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용모는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내려앉은 코, 닭가슴, 기관지염환자, 연골병환자"라는 견해를 내놓은 사람이 있다. 어떻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의 모습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용모는 어떠했을까?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위료(尉繚)는 이렇게 말한다. "진시황의 사람됨은 봉준(峰準), 장목(長目), 지오응(摯烏膺), 지(摯), 시성(豺聲)." 근대중국의 대학자 곽말약은 이를 근거로 하여 분석한 후 진시황은 생리적인 결함이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즉, 봉준은 마안비(馬鞍鼻, 말안장과 같은 코, 즉 가운데가 내려앉은 코)이며, 지오응은 현대의학상의 계흉(鷄胸, 닭가슴)이고, 시성(豺聲, 승냥이 소리)이라는 것은 그가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가슴변이와 기관지염을 계속 앓았다는 점은 그가 연골병환자라는 것도 보여준다. 영화 <<형가자진>>에서 이설근이 분장한 진시황은 관중들에게 모습이 왜소하고 신체가 병약한 형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중들은 그 모습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학계에서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진시황의 모습이 매우 영준하고 키고 컸을 것이며, 용모가 당당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백찬(翦伯贊) 선생의 추단에 의하면, 진시황의 용모는 당연히 뛰어났을 것이라고 본다. 청화대학 공예미술학원의 두선생도 진시황이 태어난 지방은 서북지방이므로 서북사나이의 용모를 지니고 있을 것이며, 키가 크고, 용모가 당당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도대체 용모가 당당했을까? 아니면 모습이 왜소하였을까? 청화대학 미술학원의 두대개 교수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진시황상은 현대인들이 염입본(閻立本)의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를 보고 추단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염입본의 <<역대제왕도는>>는 서한시대로부터 수나라때까지 13명의 황제의 화상을 그린 것인데, 개국황제도 있고, 망국황제도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진시황의 화상은 담고 있지를 않다. 그 이유에 대하여 두대개 교수는 이렇게 추정한다. 서한시대부터 유가를 국가의 국시로 확립하면서 분서갱유를 진행하고 유가사상을 극단적으로 반대했던 진시황에 대하여는 역대 왕조들이 부정적인 평가하였다. 그리고 각 왕조는 모두 유가사상을 정통으로 인식하였으므로 진시황의 화상을 역대제왕도에서 빼버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세인들이 그린 진시황의 화상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청화대학 미술학원 박송년 교수에 의하면, <<역대제왕도>>의 개국황제들은 모두 위무가 뛰어나고 의표가 당당하며, 기도가 남다른 것으로 그려져 있어서, 후세인들도 이 전형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진무제 사마염의 화상을 기초로 하여 진시황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곧은 허리로 똑바로 서 있고, 입술을 꽉 다물고 있으며, 두 둔은 형형한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역대 개국제왕의 용모는 모두 네모난 얼굴, 높은 코, 길다란 귀든 한눈에도 제왕의 얼굴을 하고 있도록 그렸다. 물론 화상은 예술적인 진실이고, 그 사람의 진실한 면목은 아닐 것이다. 특히 제왕화상은 개인적인 상상력과 예술성이 결합된 것이고, 또한 각 시대별로 그 황제에 대한 평가가 높은지 낮은지에 따라서도 달라졌다.
북경사범대학 역사학과의 조복림교수는 "위인이라고 하여 다 인물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진시황의 용모에 대하여는 기재가 얼마 없는데, 이것은 오히려 후세인들로 하여금 그의 용모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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