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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부두방주(斧頭幇主) 왕아초(王亞樵) : 민국시대 중국제일킬러

by 중은우시 2007. 6. 14.

 

 

풍운변환의 시대, 난세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이 사람은 안휘성 출신으로 100개의 도끼(斧頭)를 들고 상해탄을 암흑천지로 만들었다. 이 신비인물은 행적이 표홀했고, 신출귀몰하였으며, 하는 일마다 비범했다. 봉건잔재들도 그가 죽이고, 당정요인들도 그가 죽이고, 일본침략자들도 그가 죽였으며, 탐관오리도 그가 죽였고, 매국노와 간첩들도 그가 죽였다. 그의 살인행각은 멈춘 적이 없었다. 합비에서 상해까지, 다시 상해에서 남경까지, 남경에서 무한, 복주, 홍콩, 남녕....한마디로 말하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땅위를 걸어다니는 것, 위로는 고관대작부터 아래로는 시정잡배까지 그가 죽일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중화민국시대의 암살사건:

- 직계군벌이 파견한 상해경찰청장 서국량이 상해의 욕실에서 피살되었다.

- 국민당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장개석이 여산의 산길에서 총격을 받았으나, 장개석의 명이 길어 살아남았다.

- 일본 주중공사인 중광규(重光葵)의 한 다리가 사라졌고, 그는 그 이후부터 외다리가 되었다.

- 재정부 부장인 송자문이 상해의 호서역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 일본해군 제3함대의 기함인 "이즈미"호가 포동에서 폭파되었다.

- 매국노 왕정위가 국민당 육중전회에서 총 세발을 맞아서 치명상을 입었다.

- 장학량이 사직하고 상해로 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편지와 함께 온 폭탄이었다.

 

그는 바로 일본인들이 "인간마귀"라고 부르던 부두방 방주 왕아초였다.

 

심취선생은 일찌기 유머스럽게 말한 바 있다: "세상 사람들은 마귀를 무서워하는데, 마귀는 왕아초를 무서워한다" 장개석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틀니까지 떨었다. 대립도 그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으면 첫번째 반응은 창문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왕정위의 늑파골은 왕아초에 의하여 잘렸고, 상해탄의 악당인 황금영, 두월생도 길거리에서 그를 만나면 길을 돌아갔다.

 

삼십년대 상해에서 지하공작으로 하고 왕아초의 주요한 부하중 하나였으며, 건국후 국무원 어느 부서의 책임자를 지낸 화극(華克)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왕아초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읽어본 적이 없다. 그는 신과 국가도 믿지 않았다. 그는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노동자들을 동정했으며, 일체의 권위를 부정했다. 사람을 어려움에서 구하기 위하여라면, 재산을 아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를 치켜세워주면, 그는 칼을 뽑아서 그를 도와주었고, 뒷탈은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는 사나이였다."

 

이 사람은 아주 전설적인 색채를 띄고 있으며, 일찌감치 동맹회에 가입한다. 국민당의 정객이며 안휘건설청장인 장추백과 업무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왕아초는 장추백의 사람됨을 아주 멸시했다. 일찌기 장추백에게 그로부터 1리정도의 거리를 항상 두라고 경고한 바 있다. 만일 얼굴을 마주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였다. 하루는 장추백이 외출하는데 마침 왕아초가 오는 것을 보았다. 숨기가 마땅치 않아 그냥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걸어갔으며, 웃음띈 얼굴로 왕아초에게 인사를 건냈다. 왕아초는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 나쁜 놈. 감히 나와 같은 길을 걷다니.." 그러면서 지팡이를 들어 그를 때리려 달려왔다. 장추백은 말한마디 못하고 쥐새끼처럼 머리를 박고 도망쳐야 했다.

 

1925년이후, 왕아초는 노영상을 따라 직환대전에 참전한 후 패배하고 상해로 와서 국민당에 가입한다. 한번은 일부 당원이 하비로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왕아초는 상해경비사령관 양호와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이 발생했다. 왕아초는 키가 작았으므로 의자 위에 올라간 후 양호에게 뺨 두 대를 갈긴다. 이 천만의 병력을 가진 사령관은 왕아초를 다루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감히 반격하지 못하고, 아주 군색하게 되었다.

 

왕아초의 칼과 총은 거의 중국대륙의 모든 구석구석에 미쳤다. 이로 인하여, 일본, 친일정권, 특무기관, 방파세력든 여러 세력들이 그의 목을 노렸다. 장개석은 왕아초의 머리에 백만원을 걸었다. 왕정위정권은 특무를 파견하여 층층이 방비했고, 왕아초를 죽이고자 하였다. 일본첩보기관도 왕아초를 추격했고, 함정을 파서 왕아초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대립(이전에는 왕아초의 결의형제였고, 왕아초가 그를 추천해서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은 왕아초가 지모가 뛰어나고 용맹하면서도 감정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는 강공으로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음험하고 비열한 수단으로 그를 죽이고자 한다.

 

1935년 3월, 대립은 친히 20여명의 특무를 데리고 홍콩으로 가서 왕아초를 추살하고자 한다. 왕아초는 20여명의 핵심부하를 데리고 광서 오주로 몰래 도망친다.

 

대립의 추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의 마조(魔爪)는 부하들을 향한다. 납치의 방식으로 왕의 부하인 여립규(余立奎)를 홍콩에서 붙잡아 남경으로 데려가서 감옥에 가둬둔다. 9월, 여립규의 첩인 여완균은 돌연 홍콩에서 오주로 간다. 거기서 왕아초에게 그녀가 홍콩에서 생활하기 힘드니 오주로 오겠다고 말한다. 여립규는 왕아초를 오래 따른 부하였다. 송호항전때 19로보충단의 단장을 맡기도 했다. 왕아초는 자기를 오래 따르던 여립규가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여완군의 요청을 을악하고 그녀를 오주로 이사오게 한다. 여완군이 갑자기 나타나자 많은 사람들은 의심을 가졌다. 그들은 모두 왕아초에게 그녀를 조심하라고 말했다. 왕아초는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여완군이 여립규의 집안사람이면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안그런다면 친구를 볼 면목이 없다고 했다. 왕아초가 어찌 알았겠는가. 이때 여완군은 이미 대립에게 매수되어 있었다.

 

원래, 여립규가 체포된 후, 여완군과 아이는 홍콩에 거주하고 있었고, 생활비는 왕아초가 제공했다. 그래서 여완군은 왕아초가 오주에 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대립은 수하 특무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듣고 10만원을 주어 여완군을 매수했다. 특무들은 왕아초를 잡으면 여립규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여완군은 큰돈에 마음이 움직여 왕아초를 팔아먹게 된 것이다. 대립의 명을 받고 오주로 가서 왕아초를 찾은 후, 그녀는 암중으로 특무들에게 왕아초의 행적을 보고한다.

 

9월 20일, 여완군은 거짓말로 일이 있다고 말하고, 왕아초를 그녀의 집으로 부른다. 왕아초는 함정인줄 모르고, 그녀의 집으로 간다. 이때, 대립의 수하 10여명의 특무는 여완군의 집에 매복하고 있었다. 왕아초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특무들은 그의 얼굴에 석회를 뿌렸다. 왕아초는 석회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도 특무들과 완강하게 싸웠다. 10여명의 특무들이 한꺼번에 덥쳐왔고, 왕아초에게 총을 쏘고 칼로 난자했다. 왕아초는 총알을 5발 맞고, 칼에 3곳을 찔려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특무들은 왕아초를 죽인 후, 다시 잔인하게 왕아초의 얼굴가죽을 벗겨서 대립에게 바친다. 철수하면서 특무들은 여완군까지 죽여서 살인멸구한다.

 

왕아초는 병사하나 거느리지 않고, 그저 부두방의 형제들을 데리고, 백만군대를 이끌고 최고통치자의 지위에 있던 장개석과 14년간이나 싸워왔고, 놀라운 간담과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장개석은 왕아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도 된다. 깡패, 킬러, 악마, 그리고 지사라고 할 수도 있고, 극단적인 수단을 썼던 애국자라고 할 수도 있다.

 

섬북의 요동에 있던 한 위대한 인물(모택동)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왕아초는 적을 죽였으므로 죄는 없고, 항일에 공이 있다. 자잘한 일처리에는 잘못한 점이 있지만, 대사는 그르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