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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주덕(朱德)과 네 명의 부인

by 중은우시 2007. 6. 4.

1. 소국방(蕭菊芳)

 

1912년 가을, 주덕은 곤명사범학원 학생인 소국방과 결혼한다.

 

당시, 주덕은 운남육군강무당의 젊은 교관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이 젊은 장교의 결혼에 관심을 나타냈다. 친구의 주선하에, 주덕은 소국방의 집에서 소국방과 만나게 된다. 소국방은 이 젊은 장교에게 관심을 나타내고, 주덕을 만났을 때, 주덕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거동이었다.

 

이번 만남에서 주덕은 소국방이 성실하면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아가씨라고 생각한다. 주덕은 또한 소국방이 전족하지 않았다는 것도 발견한다. 이러한 대담하고 진보적인 행위는 주덕의 호감을 불러온다.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결혼한다.

 

결혼후 상당기간동안 주덕은 여전히 운남육군강무당에서 하루종일 군사훈련을 시키고, 소국방은 여전히 사범학원에서 공부하며,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주덕과 소국방은 겨우 일요일에만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주덕의 지위로는 곤명에 별장을 구해서 살 수도 있었지만, 주덕과 소국방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러해 이후, 주덕은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이 결혼은 부르조아의 그것이 아니었다"

 

1916년초, 주덕은 원세개를 토벌하는 호국군 제1군을 따라 북정에 나서고, 고향 사천으로 떠난다. 이때 소국방은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아마도 남편을 그리워해서인지, 남편의 고향을 그리워해서인지, 주덕이 출정한 후, 소국방은 자동차를 타고 노주로 가서, 노주에 작은 집을 하나 빌려 주덕과 함께 생활한다.

 

9월말, 소국방은 남자 아이를 낳는다. 이름은 보주(保柱)라고 짓는다. 보주는 이 가정에 적지 않은 밝은 분위기를 선사했다. 수국방은 보주를 키우느라 밤낮없이 일하다가 돌연 병에 든다. 보주가 출생한 후 수개월만에 소국방은 열병을 앓아 세상을 떠난다.

 

2. 진옥진(陳玉珍)

 

소국방이 병사한 후, 많은 사람들은 주덕에게 재혼을 권한다. 주덕은 모친이 없는 아들을 생각해서 결혼하겠다고 한다. 이번 혼인은 주덕의 군대내 친구가 소개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여자의 이름은 진옥진으로 교육을 받은 아가씨이고, 역시 전족이 아니었다. 1911년의 신해혁명과 1916년의 혁명활동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진옥진은 반드시 결혼전에 자신이 만나서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한다.

 

주덕은 이 도전에 응했고,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호감을 느낀다.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결혼했다.

 

진옥진은 집안일을 잘했다. 결혼후 그녀는 집안을 검박하면서도 깨끗하게 유지했다. 그녀는 주덕이 꽃을 기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집안의 안팤으로 꽃을 심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화원도 가꾸었다. 그녀는 보주를 사랑했고, 자기의 친아들처럼 키웠다.

 

두번째 결혼에서 주덕은 행복한 가정을 얻을 수 있었다. 주덕에게 있어서 가정은 피난처였고, 세상과 격리된 작은 천당이었다. 당시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자주 주덕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중국사회를 연구하고, 민주, 과학, 민족과 민족평등등의 문제를 논의했다. 진옥진은 별도의 서재를 마련해 주었고, 러시아 10월혁명에 관련된 서적과 민족평등선은과 같은 유형의 책들을 모았다. 그리고 <<신청년>>과 <<신조>>와 같은 잡지를 구독했다.

 

두 사람의 흥미와 취미가 비슷해서, 진옥진은 정성껏 주덕을 위하여 <<시경>> <<수호>> <<홍루몽>> <<삼국연의>> <<서유기>> <<당시삼백수>> <<손자>>등의 많은 서적을 구했고, 두 개의 예쁜 서가도 샀다. 그녀는 서재를 깨끗하게 정리했으며, 이 서재는 주덕이 아주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1922년 여름, 주덕은 상해로 가서 혁명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한다. 떠나기 전에, 주덕은 천동군벌 양삼의 전보를 받고, 양삼은 주덕을 요청하여 중경에서 만난다. 주덕은 처자와 이별하였고, 진옥진의 고향인 남계를 떠난다. 이후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3. 오약란(伍若蘭)

 

주덕은 일생돈안 난초를 매우 좋아했다. 이것은 주덕의 세번째 처인 오약란과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1928년 2월 15일, 주덕은 공농혁명군 제1사단을 이끌고 뢰양(陽)성을 함락시켰다. 주덕이 시내로 들어가는데, 돌연 거리에서 한 젊은 여성이 뛰어가면서 소리쳤다: "고향사람들이여. 공산당이 이끄는 공농혁명군 제1사단이 장가매의 상비대를 이겼고, 뢰양성을 해방시켰습니다. 전투의 승리를 환영하기 위하여, 모두 도시 가운데 괒앙에서 군민대회에 참가합시다"

 

주덕은 이 여인이 대담하면서도 활발한 것을 보고 등종해에게 물었다: "누구냐" 등종해는 "그녀는 오약란입니다. 현성의 남구안당에서 오씨성의 지식인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양여자제삼사범학교를 다녔으며, 전해에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우리 현에서는 유명한 여걸입니다"

 

주덕이 자세히 보니 이 아가씨는 키가 크고 전족을 하지 않았으며 체격이 건장했다. "머리는 뒤로 묶었으며, 검은 피부에 약간의 얽은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젊음의 활력이 넘쳤다.

 

대회가 끝난 후, 주덕은 등종해에게 오약란을 데려오라고 시킨다. 등종해는 연설대위에서 오약란을 찾았다: "난누이. 주사단장이 너를 부른다." 오약란은 이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하며 얼른 주덕에게 달려갔다. 주덕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두 손으로 오약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너 말을 정말 잘하는구나. 말을 정말 잘해."

 

오약란은 살짝 웃으면서, "말을 잘하지는 못합니다. 주사단장께서 과찬입니다"

 

그날로 오약란은 부녀연합회를 조직하고, 여자들을 이끌고 부대에 쌀, 야채, 등 먹을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주덕은 군수처로 하여금 돈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떠날 때 주덕은 그녀를 아주 열정적으로 환송한다. 이때, 오약란은 군인들이 대부분 맨발인 것을 보고는 부녀연합회의 부녀들로 하여금 "짚신만들기대회"를 개최한다. 밤에 오약란과 부녀들이 짚신을 만들었고, 특히 주덕에게는 좋은 짚신을 하나 만들고, 양말도 짠다. 그리고는 잘 포장해서 숨겨둔다.

 

부녀들이 이틀동안 1000개의 짚신을 짰다 나중에 이것을 매고 군영을 찾아온다. 오약란은 따로 만든 짚신과 양말을 주덕에게 건네준다.

 

등종해가 중간에 나서서 두 사람의 밀회를 주선한다. 오약란은 등종해가 알려준대로 성남쪽의 남하제로 가고, 과연 거기에는 주덕이 나와 있었다. 주덕은 두번 결혼한 바 있음을 얘기하고 그의 가정과 혼인의 경과를 모두 설명해준다. 오약란은 "나는 당신의 과거에 개의치 않습니다. 지금 나를 성심성의껏 사랑하면 그것으로 됩니다.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영원히 변치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삼일 후 주덕과 오약란은 공통혁명군 제1사단사령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4월 28일 주덕은 부대를 이끌고 모택동의 추수기의부대와 강서에서 만난다. 두 부대가 합친 후, 공농홍군제4군을 형성한다. 주덕이 군장을 맡고, 모택동이 당대표를 맡는다. 이 기간동안 오약란은 주덕을 떠나지 않는다. 업무를 도와주는 외에 그의 일상생활이 불편없도록 도와준다.

 

당시 정강산은 사방이 적으로 포위되어 있었고, 교통이 막혀 있었으며, 통신이 어려웠고, 소식도 잘 전해지지 않았다. 산바깥의 소식을 듣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주덕은 처에게 두 가지 임무를 준다. 하나는 정강산내의 상세한 상황을 조사하고, 홍군가곡, 단시, 가요 및 전투개황등을 수집하도록 한다. 다른 하나는 적군점령구역의 신문을 수집해오라고 한다.

 

오약란은 이 임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산지역을 다니면서 선전자료를 수집한다. 주덕에게 상황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녀는 사람을 변장시켜 적의 점령지역에 보내 신문을 가져오게 한다. 밤에 그녀는 등을 켜고 신문을 정리하거나 글을 정리해서 주덕에게 주었다.

 

1929년 1월, 제3차토벌을 방어하기 위하여, 주덕과 모택동은 홍군을 정강산 바깥으로 옮긴다. 행군도중 주덕의 부대는 유사의의 부대에 포위당한다. 상황이 위급하자, 오약란은 주덕을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다가 체포되고 만다.

 

장개석은 오약란의 머리를 자르도록 지시한다. 그날로 오약란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국민당에서는 그녀의 머리를 잘라 장사로 보내어 군중들에게 보여준다.

 

4. 강극청(康克淸)

 

오약란이 희생된 후, 1929년말, 주덕과 강극청이 결혼한다.

 

주덕과 강극청은 정강산에 있을 때 알게 되었다. 결혼하던 해에 주덕은 43세이고, 홍사군의 군장이었다. 강극청은 보통의 부대원이었다. 아침저녁으로같이 있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게 된 것이다.

 

강극청은 어려서부터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생활이 힘들고 노동이 힘들어 그녀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정강산에 올라올 때도 그녀는 글을 몰랐다. 홍군에 참가한 이후에 강극청은 선전업무를 맡았는데, 자기의 정치소양을 높이고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강극청은 대담하게 주덕에게 와서 글을 배워갔다. 주덕은 항상 열심히 강극청이 글을 배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주덕의 도움에 강극청의 수준은 날로 향상되었다.

 

하루는 강극청이 솔직하게 자신의 혼인관을 얘기한다. 그녀는 자기의 전우들에게 "나는 여러분들에게 선포한다. 나의 혼인관은 프롤레타리아혼인관이다. 혁명을 견결히 하고, 품행이 고상하고 당에 대한 공헌이 크고, 뜻이 맞는다면 나이를 따지지 않고, 권세를 따지지 않겠다."

 

주덕은 강극청의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에서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강극청의 손을 잡고, "극청, 나는 지금 너와 같이 순결하고, 진심이며, 굳강한 아가씨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결혼하자. 괜찮겠는가?"라고 한다.

 

강극청은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고, "전투에서 승리하면 결혼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후 주덕은 부대를 이끌고 나가서 1929년 3월, 모택동의 홍사군과 강서복건의 경계지점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3월 14일, 장정의 전투에서 적군 2000명을 사살하고, 장정현을 점령한다. 오래지 않아 주덕과 강극청은 결혼한다.

 

이들은 평생을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