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은 천룡팔부와 녹정기를 직접 쓰지 않았다?

중은우시 2007. 6. 25. 13:54

작자: 미상

 

만일, <<천룡팔부(天龍八部)>>, <<녹정기(鹿鼎記)>>등의 작품을 진정 김용(金庸)이 쓴 것이라면, 김용이 각도를 바꾸어 사회생활분야의 글을 썼어도, 분명히 노벨상을 받은 첫번째 중국인이 될 가능성이 십중팔구는 되었을 것이다. 펄벅은 중국사회를 모티브로 하여 <<대지>>를 써서 노벨상을 받았는데, 작품의 전체적인 배치나, 의도나 사상의 깊이 및 문화에 대한 이해등의 측면에서 모두 <<천룡팔부>>등에는 훨씬 못미친다. 중국과 비교적 가까운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나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보더라도 그들의 내공은 여추우(余秋雨)같은 류와 맞싸우게 한다면 적절하지만, <<천룡팔부>>, <<녹정기>>의 작가와 대적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갈수록 이 작품의 진정한 작가가 김용이 아니라는 의심이 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용의 첫번째 작품은 1955년의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며, 공인된 좋은 작품이다. 1961년에 이르러 <<원앙도(鴛鴦刀)>>,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김용 작품중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들이고, 완전히 삼류작가의 수준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한 전문작가가 계속 훈련을 해나가는데, 기술수준이 제고되지 않고, 오히려 크게 하락한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주의할 점은 1961년에 김용은 또다른 아주 재미있는 작품인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를 썼다는 점이다. 동시에 나타난 작품수준이 현격하게 차이나는 것은 이미 불가사의를 넘어서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둘째, 1963년-1964년에 김용은 가장 뛰어난 작품인 <<천룡팔부(天龍八部)>>를 썼다. 그런데, 이 기간동안 유럽여행을 다녀왔는데, 이 기간동안에도 <<천룡팔부>>는 <<명보(明報, 김용이 창간한 신문)>>에 중단없이 계속 연재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김용의 실수인 것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대리작가에게 잠시 쉬라고 얘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을 때, 김용의 해석은 이러했다: "친구인 예광(倪匡)에게 일부분을 대리해서 써달라고 부탁했다" 예광은 무협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김용이 비록 일부분을 대리해서 썼다는 것은 인정했는데, 그렇다면, 전체작품이 대리작가의 솜씨라는 것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하나의 작품만이 아니라 전체 작품이 모두 대리작가의 솜씨라는 것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시 김용은 <<명보>>의 오너였는데, 몇몇의 대리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필명으로 소설을 쓰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김용은 소설쓰기를 멈춘 후에 글쓰기를 멈추었는가? 아니다. 그는 사론(社論)도 쓰고, 강연원고도 썼다. 흥미가 있으면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필자가 여기서 후배된 입장으로 객관적으로 김용이 1994년 북경대에서 중국역사관에 대하여 얘기한 것을 보면, 전체 강연의 품격은 약간 잘 난척하고, 겸양하는 와중에 자랑하는 것이 들어 있다. 약간은 나중의 양진녕과 같은 모습이다. 종합하면 대가의 풍모는 결핍되어 있다. 강연내용을 보더라도 민족융합의 표면적인 현상만을 다루고 있을 뿐, 깊이가 없으며, 중학교 역사선생수준의 강의안이었다. 이것은 절대 <<천룡팔부>>를 쓴 작가가 할 말이 아닌 것이다.

 

넷째, 김용은 최근들어 그의 초기작품들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시시때때로 수정을 가하고 있다. 문학사상 자신의 경전적인 작품에 대하여 계속 수정하는 작가도 드물지만, 한번 수정할 때마다 화사첨족의 엉망인 효과를 내는 작가는 김용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이것은 아주 드물 뿐아니라 아주 괴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개정하는 사고를 따라가보면, 개정하는 사람은 전혀 작품에서 나타난 깊은 인생의 철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저 세속적이고, 조악하며, 표면화된 각도에서 소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녹정기>>의 수정은 밀로의 비너스의 잘린 팔에 의수를 붙여주려는 것같다. 이런 것은 천박할 뿐아니라 가소롭기까지 한데, 바로 이 대가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다. 합리적인 해석은 바로 원래의 작가는 수정한 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섯째, 누가 대리작가인가? 김용의 첫번째 작품인 <<서검은구록>>은 1955년에 나왔다. 당시 그의 신분은 <<신만보(新晩報)>>의 "편집"이었다. <<신만보>>는 원래 양우생(梁羽生)의 무협을 연재해 왔다. 이 작품의 앞부분은 분명히 주로 김용이 완성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주로' 그가 썼다고 하고, '독립적'으로 썼다고 하지 않는가? 당시 <<신만보>>의 총편집인은 분명히 그렇게 대담하게 이렇게 중요한 업무를 이전에 소설이라고는 써본 일이 없는(이것은 김용 자신의 말이다) 편집에게 완전히 맡겨둘 리는 없는 것이다. <<서검은구록>>의 앞의 몇 부분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전혀 사람들의 주의를 끌만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심한 독자라면 이 책의 제7장 <<검기침침작룡음>>부터 글의 품격이나 필법이 대폭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후부터 이 소설을 속된 틀을 벗어난다. 당시에도 이 작품은 절반가량 연재한 이후에야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는데, 그렇다면, 후반부의 <<서검은구록>>은 누가 썼을까? 독자들이 양우생의 <<칠감하천산>> <<백발마녀전>>을 읽어봤다면, 그것을 <<서검은구록>>과 비교해봐라. 내 생각에 첫번째 대리작가는 양우생이었을 것으로 본다.

 

여섯째, 1956년에 쓴 <<벽혈검(碧血劍)>>은 김용이 혼자서 독립적으로 쓴 첫번째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홍콩상보(香港商報)>>에 연재되었다. 이 때의 양우생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를 위하여 대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작품설계에서든 도움을 준 것같다. <<서검은구록>>의 성공은 김용으로 하여금 한 가지를 확실히 인식하게 만들었다: 무협은 그저 주먹질하고 싸우는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벽혈검>>에서 배경은 명말로 하고, 숭정제와 그의 공주를 등장시켰다. 비록 약간 견강부회하기는 하지만, 이전의 무협소설의 틀은 벗어난 것이었다. 소문에서처럼 불학, 유학과 도학에 정통하다는 김용의 깊은 내공이 이 소설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인용한 약간의 시사(詩詞)도 소설내용과 잘 맞지 않는다. 이 글에서 고의적으로 만들어내려고 한 원승지(袁承志)의 대협으로서의 풍모는 곽정이나 소봉과 거리가 멀고, 복수하려는 것에 있어서는 영호충이나 양과와 같이 언급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며, 소설에서의 핵심은 오히려 조연인 금사랑군이 훨씬 낫다. 이 책에서의 인물묘사는 너무 딱딱하고 수준도 14부의 작품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은 여러번에 걸쳐서 <<벽혈검>>이 그가 가장 만족하는 작품이라고 말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자기가 직접 쓴 소설에 대한 애착때문이 아니었을까?

 

일곱째, 1957년에 위대한 작품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의 연재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작품도 시작부터 재미있게 한 것은 아니었다. 김용은 아마도 당시 많은 기존독자의 독서습관에 맞추면서도 무협소설의 문학적인 맛을 가미하려고 생각한 것같다. 그리하여 첫 몇개의 장절에서는 집중적으로 이런 문구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바로, 저승에 억울한 귀신이 하나 늘었는데, 저승에 젊은이는 보이지 않는 구나이고, 불쌍타 이 여인은, 화용월태는 비길 여인이 없는데, 슬프게도 예쁜 영혼은 구천으로 갔구나" 이처럼 반쯤은 강호의 말이면서, 반쯤은 문어체인 말투이다. 이러한 말투의 특징은 나중에 보는 <<원앙도>>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바로 김용의 언어능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는 법률을 공부했고, 평론적인 잡문에는 장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내몽고에서 홍콩으로 온 한 인물이 김용의 붓을 이어받아 <<사조영웅전>>을 완성하게 된다. <<사조영웅전>>에는 있는듯 없는듯한 인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구천장(?千仗)이다. 이 인물은 소설의 전체적인 진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 황실공예품을 제작하는 장인들도 숨은 곳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여, 자기의 이름은 새겨두거나 했다. 들키면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런 리스크를 감수했던 것이다. 황용(黃蓉)이 등장하는 장면을 주의해보면, 절대 김용의 수법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대리작가인 예광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후의 김용작품에서 그를 대신하는 중요한 임무를 지게 되었다.

 

예광의 당시 신분은 홍콩으로 몰래 숨어들어온 하급 노동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외계인과 같은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다. 신문사 편집이던 김용은 우연히 이런 인재를 발견했던 것이다. 만일 예광이 김용의 대필작가를 한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을텐데, 왜 하지 않았겠는가?

 

(필자의 의도는 어느 사람을 공격하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과학적이고 사실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검토할 필요가 있는 이슈를 제기하는데 있다. 일부 팬들이 불만스럽더라도 양해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