 "천학국사"로 임명된 서방전도사 두사람이다.(중국명은 이류사와 안문사). 그들은 장헌충이 황제를 칭할 때 추천을 받아 천학국사로 봉해진 후, 장헌충이 청나라군에 살해당할때까지 장헌충의 신변에 있었다. 글에서는 장헌충이 성격이 포악하여 매일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대서의 관리는 900여명이었는데, 장헌충이 죽을 때에는 겨우 25명이 남았다고 한다. 1645년 11월 22일에는 장헌충이 전성의 주민을 죽이리고 결심하고 길목에 군인들을 배치시킨 후 성안에 적이 쳐들어온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도망치는 주민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글에서 장헌충이 승려 이천여명을 다 죽였고, 성도를 떠나기전에 부녀자 40여만명을 죽였다고 한다.

 

황서(荒書) : 명나라 유민인 비밀이 쓴 글에도 장헌충이 성도를 도살한 내용이 나온다. 장헌충이 성도를 점령한 후 매일 사람을 죽였는데, 처음에는 천호 백호를 죽이고, 나중에는 승려, 도사, 장인, 의원등을 죽였다고 한다. 동시에 장헌충은 진사, 거인, 공생등 1만7천여명도 죽였다고 한다. 그도 장헌충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촉벽(蜀碧) : 사실 장헌충의 도살에 관하여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도살후 100년후에 나온 촉벽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장헌충의 도살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팽준사는 건륭2년에 진사가 되었다. 그는 사천사람이며 전해들은 이야기와 대량의 사료를 모아서 촉벽을 썼다. 장헌충이 사람을 죽이는 갖가지 행태가 묘사되어 있는데, 어린아이를 공중에 던져서 땅에 떨어지며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든지, 한번은 전족한 여자들의 발을 잘라서 산처럼 쌓아두었는데, 애첩을 데리고 나가서 구경하다가 꼭대기에 예쁜 발로 장식해야하겠다는 생각에서 애첩의 전족한 발을 잘라서 놓았다든지...그는 어떤 지방을 가든지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손발과 머리는 각각 따로 모아서 묻었는데, 장부에 기재해서 숫자를 틀리지 않게 하고, 비석을 세워서 살인을 기록했다든지...하루는 자기의 처와 자식을 모두 죽였다든지...한번은 과거에서 장원한 사람을 매우 존경하여 그의 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기 위한 호기심에서 그 장원을 죽여버렸다든지...팽준서는 자기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장헌충의 살인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그렸다.

 

이외에 민간의 전설에서도 장헌충의 도살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칠살비(七殺碑)에 관한 이야기이다. 즉, 장헌충을 사람을 죽이고 칠살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천생만물여인(天生萬物與人), 인무일물여천(人無一物與天), 살(殺), 살, 살, 살, 살, 살, 살"(하늘은 사람에게 만물은 주는데, 사람은 하늘에 하나도 주는 것이 없다. 죽여라. 죽여라..."

 

노신 선생의 말씀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노신은 장헌충의 살인에 대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는 "살인을 위한 살인"을 했다고 적었다.

 

해외학자들도 대체로 이러한 견해에 동조한다. 예를 들어 제임스 B 파슨스의 1957년 저작 <<중국농민반란의 제1차 정점: 사천의 장헌충. 1644-1646>>에서 장헌충의 공포정치를 묘사했고, 이후 케임브리지의 중국사에서도 이런 제임스의 견해를 따랐다.

 

역사기록에 대한 의문

 

이러한 기록에 대하여는 최근들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첫째, 명사이건 촉벽이건 모두 청나라 사람들 그 중에서도 고위관료들이 지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관방 즉 청나라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적은 글에는 어느 정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유명한 예인 "칠살비"에 대하여도 최근에 광한의 한 공공묘지에서 장헌충의 성유비가 출토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생만물여인, 인무일물여천, 귀신명명(鬼神明明), 자사자량(自思自量)"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늘은 사람에게 많은 물건을 주었으나, 사람은 하늘에 아무런 것도 주지 못하였다. 귀신이 밝게 보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헤아리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것인지를 계속 반성하고 실행하라는 의미이지 살인과는 무관하다. 아마도, 후세인들이 장헌충의 성유비의 앞부분에 일곱개의 죽일 살 자를 붙여서 견강부회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청나라 군대가 사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도 여러가지 모순점이 발견된다. 1646년에 장헌충은 서충현 봉황산 다보사의 앞에 있는 태양하변에서 청나라 군대의 습격을 받아 화살을 맞고 죽는다. 그리고 사천이 평정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장헌충이 죽은 1659년에야 비로소 청나라 군대는 중경을 함락시키고 사천을 손에 얻는다. 결국 이 13년의 기간동안 장헌충의 잔여부대는 사천인민과 함께 청나라군대에 완강하게 저항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완강하게 저항하는 장헌충의 잔여부대와 사천인민에 대하여 청나라군대가 철저하게 진압하였을 것은 불을 보듯 훤하고, 도살의 방법으로 진압하였을 것이다. 가정삼도, 양주십일의 예에서 보듯이. 1649년에 청나라 군대에서 붙인 고시에서도 "양민과 백성이 섞여 있어 옥석을 구분하기 힘들다 그래서 성의 사람을 모두 죽이거나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살려두었다"고 하였다. 사천성의 도살에는 청나라군대도 상당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청나라 군대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만일, 장헌충이 무자비하게 도살하였다면, 청나라군대가 사천에 들어왔을 때, 그 곳 주민들은 당연히 청나라군대를 환영하고 장헌충을 물리쳐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장헌충의 잔여부대와 13년간 청나라군대에 맞서 싸운 것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백성을 죽일 이유는 청나라 군대에 더 많지, 장헌충에 있지는 않다.

 

셋째, 장헌충의 주관적인 의도를 보더라도, 장헌충이 아주 과장되게 살인하였다는 점은 납득하기 힘들다. 장헌충의 거사초기에 마구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어떻게 군대를 모아 명나라에 반기를 들 수 있었겠는가. 만일 군기가 엄하지 않았다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장기간 중앙정부에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헌충이 사천데 들어온 것은 사천을 근거지로 삼고자 함인데, 그리하여 서북과 강남을 얻고자 함이었고, 제갈량의 융중대를 다시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자기의 국가를 건설하였으면 당연히 사천을 잘 경영해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을 거의 전멸시킬 정도로 살인하였다면 도대체 무엇을 경영하고 어디를 근거지로 삼는다는 말인가. 사실은 이렇다. 장헌충은 사천을 얻은 후 결사적으로 사천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3년간은 백성들로부터 전량을 거두지 않겠다고 공포하였던 것이다.

 

그가 한편으로 나라를 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백성에 대하여 도살을 진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백성을 다 죽인다면 어디서 세금은 거두고, 자기의 군대는 뭘 먹고 살 것인가? 그리고 병사는 어디서 뽑아올 것인가. 그리고 당시는 이미 청나라 군대가 밀려오는 상황이었는데, 나가서 청나라군대와 싸우지는 않고 그저 성도에 앉아서 사람만 죽이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장헌충은 11월에 청나라군대와 싸우는 중에 살해당한다. 그는 본인까지 전장터로 나가서 친히 싸웠는데, 이를 보면 그는 청나라군대를 대적하는데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서양선교사의 기록에서도 여러가지 모순된 점이 나타난다. 그들의 기록에서 장헌충이 죽은 때를 1681년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이 때는 장헌충이 죽은지 이미 35년이 지난 후이다. 그리고, 그는 장헌충이 죽을 때 관리가 25명이 남았다고 하였는데, 촉난기략이라는 책에는 장헌충을 따르던자가 여전이 130만명이라고 되어 있고,속편수구기략에서는 5,60만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를 따르는 병사가 적게 잡아서 50만이었는데, 겨우 25명의 관리가 1인당 2만명씩을 거느렸다는 말인가?

 

장헌충이 사천에서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청나라때의 기재에 남긴 것처럼 그러한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