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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金庸)과 세번의 결혼

by 중은우시 2007. 4. 9.

김용과 임낙이 

 

글: 장니(庄尼)

 

김용의 무협소설에는 사랑과 결혼 그리고 은원정구(恩怨情仇)에 관하여 많이 쓰여 있다. <<서검은구록>>에서 시작하여 <<녹정기>>에는 위소보가 7명의 아름다운 처를 얻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김용의 사랑과 결혼에 대하여는 별달리 알려진 것이 없었고, 외부에 알려진 내용도 정확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생활은 신비로움으로 쌓여 있었다. 몇년전 그는 CCTV의 <<대화>>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의 애정생활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처량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주 원만하지 못했고, 이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첫눈에 반하는 것이며, 백년해로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여인에게 미안한 일을 저질렀고, 다른 여인도 그에게 미안한 일을 저질렀다. 결국 자기의 혼인에 아름답지 못한 결말을 지었다. 그는 스스로 얘기한 바 있다: "나의 혼인은 이상적이지 못했다. 나는 여러번 이혼했다." 신문지상의 소오강호의 배후에는 그도 달고 쓰고 맵고 신 경험이 있었다. 그는 두번이나 결혼이 파탄났으며 그가 사랑하는 아들은 미국에서 자살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가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이다. 김용은 일생동안 3번 결혼했다. 첫번째 처는 두야분(杜冶芬)이다. 그들의 사랑은 1947년 항주에서 생겨났다. 그 때 젊은 김용은 <<동남일보>>에서 일을 했다. 유머난을 담당하다가 두야분의 남동생인 두야추(杜冶秋)를 알게 되었다. 두씨의 부친은 상해에서 의사였고, 모친은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8개의 금괴를 주고 항주에서 정원이 있는 큰 집을 샀다. 평소에는 딸과 함께 항주에 거주했다. 두야추는 부친을 따라 상해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방학때나 항주로 왔다.

 

하루는 김용이 담당하던 "미미박사의 질의응답"이라는 코너에 이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오리를 살 때 어떤 특징을 가진 것을 사면 맛있나요" 미미박사의 답은 이러했다: "목이 단단하면 신선한 것입니다. 깃털이 풍성하고 짙으면 반드시 살이 적당히 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 두야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했다: "미미박사님 당신은 오리의 깃털이 짙어야 맛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남경판압은 털 하나도 없지만 왜 그렇게 맛있는지요?" 미미선생은 이렇게 회신했다: "당신 말씀이 아주 맞습니다. 분명히 아주 재미있는 아이인 것같으니, 한번 만나서 직접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두야추는 이렇게 회신했다: "매일 시간은 많으니 언제든지 좋습니다"

 

김용은 어느 일요일 오후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서 당시 17살이던 두씨집 큰 딸을 만났다. 다음 날도 그는 다시 찾아갔고, 연극표를 건네주고, 두씨집안 사람들과 함께 동남일보사 옥상에서 곽말약이 편집한 <<공작담>>을 보자고 청했다. 이후 김용은 두씨집의 단골손님이 되었고, 한창 나이였던 두야분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1948년 김용이 홍콩으로 내려가기 전날, 급히 항주로 가서 정식으로 구혼했다. 동시에 상해에서 혼례를 올렸으며, 나중에 두야분도 홍콩으로 갔다. 두야분이 홍콩에 있던 몇년간 김용은 너무 바빠서 그녀와 함께하지를 못했다. 그녀는 혼자서 집에 심심하게 있었고,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대륙으로 되돌아가고 두 사람은 이혼절차를 밟았다. 그들은 혼인기간동안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 완차이에 살았다고 한다. 이 두야분은 아주 아름다웠고, 사람들이 두사낭(杜四娘)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나중에 이혼한 주요원인은 사랑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김용의 두번째 부인은 주매(朱枚)이다. 나중에는 김용이 바람이 나서 그녀를 버리게 된다. 주매는 신문기자출신이다. 그들은 1956년 5월 1일, 홍콩의 미려화호텔에서 혼례를 거행했다. 당시 김용은 아직 <<대공보>>에서 일하고 있었고, 현재의 홍콩 견니지도 2호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큰아들 사전협(査傳俠)을 얻었다. 3년후, <<명보>>를 창간했고, 주매는 그와 함께 창업때 고생을 하였던 유일한 여기자였다. 당시 주매는 자기의 악세사리를 팔아서 <<명보>>를 유지시킨 것은 나중에까지 미담으로 전해진다. <<명보월간>>의 초창기에, 김용은 전력을 다하여 일을 했다. 그때 그들의 집은 구룡에 있었고, 부부는 이미 2남2녀를 두었다. 주매는 아이를 돌보는 외에, 거의 매일 집안에서 홍콩섬까지 식사를 날랐다.

 

<<명보>>가 홍콩에서 큰신문으로 성장한 후, 그리고 <<명보>>가 이미 어느 정도 규모가 되었을 때, 즉, 김용의 사업이 성공하였을 때, 그들의 혼인에는 금이 갔고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이로써 어려울 때 함께 했던 부부는 서로 갈라진 것이다.

 

바로 이 때 또 하나의 사랑이 맺어지고 있었다. 당시 <<명보>>의 사옥은 북각영황도에 있었다. 김용은 신문사에서 힘이 들어 자주 부근의 한 식당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이 식당은 북각의 여지 부근에 있다. 김용은 미일 여기를 한번 들렀고, 식당의 주인은 그를 잘 돌봐주었다. 어느 날 김용이 이 식당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데, 한 젊고 예쁜 웨이트리스가 그에게 김용인지 물어본다. 그는 몇마디 농담을 하였다. 계산을 하는데, 김용은 이 웨이트리스에게 따로 10홍콩달러의 팁을 주었다. 웨이트리스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당시에 10달러이면 적은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웨이트리스는 김용을 말리면서 10달러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 여자아이는 '김용은 문인이고 글로써 살아가는 사람이며, 돈버는 것이 분명히 힘들텐데, 이 10달러는 그녀로서는 받을 수 없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김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이 여자아이가 어린데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후 그들 둘은 친구가 되었다. 바로 이 10달러팁때문에 김용은 또 다른 사랑과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김용은 처 주매와의 인연을 끊게 된다. 주매는 이후 고독하고 가난하게 여생을 살다가, 1998년 11월 8일 홍콩 완차이의 병원에서 사망한다. 향년 63세이다. 이는 김용의 말년이 휘황하였던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김용은 일찌기 CCTV의 프로그램에서 스스로 자괴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주매에게 미안하다. 나는 남편으로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녀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녀가 지금 세상을 떠나고 나니 더욱 견디기 힘들다."

 

용모가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속기가 없는 임낙이(林樂怡, May)가 지금은 김용의 처이다. 그녀가 김용을 만난 것은 겨우 16살때이다. 당시 임낙이는 호텔의 웨이트리스였다. 한번은 김용이 두번째 처인 주매와 부부싸움을 한 후에 실의에 젖어 그 호텔에 와서 우울하게 앉아 있을 때, 김용의 우울함은 그녀의 눈길을 끌었고, 실의한 김용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임낙이는 예쁠 뿐아니라 총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뒤로 그녀를 "소룡녀(小龍女)"라고 얘기하곤 한다. 매번 소룡녀를 얘기할 때마다, 김용은 이렇게 말한다: "처는 나를 잘 돌봐주고 있고, 나의 음식에 아주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먹고 저것을 먹지 마라고 하면 나는 다 듣는다" 그들이 어떻게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김용은 이렇게 말했다. "비록 우리같은 부부는 예가 많지 않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괜찮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존중이다."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해가느냐의 점에 대하여 김용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그녀는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화를 낼 때는 내가 말대꾸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그녀와의 관계가 아주 성공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실패도 아니다. 보통부부와 같다"